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에 걸쳐 이어지던 꿈. 이 꿈은 스케일이 매우 컸다. 배경의 전체는 어떻게 생겼는지, 시대는 언제인지, 국가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던 곳은 삭막한 시멘트 담이 여기저기 있는 동네였다. 걸어서 역 방향으로 걸어가면 커다란 삼각형 모양의 공원이 있고, 보통은 그 공원을 가로지르지 않고 그 공원을 따라 가장자리로 고급 주택들의 시멘트 담을 따라 걷는다. 계속 걸어 올라가면 지하철 역이 있고 거기서 한 블록을 더 가면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그 버스 정류장과 길 건너편에 있는 버스정류장은 그 도시의 대부분의 버스가 지나간다. 종점이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버스 정류장은 학교 다닐 때까지는 항상 이용했지만 꿈을 꾼 그 시점의 나는 지하철만 이용했다. 그 지하철은 1호선이었다. 역이 작아서 상하행만 있는데, 두 정거장을 더 가면 3호선과 환승이 되는 역이 나온다. 그곳은 3호선만 환승되는 게 아니라 1호선도 다른 곳으로 가는 열차도 탈 수 있는데, 그곳은 완전 시골이라 열차가 완행으로, 최고 속도로 달려도 시속 40킬로 정도여서 문이 달려 있지 않아 열차가 출발해도 역을 벗어나기 전에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잡아 타곤 했다. 나는 3호선을 타고 다른 곳을 가본 적은 없다. 그 환승역까지와 시골로 가는 1호선만 타 보았을 뿐이다. 환승역은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다. 내려서 3번 출구와 8번 출구가 있는데 3번 출구로 나가면 일반적인 역세권처럼 많은 건물들이 있고 앞에는 로터리는 아니고 그냥 유턴하는 모양으로 몇 차선짜리 길이 있다. 거기서 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식당에 갔다가 다시 그곳에 와서 전철을 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곳은 8번 출구이었다. 8번 출구는 출구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다른 지하철 역 출구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오면서 야외도 아니고 형광등 불빛도 아닌, 노란 전구 불빛들이 눈부시도록 밝게 빛나는 것을 알 수 있다. 5층 높이의 쇼핑몰이 서 있고, 그 한쪽 끝에는 청계천 동아일보 건물처럼 둥글고 긴 유리 건물이 지하철역과 마주하고 있다. 지하철역 근처는 그저 보도블록뿐이지만 쇼핑몰의 유리벽에서 쏟아져 나오는 전구 불빛이 주변을 항상 황금빛으로 비춘다. 그리고 추워서 조금 빨리 걸어 쇼핑몰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으로 식당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식당이 아니겠지만, 1층은 모두 식당이었다. 나는 입구 쪽에서는 다른 곳을 가본 적이 없다. 이곳은 옷도 비쌀뿐더러, 주차장과 지하철이 모두 가까워서인지 명품 위주이기 때문이다. 반대쪽 끝도 가본 적이 없다. 일종의 부메랑 모양의 건물인데 한가운데 꺾이는 부분은 크게 원형 광장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마치 장난감의 관절 부분 같은 생김새다. 그리고 그 부분의 지하 1층부터 2층까지는 커다란 서점이 위치하고 있다. 서점은 천장이 너무나 높아서 손에 닿지 않는 책들도 많은데, 인공조명밖에 없어 색이 바래는 일이 적어서 그런가 책들을 창고에 넣어 두기도 하지만 상당량을 위쪽에 꽂아 두었다. 책이 있다고 했는데 없어서 직원을 부르면 위에 올라가서 책을 빼다가 아래에 꽂아 넣는 식이다. 직원들이 수시로 사다리를 타고 다니고 있고, 서점 안도 똑같이 노란색으로 조명이 되어 있다 보니 표지가 조금만 화려해도 눈부시게 빛났다. 두께가 600페이지에 달하지만 판형이 크고 앞뒤 표지도 두꺼워서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 않던 책이 꽂혀 있어서 한 권 뽑아서 읽어 보았다. 단순한 세계사 책이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림이 조금 자세하네,라고 생각을 했지만, 깨어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꿈속에서 내가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역사가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의 세계사는 아니었다. 