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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05. 2024

피부에 새겨지는 글쓰기

하늘이 조금 어둑어둑해진 느낌이다. 공기 중에 습기도 많아진 것 같다. 피부에 와닿는 온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습기 때문에 여름날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날은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소나기도 그런 식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사실 장맛비도 올 듯 올 듯하다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하는 법이다. 아직 여름이 오지 않은 6월 초의 날씨라기에는 너무 어색하다. 봄과 가을이 줄어들고 여름과 겨울, 그렇게 한국에는 두 개의 계절만 남은 것 아니냐 하는 농담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만 같다.
오늘처럼 아직 여름 같을 정도로 기온이 높지는 않은 날은 습도가 높을 때 음악을 틀어 놓고 제습기를 동작시키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에어컨으로 제습하는 것보다 조금 더 상쾌한 느낌이다. 그 상태로 책을 읽으면서 맥주 한 캔 들이키면 캠핑이 부럽지 않은 저녁이 되는 것이다.
보통은 습기만 많고 비가 쏟아지지 않으면 기분이 가라앉고 모든 일에 의욕이 사라진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머릿속에는 온통 이 습기를 벗어날 생각으로 가득 찬다. 글을 쓰려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있어도 계속해서 제습기니 에어컨이니 하는 생각만 가득 차는 것이다. 지금처럼 맥주라도 꺼내 와야 생각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여의도에서 맥주를 마셨을 때가 생각난다. 9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아직 여름의 기세가 완전히 꺾이기 전이었지만 여의도에서 한강변을 조금 걸은 상태라 덥기는 마찬가지였고, 콜라와 맥주 생각이 나서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한 캔 사 가지고 나왔다.
한여름에는 한강에 가지 않는다. 모기가 생각보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9월은 7,8월에 비하면 훨씬 낫다. 가을답게 선선하면 더 좋겠지만 기온은 생각처럼 그렇게 빨리 떨어지지 않는다. 한강변 벤치에 앉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건너편 둥근 건물의 '번개표' 마크를 쳐다보았다. 근처에도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지만 모두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지는 않지만 시끄럽지도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만 혼자 있는 것만 같았던, 가을밤이었지만 여름밤 같았던 그날의 날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밖에서는 책을 읽지 않지만 책 읽기에 매우 좋은 날씨였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책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언제나 책은 나에게 말을 건다. 내가 기분 때문에, 날씨 때문에, 햇빛 때문에, 걸어야 해서, 누워야 해서, 밖이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책들은 여전히 나에게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도 집안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책을 집어 들고 "대체 하루 종일 어떤 말을 하려고 한 건지 들어나 보자"며 표지를 넘기면 그때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새침하게 입을 다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 자기도 모른다는 듯이, 내가 살금살금 꼬드겨 가면서 한 풀 한 풀 벗겨내야 간신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다.
책은 아마 뒤표지 뒤에 자기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앞표지부터 한 풀 한 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벗겨내고 마침내 뒤표지에 다다르면 그제야 그 한 권의 책의 모습을 한 세계가 "맞아, 나 이런 이야기였어"라고 외치는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읽기 전에는 절대 그 뒤표지 뒤에 어떤 세상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치 공간 이동하는 통로, 인터스텔라의 구형 웜홀, 닥터 스트레인지의 둥근 불꽃의 게이트처럼 보통의 눈으로는 그 뒤에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없다고 믿지만 막상 닥쳐보면 그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뒤표지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표지 뒤의 세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통과해 나가야 한다. 한 장 한 장에 들어 있는 모든 문장이 내는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그 해답들이 모여 뒤표지의 세상을 열어 준다.
내가 쓰는 글도 똑같다. 시원한 곳에서 기운을 차리고 나서야 가능한 이야기겠지만(오늘도 앞부분을 쓸 때까지는 무척 더웠다.) 마지막에 하려는 이야기가 그 앞부분의 내용과 함께 한 편의 글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하려는 이야기 뒤에 뭔가 있어야 한다. 주제를 결말이라며 던져 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글이 끝나서 덮을 때, 그때에만 열어줄 수 있는 작은 세계, 혹은 작은 드라마 에피소드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없는 읽기는 얼마나 피상적이고도 슬픈가. 남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없다. 스토리로 몰입을 하면서 그 세계에 들어가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글을 샅샅이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단순히 내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을 수는 없다. 그것을 역지사지처럼 몰입어 앞으로는 어떻게 생각이 흘러갈지, 자신이 그런 기분이 되면 어떨지 그야말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읽는다. 따뜻한 이야기를 읽으면 내 세계도 따뜻한 곳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역시 세상은 싱거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런 것을 전해줄 수 없는 글은 외우라고 강요하며 한 줄 한 줄, 밑줄을 쳐서 해설해 놓은 참고서의 한 페이지와 다르지 않다.
아직은 책을 읽으면서 끈적끈적하다거나 여름의 햇빛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기운 빠지는 날씨라는 이야기는 많이 읽어 보았지만 그런 것을 실제 느낄 것처럼 나에게로 돌격하는 문장은 읽어 보지 못했다. 비가 쏟아져서 으슬으슬한 느낌, 추운 가운데 한줄기 지나가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봄날의 예표 같은 따뜻한 끝자락, 이런 것을 내가 문장 속에 박제해서 집어넣은 것처럼 읽은 사람이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글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글이 종이 위에 새겨져 있는, 그 사람의 살갗에서 재생되는 비디오와 같은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원한다. 과연 그런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가 그 첫 번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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