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상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p L Jun 05. 2024

계속해서 나아가는 길

모든 발걸음은 다르다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실제로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쓰지 못할 것 같은 느낌. 독자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당연히 머리에서 청소하기 위해서라도 꺼내 주어야 할 것들조차 꺼내기 힘든 때가 있다. 정말 글을 쓰지 못한다는 건 일단 쓰기 시작하고 나서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을 때에 가서야 알 수 있다. 아예 글쓰기를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실제로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더 이상' 써지지 않는다는 뜻이지 글이 아예 나오지 않을 때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은 손톱을 깎는 것과 비슷한 무엇이다. 머릿속은 한 번씩 정리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을 자기 파괴적인 방법, 예를 들어 술을 많이 마신다거나, 스트레스로 스트레스를 막는 듯한 격한 운동 등으로 풀 수도 있지만 손톱이 길어서 생기는 문제를 굳이 맨손으로 땅에서 흙을 파내어 손톱이 자연스럽게 닳도록 하는 방법으로 다듬을 필요 없이 그냥 손톱깎이를 사용하면 되는 것처럼,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정리하는 것도 글쓰기를 통해 깨끗하게 꺼내 놓을 수 있다. 글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꺼내는 과정만 제대로 된다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다. 손톱을 깎는 것은 예쁜 손톱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손을 예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듯이 글 역시 매일 쓰는 이유는 멋진 글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머리를 갖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때는 너무 머릿속이 어지러운 나머지 지금 써지는 글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나조차 의아할 때가 있다. 글이 반듯하게 가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가 마구 섞이는 것이다. 보통은 줄거리만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만 너무 심하면 혼자만 볼 수 있는 곳에 잘 숨겨 두기도 한다. 그래도 쓴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을 남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이제야 글 쓰는 연습을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사십이 넘어서 혼자 공을 던지면서 공에 속도가 나오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면 누구나 비웃을 것이다.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는 목적이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혼자 공을 던지기만 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니라면 공을 던지면서 속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글도 마찬가지로 당장 작가가 되기 위해 출판할 글을 쓰고 있다고 하면 누구나 '얼마나 글을 써 보았는데?'라고 물어볼 것이다. 거기에 '책을 다섯 권쯤 출판했지만 아직도 힘드네'라는 정도의 대답을 할 것이 아니면 너무 욕심낼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런 헛된 욕심을 품는 것이 스스로에게 죄짓는 일일지도 모른다. 걸음마 단계에서 이미 글을 더 이상 쓰지 못할 만한 핑계를 던져주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내 경우에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생각나는 가장 첫 번째 핑계는 주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이유 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내용도 써본 것 같고 저런 내용은 남들이 식상해할 것 같다. 또 다른 주제는 부정적인 내용이 될까 봐 별로다. 하지만 계속 강조하듯이 모든 글은 연습이다. 그리고 어떤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 말은 즉 내 몸은 그 아이디어를 내보내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로 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냥 써야 한다. 장난전화를 받았을 때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은 상대방 전화번호가 찍히기 때문에 장난전화는 줄어들었고 대신 전화를 건 상대방에 대해 안다는 심리적인 면을 이용해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처럼 처음에는 단순히 우리의 머리가 글로 내뱉고 싶어 하는 내용으로 시작했다가도 생각이 글에 맞추어 번져 나가기 시작하면 어떤 내용으로 이어질지 짐작하지 못한 내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과정을 즐길 권리가 있다. 또, 그 과정이 좋아서 글을 계속 쓰게 된다면 그처럼 큰 선물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 써 보았지만 또 같은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 역시 써야 한다. 같은 내용으로 시작한다고 해서 같은 글이 되지는 않는다. 그전에 글을 쓸 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얼마나 다른가? 이미 그 글을 써 보았던 내가 그 글을 처음 쓸 때의 나와 같을 수가 있을까? 언젠가 '시계'라는 주제로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 보았다. 다른 것도 가능하겠지만, 시계라고 하면 손목시계부터 컴퓨터 바탕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시계, 비행기 조종사가 보는 시각의 범위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여러 가지 물체로 쓸 수 있다. 이런 스스로와 하는 게임은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좋은 예시이다.
사실, 글을 써 본 주제인데 또 쓰고 싶어 진다면 평소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대상이고 아직 해답을 발견하지 못한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결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 계속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아니라도 최소한 믿어주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줄거리를 꿰고 그것을 천천히 구축해 나가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쓸 수 있으면 그렇게 쓰면 된다. 나는 그렇게 쓰지 못한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을 발견했다거나, 그런 방법도 나름의 단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건 연습을 하고 부러워한다고 해서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문을 작성하거나 할 때는 그런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개인적인 글쓰기에서 그런 방법을 썼다가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계획적인 글을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은 스스로가 나름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도 좋다. 글을 진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불문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글쓰기 과제로 선택한 점에서 스스로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방법과 관계없이 글과 생각을 병행하면서 나아간다는 것이 쉬운 도전이 아니니까.
글을 쓰고 싶지만 쓸 것이 없다거나, 쓸 만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거나, 생각은 났지만 글로 쓸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이야말로 착각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달아야 한다. 특별히 갈 데가 없다고 해서 걷를 할 수 없는 것 아니다. 짧다고 해서 글이 아닌 것이 아니고 썼던 것이라고 해서 똑같은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멀리 가야 한다. 매일매일 쓰면서 하루라도 더 죽음에 가까워지도록 글을 써야 한다. 오늘까지 글을 쓰는 것과 내일까지 글을 쓰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 결국 또 기다림의 문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