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당연스럽게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은 세상의 축소본이라고 믿었다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 걸맞게 이 한 권 안에는 세상이 들어 있는 듯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어 하고 있었다. 두꺼운 표지는 살짝 뒤틀려 있고 아마도 아주 추운 곳에서 갑자기 활짝 펼치면 어느 부분은 찢어지거나 부러질 것이다. 보통 플라스틱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조심해야 하긴 하다. 책의 구조는 종이 하드커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재료가 종이와 천, 실, 가죽이 아니라 종류만 다른 합성수지라는 지식만이 이 책을 조금 덜 돋보이게 할 뿐이다. 거뭇거뭇한 갈색의 표지 역시 단순한 재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마치 메타버스 안에 위치한 책 같은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거친 촉감을 느끼고 누르면 약간 푹신한 듯 들어가는 그 책이 마치 그래픽 세트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손을 뻗어 표지를 넘기자 속지가 드러났다. 풀이 굳은 흔적, 피로 보이는 얼룩 등이 눈에 띄었다. 글자는 흐릿하게 남은 어느 대학교의 인장의 흔적뿐이다. 다시 한 페이지를 넘겼다. 제본한 곳이 쭈글쭈글하게 커다랗게 주름이 져 있어서 새 책처럼 부드럽게 넘기지는 못한다. 펄럭, 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마치 그 종이의 두께에 어울리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는 일부러 한 게 아니겠지만 아마도 내지의 두께는 실물을 본땄을 것이다. 더 얇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물의 두께도 생각을 해야 하니 말이다. 예전에 이런 느낌으로 책을 넘기려면 책이 아주 무거웠어야 했다. 올컬러로 되어 한 장 한 장이 두껍고 무거운 그런 책이어야 했다. 이제는 오히려 가볍디 가벼운 플라스틱 덩어리가 펼쳐보면 수많은 낱장으로 나누어지는 그런 모양새다. 여전히 원본과 똑같은 얼룩이 앞뒤로 나 있고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맞은 듯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거쳐온 원본을, 모든 페이지를 3D로 스캔해서 복제한 물건이라는 걸 아는 상태로 본 그 책은 약간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얼룩이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있는 것을 본 느낌이라고 할까. 새책처럼 복제했어도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물론, 스캔을 해서 복제를 한 거라면, 종이가 변하면서 생긴 누런 색과 처음부터 채색이 노랗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수작업이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책처럼 십여 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었을지 모른다.
책의 1/3 지점에 엄지를 대고 넘겨 보았다. 마치 건물이 넘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쓰러질 듯하다 확 넘어갔다. 역시 책을 구길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두꺼운 영영사전을 펼 때 나던 소리다. 그러니까, 이 책은 각 페이지도 고증을 따랐지만 책이라는 물건의 물리적인 성질도 상당 부분 실제를 따른 셈이다. 게다가 오래된 물건처럼 보이게 인쇄한 것뿐만 아니라 가장자리가 닳은 모양마저 똑같이 흉내 냈기에 손가락에 닿는 느낌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인쇄술 덕분이었다. 백지를 만들고 그 위에 찍어내는 방식에서, 글자를 포함한 모든 무늬를 가진 페이지를 만들어 굳히는 방식의, 그야말로 인쇄와는 다른 새로운 기술이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니 오래되어 생긴 얼룩과 글자 사이의 괴리감도 필요가 없었고, 모든 종이의 얼룩이 똑같을 필요도 없었다. 인쇄가 되지 않는 귀퉁이를 인쇄 후 잘라낼 필요도 없었고, 실제 페이지 모양에 따라 귀퉁이를 갈아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원본대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이 책은 그 방식을 처음 상용화한 만글출판사의 신사옥 준공 현장에서 구입했다. 준공식에서 이 인쇄술의 상징이 되는 물건이 공개될 것이라 하여 직지를 비롯해서 몇 권의 복제본이 나올 거라는 건 진작에 알려졌고, 일부는 복제본일 뿐이라 관심이 없어하긴 했지만 또 복제본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서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우연히 근처에 볼일이 있어 지나다 복제본 200권은 현장에서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십여 만원인데도 불구하고 충동구매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읽을 수 있는, 훈민정음해례본도 구입하고 싶었지만 경쟁률이 높아 일단 중세 성경 쪽에 줄을 섰다. 가격도 줄을 서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사람들이 만져볼 수 있도록 아름답게 채색된 페이지를 펼쳐 놓은 모습을 보고서는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며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싸악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양피지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 손바닥 아래를 지나갔다. 원본도 느낌은 비슷하겠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지 못하는 글자를 뒤로 하고 화려한 가장자리 장식과 금빛 머릿들자들을 보며 넘겼다. 펄럭 거리는 책장에 빠져들었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감상하고 있다.
"흠"
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 책이 원본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이 책을 꺼내기만 하면 긴장을 하게 된다.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책을 가슴 바로 앞으로 당겼다. 조금 자세히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잉크로 쓴 듯, 종이와 글자는, 종이와 그림은 일체가 되어 있다. 그런 모습마저도 복제한 것이리라. 그런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어서 약속 시간을 체크하느라 계속해서 시계를 쳐다보지 않으면 순식간에 삼사십 분이 흘러버리곤 하던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리라 생각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양보할 수 없이 요시야 왕이 성전터에서 책을 발견하는 부분이었다. 간단하게 성벽을 세우고 성문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을 하다가 깔려 있는 부분에서 책을 찾았다고 했는데, 그 책이 마치 이 책인듯한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상식적으로도 그 당시에 라틴어가 있었을 리도 없었고 더욱이 그 시대 이후에 기록된 부분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책이 발견되었을 때의 기쁨이 이 책을 구입했을 때의 기쁨보다야 훨씬 더 컸을 텐데도 이 책이 그 책과 내용과 모양 말고는 다를 것이 없고 그 책이 이 책이며 그 기쁨이 그 기쁨과 많거나 적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책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나 또한 알고 있었지만 행방이 묘연했던 것을 마침내 찾아낸 것이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말았다.
"으흠, 으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우유를 마시고 와서 책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복제본일 뿐만 아니라 플라스틱이어서 우유나 물을 흘려도 닦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본을 위해 묶은 부분까지 우유가 새어 들어가면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물에 통째로 담가서 흔들지 않는 한 모세관 현상으로 빨려 들어간 그 부분만은 부분적으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책 전체가 썩어 들어가는 과정에 위치한 종이책과의 접점이 생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