그 책에서는 지구상에 나라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곳의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도 우리 지구처럼 대부분 전쟁이었다. 그 외에도 종교서적도 있었는데, 한 종류의 경전만 있었다. 수첩 만한 것부터 보통의 단행본 만한 것까지 있었는데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나는 그곳에 가면 보통 소설 쪽에 있거나 인테리어 용품들 파는 곳에 머물렀다. 소설은 대부분 판타지였다.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은 모두 하나같이 일상이 배경일뿐이었고 신나는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 세계관이 현실과 완전히 다른 소설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종류는 대단히 많아서 서점의 한 20%를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곳은 책이 크거나 하면 아무 데나 펼쳐놓고 읽을 수 있었지만 판타지 소설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워낙 많아 책을 들고 다른 서가 있는 곳에 가서 서서 읽어 보아야 했다. 내 기억에 꿈에서 책을 구입한 건 한 번밖에 안 된다. 동전을 내고 거스름 동전을 받았다. 아마 카드 개념이었던 것 같다. 동전이기는 한데 쓰여 있는 금액을 보고 전달을 하고 그곳에서 거스름 동전에도 금액이 쓰여 있어서 그 동전을 주는 것이다. 1000원을 내고 700원짜리를 사면 100원짜리 세 개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300원이라고 되어 있는 동전을 만들어서 돌려주는 것이다. 조폐 개념이라기에는 단순히 카드 형태만 아닐 뿐 기프트카드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 인테리어용품 파는 곳에서는 판다옷을 보았는데, 누군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린애에게 사주려고 했던 것 같다. 대충 팔 길이를 당겨 길이만 짐작해 보고 그냥 내려놓고 나왔다. 그 쇼핑몰의 비싼 식당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날이었다.
그 외에는 시골로 가는 열차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서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바닷가에는 커다란 배들이 두세 척 정박해 있었는데 너무 복잡해서 그 근처는 기억이 나지 않고, 단지 관광 상품으로 표를 구입한 모터보트를 탔는데, 커다란 배가 정박해 있는 곳 말고 새하얀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곳이 있어서 거기까지 차를 타고 도착하니 모터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터보트를 타고 15분쯤 달리자 콘크리트 구조물이 끝나는 곳이 나왔다. 거기에도 조그맣게 정박장이 있어서 모터보트를 대고 밧줄로 묶은 후 둑을 닫고 물을 빼서 아예 모터보트를 물밖에 꺼내놓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콘크리트 구조물 위를 걷다 보니 바다 쪽으로 바짝 가자 멀리 서는 보이지 않았던, 하얗게 칠한 가느다란 난간이 있었다. 희한하게 난간의 높이는 3미터 가까이 되었다. 사람이 추락하지 않고도 기댈 수 있게 하기 위해 높게 만들었다고 했다. 난간에 기대어 내려다보니 저 밑에 한 5미터 아래에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프로펠러가 있었다. 조수에 의해 조금씩 돌기도 하고 특히 태풍이 불면 그 프로펠러가 돌면서 전기를 생산한다고 한다. 때때로 간조일 때 큰 배가 걸리면 프로펠러를 돌려서 물을 아래로 밀어내면 순간적으로 큰 배가 있는 곳의 수위가 올라가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모터로 사용하기에는 전기 소모가 너무 많아서 정말 특별한 상황이라 보상비를 받을 것이 확실한 때에만 그런 식으로 가동한다고 했다.
