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꿈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p L Jun 01. 2024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버스 미널은 미래적인 분위기였다. 온통 흰색과 회색으로 된 인테리어에 파란색 직물 같은 느낌이지만 직접 만져 보면 플라스틱으로 엮은 것이 확실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공간은 네 등분되어 있었고, 각 공간에는 의자가 두 개짜리가 네 줄로 배열된 세트가 넷씩 있어서 앞뒤로 통행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없었다. 짐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의자는 두 칸씩만 있는 것이 편리해 보였다. 어쩌다 맨 앞으로 해서 마지막 칸으로 가서 앉았는데, 마치 극장 같은 분위기라 다시 다른 칸으로 가려고 하니 맨 앞으로 다시 와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통 터미널에는 대형 텔레비전이 의자들 앞마다 보기 쉽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여기는 대형 스크린 하나로 뉴스를 틀어 놓았고 그 아래쪽으로 어디 가는 버스가 도착하고 있다, 같은 자막을 내보내고 있었다.
공간 뒤로는 버스들이 들어와서 지나가고 있었는데, 버스는 두 줄로 들어와서 중간에 중앙선 역할을 하는 보도가 있어서 그쪽으로도 사람들이 많이 탔다. 버스와 대기소 사이는 통유리로만 막혀 있어서 얼마든지 내다볼 수도 있고 내가 서서 체조를 하면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앉아 있을 자리가 없었지만 어떤 할머니가 버스를 보고 재빨리 나가서 그대로 버스에 올라타는 바람에 뒷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내가 탈 버스는 대기소 바로 뒤가 아니라 그 뒤 길을 건너서 타야 했기 때문에 자막을 보고서야 도착한 것을 알고 천천히 가방을 끌고 나갔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짐을 받아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별 일 없이 냉장고에서 베이컨과 계란을 꺼내 구워 먹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복을 입고 차를 끌고 출근을 했다. 한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고, 출장 갔던 서류도 정리하고 있는데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누군가 고함을 치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고함 소리도 들렸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볼까 했지만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마음껏 출력하고 서명하고 스캔하는 일을 모두 끝냈다. 그 후 컴퓨터로 서류를 모두 마무리하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나타나서 나를 불렀다. 입구로 가라고 한다. 아까 그 시끄러운 것 때문인가.
입구 쪽으로 가 보니 어떤 흑인 여자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 몸집 작아 보였지만 키가 작지는 않은데 어디서 나는 기운인지 목소리가 우렁찼다. 어디선가 경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무슨 소리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그러자 그 여자가 나를 똑바로 보면서 소리쳤다.
"저 썅년은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요? 말을 알아듣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나보고 쳐 꺼지라고만 했다고! 그게 경찰이야? 너네가 점령군이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제가 지금 하는 말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궁금하다는 거잖아요. 조용히 말해 보세요."
"내가 조용히 했으면 지금까지 여기 있었을 것 같아? 목소리를 안 낮췄으니까 너도 여기 나와 본 거잖아! 다 똑같아!"
"다 똑같아서 아무 희망도 없으면 여태까지 기운 쓴 게 허무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말해 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경찰이 딱지를 끊었어! 내 차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러면서 나에게 고지서 한 장을 내밀었다.
"내 차라면서 나한테 보냈는데 이거 내 차가 아니라고 말을 해도 돈 내라는 소리 말고는 할 줄 아는 소리가 없어! 너네가 국세청이야? 무슨 돈이야 새끼들이!"
"잠깐만 조용히 해 보세요. 지금 이 번호 차는 어디 있습니까?"
"조용히 하긴 뭘 조용히 해, 이 똑같은 새끼야!"
"앞부분만 듣지 말고 뒷부분도 좀 들어 보세요. 차는 어디 있습니까?"
"내 뒤에 있는 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너 글자 못 읽어?"
경찰서 입구를 막듯이 세워져 있는 하얀색 폭스바겐이 보였다. 차 번호를 보니 사진에 있는 것과 같은 번호가 맞았다. 그런데 사진에 있는 차는 도요타이다.
"이거 마크만 바꾼 거 아니죠?"
"너도 똑같아, 으아아아아아!!!"
여자가 갑자기 더 크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성량에 경찰서 앞 도로를 지나던 차들도 속도를 줄이고 무슨 일인가 구경하며 지나갔다. 어서 해결을 해야 끝나겠다는 생각에 사진을 자세히 보니 사진에 있는 차는 차폭도 더 좁고 무엇보다 브레이크 보조등이 뒷유리로 보였다. 내가 알기로는 저 폭스바겐 모델은 브레이크 보조등이 없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사이 차 뒷유리를 확인하러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이제 그냥 개 무시하는 거냐? 경찰들은 다 똑같아!!!"
