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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07. 2024

생과 사와 글과 꿈

내 글을 읽던 아내가 갑자기 웃었다. 내 글에 웃긴 부분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내가 "무슨 일이야?"하고 묻자 아내가 대답했다. "오빠 글이 점점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변하다니? 어떻게?" "점점 신부님이 쓰는 글처럼 되어 가고 있어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분위기가 가라앉은 글은 생과 사에 대한 이야기와 겉으로는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들은 생과 사에 대한 가설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천국과 지옥과 연옥과 이승.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를 실시간으로 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지옥대로 그저 신을 알지 못하는 상태, 신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만의 그늘을 찾는 상태, 물질적인 세계에서 존재하기를 포기한 상태 등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천국에 딸려 있는 연옥 역시 있다, 없다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다. 둘째, 윤회와 해탈이 있다. 하지만 해탈을 믿는 사람도 굳이 이승이 더 낫다고 하는 걸 보면 윤회만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승에 대한 모멸감 같은 것이 들지 않는 이상 해탈을 선택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나 또한 삶을 너무나 좋아하니 그 관점에서 보이는 것이라서 그 정도일지도 모른다. 셋째는 그저 물질적인 세계만 있고 우리는 뇌신경이 만들어 낸 가상의 자아이 육체가 죽으면 그대로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넷째는 이상적인 세계가 따로 있고 이 세계는 그 세계의 물리적인 복제본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는 내 주위에서 본 적이 없어 딱히 할 말이 없다.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공식적으로는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고 대답한다. 물어보는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는다고 하면 천국과 연옥과 지옥을 믿는다고 대답한다. 이런 주제에서 중요한 것이 혼자 있을 때, 내가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대화를 통해 답이 나오는 사실의 문제였다면 수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싸우고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공식적 대답을 만들어 놓고 말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의 대화가 귀찮다는 뜻이다. 다들 아는 이야기로 대충 대답을 해 주는 것으로 그 방향으로의 대화를 끝을 내고 나면 그걸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천 원짜리를 발견했지만 줍거나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사실, 나의 생과 사에 대한 관념은 2004년 이후 굉장히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꿈과 글에 대해 많은 미련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글을 계속해서 써 나가지만, 글쓰기의 시작은 어쨌거나 꿈을 받아 적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었고, 그것은 2004년 어느 날의 잊어버린 꿈, 3일 이상이나 꿈의 후유증이 계속되었지만 적어 내려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꿈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꿈은 일생이었다. 한 여자로 태어나 자녀 넷을 낳고 과부가 되어 남편의 회사를 이어받아 어찌어찌 일으켜 세운 후 자식들이 잘 사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60년 같은 하룻밤. 꿈에서 깨고 나서 분명히 첫째 날은 울기만 했고 둘째 날은 그 꿈에서도 좋았던 일, 나빴던 일을 떠올리면서 사람 사는 일이 다 똑같구나 싶다가도 혹시 너무 생생한데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까, 한번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때는 한국에 있지 않았기에 나중에 찾아보자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았는데, 아쉬운 것은 마지막에 막내딸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장면 이후 너무 그 감정에 몰입해 있던 탓인지, 지금 기억나는 것은 막내딸을 보지 못했던 억울함 뿐이다. 그림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그 얼굴들을 잊어버리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자잘한 일들 역시 기록해 놓지 않은 탓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간에 커다란 사건들, 남편의 죽음이나 첫째가 무엇을 하고, 막내가 유학을 간 것 등 그런 것도 흐릿하게 남아있기만 하다.