전철을 타고 시골로 가는 종점에 도착하기 전에 내리면 산 중턱처럼 생긴 곳이 나온다. 전철역이지만 출구가 하나이고 나가면 산기슭에 버스 정류장 하나 달랑 있다. 거기에는 기차가 도착할 시간마다 버스가 와 있는데, 그 버스는 마을로 연결되어 있다. 버스를 타면 10분이면 도착하지만 그 길가에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산속이라 야생동물이 나오는 일이 많아서 버스를 타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하다고 한다. 꿈속에서 모종의 이유로 버스기사가 그 시간대에 버스 운전을 하게 되지 않았는데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대낮에 전철역까지 급히 걸었던 적이 있는데 계속해서 개 짖는 소리가 나서 무서웠다. 그런데 버스를 탈 때는 전혀 몰랐는데 어렴풋이 열차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오자 전철에 그려져 있는, 이중으로 그려진 원에 뭔가 뾰족한 것이 나 있는 마크와 똑같은 것이 가슴과 등에 새겨진 사람들이 총을 들고 나타나서 열차를 타러 온 거냐고 물었다. 그들은 역 근처에 야생 동물이 자주 나타나서 지키는 거라고 했다. 버스라서 안전했던 것이 아니라 안전한 상태를 만들어 놓아서 버스가 다닐 수 있던 것이었다.
마을은 그냥 시골이다. 별 거 없지만 자치가 민주적으로 잘 되어 있고, 휴양하기도 좋아서 두 번이나 가족여행을 왔었다. 특히 마을 한가운데 만들어 놓은, 관광객 전용 호수가 아름답다. 그 옆에 고즈넉하게 통나무 오두막을 열몇 개 지어 놓아서 전원단지 같이 사진도 잘 나온다. 마을 끝에는 아파트도 있는데 회색으로 우중충해서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지만 도시에 나가서 페인트칠을 하면서 돈을 벌다가 암에 걸려 돌아오신 분이 있어서 그분이 오시고 나서는 마을 전체에 어디서도 페인트칠을 다시 하지 않아서 그 회색 아파트는 그대로 있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아서 옆에서 뭐라고 할 말은 딱히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집과 남이 사는 집의 차이일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오래되면 낡을 건데 뭐 하러 또 칠하냐, 이런 거고 남의 집은 내가 겉만 보니까 속이야 어떻든 좀 예쁘고 깔끔했으면 좋겠다 싶고.
시골에서 무슨 전화를 받고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쇼핑몰에서 다섯 정거장인가를 3호선으로 갈 일이 있었는데, 도착해서 내려보니 그곳에는 고급 호텔이 있었고, 각 자리가 방으로 이루어진 비싼 열차가 특별운행되었다. 나는 거기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뭔가로 초청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일하는 사람 외에는 나 혼자만 차가 아닌 3호선을 타고 걸어와서 다들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들과 함께 호텔에 들어가서 방에 함께 갔는데, 외부는 중세에 지어진 성 같은 모양이었지만 내부는 투명한 엘리베이터와 각종 번쩍거리는 금속성 자재로 가득했다. 무려 80층짜리 건물이었지만 옆으로 넓었고 실제 창문과 달리 건물의 창문 모양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멀리서 보면 80층짜리가 아니라 한 10층 되는 중세 성같이 보였던 것이었다. 우리는 70층 정도에 있었는데, 60층 이상은 별도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편했지만 편의시설은 30 층대에 다 있어서 회의에 참석하건 분식집을 가든 1층에 내려왔다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모든 장소는 마지막에 시골에서 지하철역을 거쳐서 3호선을 환승하고 다시 내려서 호텔로 간 것을 빼고는 모두 각각 다른 날 꾼 꿈들이다. 그런데 왠지 모두 저 전철이 매개가 되었고, 전철을 매개로 해서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혹은 전철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동안, 아니면 길을 걷는 동안 전철역에서 어디에 내리면 뭐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곤 했다. 현실의 나를 떠올리지 않은 건 좀 의외였다. 오늘도 바닷가가 있는 외국 마을에 가서 시골로 가는 열차 종점에 있었던 바닷가 마을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서점에서 책을 들춰보고 서가를 둘러보면서도 꿈속에서의 학창 시절 학교 근처에 있던 조그마한, 참고서만 대부분 판매하던 서점을 떠올렸지 교보문고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꿈속에서 세계관을 새로 만든 게 아니라면, 그런 세계가 실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