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n Nov 08. 2021

내가 사랑하는 책갈피들

책에 장소의 기억 덧입히기

  여행을 아주 많이 다닌 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20대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녀본 것 같다. 친구와 캐리어를 끌고 한 달 가까이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면서 짬짬이 틈을 내어 플랫메이트들과, 또 엄마와 여행을 가기도 했으니까. 아마 20대 때 가는 여행은 체력과 호기심으로 빈곤한 지갑 사정을 메꾸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여행을 다녀와서 남는 것은 역시 사진이다. 구글 포토에 날짜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사진들을 보면 그때 그 공간의 감각이 생생해진다. 밤이 되자 선선하던 파리 에펠탑 앞의 잔디밭, 근처 슈퍼에서 포도와 마실 것을 사들고 대충 잠바를 깔고 앉아 노닥거리던 기억. 여행한 곳 중 가장 아름다웠던 장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세 손가락 안에 들 할슈타트. 이미 초여름처럼 따스했던 영국 남부지방과는 달리 쌀쌀하고 청명하여 기억 속 선명한 색채로 남은 에든버러. 유럽을 다니며 본 수많은 성당 중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더불어 강한 인상을 남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 들어오던 늦은 오후의 햇빛이 벽과 바닥에 남긴 다채로운 광채.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의 생활을 뒤바꿔 놓은 후에는 더욱 멀고 아득해져 버린 기억들이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에딘버러의 올드타운과 바르셀로나 사그리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내부.

  나는 온갖 물건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 좁디좁은 자취방에 살 적에 내가 밥 먹고 자고 공부하는 공간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까지 끊임없이 종이책을 사모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행의 기억을 액정 속 사진이 아닌 다른 형태로 남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런저런 기념품을 진열해놓을 넓은 공간과,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기념품을 마음껏 사모으고 도시나 나라 간을 이동할 때 캐리어가 무거워져도 별 고민 없이 택시를 탈 수 있는 재력만 있었다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둘 다 없었다. 

  그래서 나는 딱 두 가지의 기념품만 모았다. 자석과 엽서. 자석은 생활하면서 매일 마주하는 냉장고에 진열해놓을 수 있어 따로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가장 애지중지하는 수집품은 엽서다.

  내가 방문했던 모든 곳에서 고심하여 고른 엽서들은 책갈피가 되었다. 나는 매번 새로운 책을 집어 들 때마다 엽서를 모아놓은 파우치를 꺼내 연다. 그리고 그 책과 가장 어울리는 엽서, 책의 배경이나 내용, 주제, 감정선과 가장 알맞은 기억을 담은 엽서를 골라 책갈피로 쓴다. 어떨 때는 책을 생각하면 내가 골랐던 엽서, 그리고 그 엽서를 산 장소가 한꺼번에 떠오른다. 읽은 책을 내 것으로 만드는 또 다른 나만의 방법이다.

  한동안은 이 파우치를 열어 엽서를 고를 일이 없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읽고 싶어서 읽는 책이 거의 없었고, 매주 빠르게 여러 권의 책을 독파해야 했기 때문에 여유롭게 책갈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 소소한 취미를 잊고 살았다. 다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문학생활로 돌아온 지 꽤 시간이 흐른 오늘에서야 문득 주변에 있는 아무 종이나 책장 사이에 끼워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 엽서들을, 내가 내 손으로 골라 모은 책갈피들을 어쨌지? 파우치는 책상 서랍 안에 얌전히 들어있었다. 오랜만에 그 안에 든 엽서들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어울리는 책갈피를 골랐다.

  지금 이 순간 집중해서 읽고 있는 책은 『글 쓰는 딸들』이다. 서평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꼼꼼히 읽고 있다. 이 책의 책갈피를 골랐으니 조금 더 내 책이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메모를 하며 끝까지 읽어나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업으로서의 공부를 그만둔다는 선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