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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06. 2024

해야 한다, 하고 싶다, 결국 쓴다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잠시 심호흡을 한다. 입력 언어가 한글로 설정이 되어 있는지 'ㄴ'을 먼저 눌러본다. 'ㄴ'이 찍혀도, 's'가 찍혀도 일단은 지워야 하는 것은 똑같지만 '한/영'키를 누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달라질 것이다. 거기까지가 글을 쓸 준비, 물리적인 준비의 전부이다. 그 상태로 머무는가 글이 시작되는 상태로 가는 가 하는 것은 순전히 뇌의 작용에 달려 있다. 메모를 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어 글을 쓰려고 했는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준비를 하다가 바로 직전까지 쓰려고 했던 문장을 잊어버렸던 적이 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대단히 풍부한 배경과 스토리에 감탄을 했지만 막상 글로 쓰려고 하니 꿈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샤워하면서 기발한 글감이 떠올랐는데 욕실 밖으로 나오니 물거품처럼, 아니 비누거품처럼 씻겨 내려갔을 때와 같은 그런 '한순간의 증발' 같은 것이었다. 그럴 때면 허탈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그 경험에 대해 쓰는 것뿐이다. 최대한 잊어버린 것을 다시 기억해 낼 노력을 하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 글을 쓰는 것만큼 대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이 돌아오는 일은 드물다. 메모를 보고 글을 쓰려고 했다면 다행히 그 메모를 다시 보고 글을 쓰면 된다. 꿈이나 새로운, 적어두지 않은 아이디어의 경우에는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렸다고 보아야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나중에 똑같은 생각을 해낸다 하더라도 전에 떠올렸던 것이라고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새로운 생각을 했다고 확신을 하면서 전에 잊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누군가와 대화하듯 혼잣말을 하면 의도치 않게 어려워 보이던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있는데, 간단해서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어나갈 수 없을 것 같던 아이디어나, 너무나 막연해서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느낌, 특히 갑갑함이나 알 수 없는 기분 나쁨의 경우에 혼잣말을 할 때처럼 글과 대화하듯 내가 의식적으로 하는 생각과, 그 생각에 바로 직전에 한 생각이 만나 생기는 마치 공상의 세계를 탐험할 때처럼 저절로 나타나는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어 적어 나가면 의도적으로 떠올리려고 했다면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방향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것을 여러 번 겪어 보았고 그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정확한 독자를 두고, 의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글쓰기 방법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 전달의 목적으로 쓰는 글에 대한 이야기이고 거기에 비하면 내가 매일같이 쓰면서 즐거워하는 글은 의식의 흐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글을 다른 사람들과 함보는 것 역시 나의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도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적을 수 있기 위해서이다. 생각해 보면 정보 전달을 위한 글 역시 하고 싶은 말을 문장으로 적어놓고 보니 문장들의 의미가 불확실해서 답답하다면 아무리 독자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의도가 분명하다고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좋아서 글쓰기에 대해서 주야장천 떠들지만 그것도 의식의 흐름을 좇아서 자유로운 생각을 최대한 생생하게 쓰는 글>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특이성이나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일까? 사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쓰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읽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나서 '쓰레기 같은 글'이라고 느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금할 수 있는 일이다.
글쓰기가 좋고,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어 나오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다시 적는 것도 좋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활자중독 같은 것은 아니다. 생각이 문장이 되는 것, 머릿속에 구름 같은 아이디어가 사람이 하는 말의 형태를 띠는 무엇으로 바뀐 후 눈으로 보이는 글자가 되는 것에 알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내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감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세상의 이치가 신비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남이 쓴 글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많다. 한 예로 '알렉산더 해밀턴' 전기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 분명 저자는 자신의 생각으로 그 두꺼운 책을 채운 것이 아니다. 사실과 사실에 대한 추론만 잔뜩 담았을 뿐이다. 그런데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미국의 기초를 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모두 세운 사람이라 한 일이 너무 많아 공적인 부분만 해도 책이 그 두께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힘들게 5일이나 걸려서 다 읽고 나니, 정작 는 그 책을 읽느라 진을 뺐는데 해밀턴이라는 사람은 그 책에 있는 내용을 모두 행동으로 옮긴 사람인 것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한 모든 일들이 책을 읽기 힘들게 만든 것도 맞다. 쉽게 지나간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책 속에 문장의 형태로 들어가 있다가 내 머릿속에서 그가 다시 살아나서 그 일들을 하는 것처럼 상상이 되는 것은 단순히 '책 읽기'라는 세 글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다. 그 책이 두꺼워서 예로 들기는 했지만 에세이나 노인과 바다 같은 소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문장이었는데 머릿속에서 세계가 열린다. 나 또한 그런 글을 쓰려고 매번 발버둥 친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런 노력을 알아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나 또한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서 그것이 죽기 직전에 나온 한 편의 에세이, 단 천 글자 정도에 담긴 내용만이라도 그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 또한 글로 밥벌이를 하지 않는 자의 여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노력은 결실을 바란다. 아니, 노력은 그 노력을 내가 쏟아준 그 자체로 보답을 얻었다. 결실을 바라는 것은 나다.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따라온다면 거절할 리가 없다.
그렇게 뭔가를 표현하려고 발버둥을 치면 쓰려고 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게 큰 문제가 될 수가 없다. 문제는 간혹 회사 일에 지쳐서, 혹은 날씨 탓에 그저 누워 있고 싶을 때 글을 쓰고 싶은 간절함을 잃어버리면서 발생한다. 뭔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은 그대로 있는데 써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그야말로 노력의 가성비를 따지는 상황 같은 경우인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시험기간이 되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얼마나 적은 노력으로 얼마나 많은 점수를 얻었는지에 대한, 노력의 가성비 이야기였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점수를 올리는 것. 그래서 시험 범위로 부족해서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찍어달라고 하고, 족보를 찾는다. 심지어 대학시절 논리회로의 개발 원리를 알기 위해 수학교육과의 집합론을 들어보라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문과대에 가서 수강했을 때는 교수라는 인간이 "학과 내에 도는 족보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 족보를 구하는 것도 력이다"이라며 그냥 족보 그대로 시험을 출제한 적도 있다. 그러니 수학교육과 학생들 외에는 C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족보를 포함해서 그런 '노력의 가성비를 찾는 노력'은 내가 보기에 거지근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마디로 불로소득을 얻는 일이니, 그게 구걸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니 '써야 한다'와 '쓰고 싶다'가 충돌할 때 나 스스로에게 느끼는 짜증은 아마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누군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그 정도로 짜증을 낸다고? 글을 쓰는 게 본업도 아니잖아?'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모두 그럴 만하다.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이지 의무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내가 쓴 글 못지않게 '글을 쓰는 나'에 대한 애정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적어도 끄적이는 글도 포함해서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표현하고 생각을 풀어내는 과정이 없었다면 현재의 나는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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