그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 그렇게나 특별하게 느껴졌던 그 꿈은 사수많은 날들 중 하룻밤, 매일 꾸지만 기억나는 것은 며칠 되지 않는다는 수많은 꿈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는 그 인생이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이니 가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삶 깨고 나면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하룻밤 꿈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내가 죽으면서 그 영혼이 어디로 가서 어떤 갓난아기나 태아의 몸속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내 생이 어딘가로 이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라는 주체가 남아 있다는 것은 세상을 버릴 필요가 없으니 다행일 수도 있다. 게다가 어떤 아픔과 슬픔도 실제가 아니라 다만 내가 실제로 느낄 기회일 수 있다. 쉬운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않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정말 이 생도 다른 생에서 꾸는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면 여기서 우주의 구조에 대해 밝히는 것이 무엇이 중요 것인가? 현재 관점에서의 내 꿈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 중요 것인가? 이 지점에서, 대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내가 모든 생은 다른 생의 하루에 불과하다는 가설을 하나의 종교로 믿는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관점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을, 그리고 그 아이들을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으로 미루어 나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들 뿐인 걸까? 아니다. 그것은 내 꿈속의 그 사람의 가치관이었다. 나의 가치관은 다르다. 우주의 구조를 낱낱이 파악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한 다음 깨어나서 그 기억으로 새로운 발견을 이어 나가는 것이 내 꿈을 꾸는 사람의 원래 소명이었을 수 있다. 나는 인생의 역작을 쓰고 깨어나서 그 사람이 그것을 이어받아 계속 글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가 뭔가 도박의 냄새를 지우지 못하는 것은, 내가 꿈에 꾸었던 그 여인의 일생을 볼 때 나는 그녀의 가치관에 전혀 동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금자탑을 쌓더라도 내 꿈을 꾼 사람과의 가치관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는 그저 그것을 꿈속에서의 모험쯤으로만 생각하고 끝낼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해서 수많은 생을 통해 인류는 발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꿈을 꾸는 사람의 꿈을 꾸는 사람의 꿈을 꾸는 사람이 내 꿈에서 이룬 것을 내가 이용하는 것을 내 꿈을 꾸는 사람이 이어받고 그 사람의 꿈을 꾸는 사람이 다시 이어받는 식으로. 내가 수만 가지의 삶을 살아도 실제 우주에서 하룻밤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걸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는 그 꿈으로써 우주의 구조를 살짝 엿보았을 뿐이고, 우주는 Daniel Debruin이라는 사람이 만든 GOOGOL이라는 기계와 같을지도 모른다. 나는 첫 번째나 두 번째 톱니바퀴에 불과하고 내 인생이 몇억 번 반복되더라도 진정 나의 개체에게는 1초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생이 겹쳐지고 겹쳐져 한 사람의 꿈이 되고, 그 꿈은 그의 잠재의식을 자극하여 인류의 발전을 꾀한다."
나의 역할을 폄하할 수는 없다. 애당초 나 자신의 가치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우주에서 전부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나에게 얼마나 좋은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그렇지만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상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동기를 준다. 나를 꿈의 등장인물로만 생각하는 존재를 위해 목숨을 바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그에게 내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지식뿐이다. 어떤 지식을 죽으면서까지 가치관도 모르는 생판 모르는 남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 암호화폐가 등장한 것은 내 꿈 밖에서 암호화폐라는 것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그 반향일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있는 곳이 꿈 밖에 비해 과거라고 할 수는 없다. 미래라고 할 수도 없다. 외계인이라는 명칭이 있다는 것은 꿈 밖에서는 이미 외계인과의 전쟁이나 교류가 있다는 뜻인지를 고민해 보면 확실하다. 현실과 꿈 사이는 시간의 차이가 아니다.
애당초 죽고 나서 돌아온 사람은 없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생겨난다. 죽음에 다녀온 사람은 무언가를 보았다고 하지만, 순수하게 죽음에서 넘어 존재는 없다. 꿈 밖에서 꿈으로 오는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 세상은 자신의 꿈이고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로또 당첨이 되게 해 보라고 할 것이다. 단지 자각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이 꿈의 주인공이 맞다고 해도, 그것이 내 존재가 내가 죽고 나서 무엇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는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글로 그것들을 꺼내어 놓는데, 그것이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글쓰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적인 활동일 것이다. 마치 유대 민족이 성경을 써 모은 것처럼, 나에게는 저절로 떠올라 식물처럼 자라나는 생각이 포도나무요 시편이다. 내 글의 모음이 성경이며 글과 글 사이의 침묵이 곧 기도이다. 결국 글이 나를 떠받치는 공중의 에너지이며 힘이며 권력이다. 아무것도 아닌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존재라는 허무감이 들면 글을 쓴다. 영혼이 땅에 떨어져 깨지고 고민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짓이겨질 것 같을 때 글을 쓴다. 영혼이 굶주려 세상에 어떤 것에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고 인류에 대한, 물질 세게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어진, 너무 말라서 빵에 발라지지도 않는 버터 같은 상태나, 구워야 하는 건 알지만 이미 바짝 말라버려서 구우면 뻣뻣한 천조각같이 변해버릴 것이 확실한 빵과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책을 읽어 지식을 쌓거나 대화를 하지 않고 글을 쓴다. 내 안에 있는 것,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지만 계속 자라나는 그것을 세상에 펼쳐 놓는다.
인생꿈, 그것은 나에게 그 전과 후를 뚜렷하게 나누어 주는 국경이 되었다. 나는 그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 꿈을 꾸기 이전의 시간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나는 그 꿈 밖의 지금, 그 꿈 후의 지금에 머물러야 하는 운명이다. 여기서 글을 쓰고 계속 살아간다. '글쓰기가 좋다', '글을 쓰는 시간이 소중하다', '글을 씀으로써 나는 살아있다.'는 문장은 오만하다. 써야 하는 것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은 아니다. 똑같은 감정을 춤으로 해소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노래로 해소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이도저도 아니라면 술을 마셔야만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서 글쓰기로 풀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행운이며 감사할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이 꿈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꿈에서조차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무서운 꿈을 꾸었을 때 깨어나고 나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꿈에서조차 남의 의지에 휘둘렸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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