여자의 목소리가 어디까지 커질지 궁금해질 정로 더 사나워졌다. 뒷유리를 확인하고 사진과 다른 차라는 것을 확신한 후 여자에게 와서 말했다.
"들어오시죠. 사건 접수 하겠습니다."
여자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눈동자가 커졌다.
"사건이라니요? 저 잡혀가나요?"
"잡혀간다면 아가씨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옆에 서있는 경찰들에게 말했겠지요. 이건 경찰이 확인하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남의 번호판 번호인 것처럼 해서 법망을 빠져나간 거라 중범죄입니다. 정식으로 사건 접수를 하시면 범인을 잡아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사건 접수가 정식으로 되면 그 서류를 근거로 이 고지서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나는 옆에 있던 경찰들에게 눈짓을 하고, 다시 들어와서 내 자리에 있던 노트북을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여자는 휴게실은 처음인 양 어색해했다.
"어디 경찰들 많거나 유리가 많거나 하는 곳으로 가는 거 아닌가요?"
여자가 살짝 겁에 질려서 물었다.
"흑인이라고 그렇게 조사만 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은 조사를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정식으로 범죄를 신고하러 온 거고 저희는 그걸 들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안에서 그나마 편할 만한 장소로 모시는 게 맞죠."
그때 다른 경찰관, 나를 불렀던 경찰관이 휴게소에 커피를 마시러 들어오려다가 우리 둘을 보고 다시 나가면서 입모양으로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라고 묻길래 나는 엄지만 들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우선은 여자의 차가 고지서 날짜의 날에는 하루 종일 주차되어 있었다는 것, 도난당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확보했다. 누군가 몰래 타고 나가서 찍힌 거라면 그것대로 다른 종류의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여자는 경찰관이 자신의 차가 찍힌 사진에서 번호판을 그 여자의 번호로 바꾸어 고지서를 여자에게 덮어 씌웠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나는 고지서의 발행 과정을 알려 주고, 그것은 이 지역 경찰서와 관계가 없고 주 경찰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일이어서 주 경찰이라면 몰라도 우리 경찰서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번호판 도용을 정식으로 사건 리스트에 등재했다. 곧 검사에게서 연락이 올 것이다. 알아서 수사를 일단 해 보라던지, 다른 곳에서 비슷한 신고가 있었다면 통합해서 자기들이 지휘를 하겠다던지.
여자의 고지서에는 '진행 중인 사건'도장을 찍고 내 사인을 한 후 날짜와 사건 리스트 등재번호를 기입했다. 여자에게 원본이 아닌 것 같 원본은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그것은 집에 있다고 했다. 경찰이 빼앗을까 봐 무서웠다고. 그래서 방금 내가 사인하고 이것저것 기입한 그 종이를 옆에 있던 복사기로 복사한 후, 그 원본과 이 사본, 그리고 이 사본의 사본을 각각 다른 곳에 보관하라고 했다. 특별한 일은 없겠지만, 여자에게는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여자가 마지막 사본을 내밀었다.
"이건 경찰관님이 보관해 주세요."
시민이 경찰을 경찰로서 믿어줄 때, 사건을 해결했을 때만큼이나 보람이 느껴진다. 오늘처럼.
여자는 다시 차를 몰고 갔다. 일부러 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것은 보지 않았다. 지금도 내 서랍을 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스토킹이나 강도 같은 사건이 아니니 특별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입구 쪽에서 급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해서 보니 그 여자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 일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여자가 급히 돌아와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고 말았다.
"무슨 일이에요?"
여자는 의외로 느긋한 표정이었다. 대답 대신 뒷문을 열더니 도넛을 네 박스를 꺼냈다.
"너무 소란을 피운 것 같아서요. 아까는 죄송했어요. 어차피 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랬어요."
"아니, 이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이만큼이나 사놓고 환불하는 건 실례니까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여자가 활짝 웃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저는 가볼게요."
"네, 이번에는 진짜로 가세요. 또 보이면 저 심장마비 걸릴지도 모릅니다. 딸아이도 둘이나 있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하하, 걱정 마세요. Bye!"
도넛은 십 분 만에 동이 났다. 누가 사준 건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건 편했다. 누가 사 왔냐는 말에 아까 입구 여자라고만 하면 다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하나씩 집어 먹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얀시네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