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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5. 2024

쓸모없는 순간

나는 나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한편으로 나의 글에 대한 확신이 없음에서 오는 우울 또한 글을 통해 위로를 받으니 마치 아픈 강아지 때문에 속상한데 눈치 없는 그 강아지가 그것도 모르고 주인의 기분을 풀어주겠다며 손목을 비집고 들어와 아양을 떨면서 눈을 마주치는 것을 보는 느낌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쓸모없는 발명품들이 많다. 실패한 발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을 보면 역시 모든 새로운 아이디어는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한 발명품들은 너무나 타깃이 명확해서 그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라는 관점에서만 보게 되는데 실패한 발명품들은 결과가 너무 처참하거나 부작용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경우가 많아서 대체 어떤 문제이길래 저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한 거냐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정작 알고 보면 시작은 단지 작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경우가 많다.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쓸모없는 것이라도 사람이 노력을 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면 만들어 낸 의도가 담기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용도에 맞고 이러저러한 상황이나 물리 법칙이 아니었다면 잘 사용했을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발명을 조금 더 완벽하게 해냈더라면 모든 것이 잘 풀렸을 것이라고 남 얘기라서 편하게 하는 것이 가장 속 시원한 결론이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의 장점은 실패한 발명품뿐만 아니라 사용하기 불편한 면이 없지 않은 수많은 제품들과 실패한 것도 아니고 양산해서 판매도 하고 있지만 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는 그런 제품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누군가가 의도가 있어서 창조해 낸 것이고 제품 역시 수요가 있으니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수요라는 것이 허위광고나 과대광고를 통해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엄연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그들의 니즈를 채워줄 제품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니 딱히 문제 될 것도 없다.
게다가 그런 니즈가 단순히 누구는 필요로 하고 누구에게는 필요 없는, 이분법적인 구조를 가지지도 않는다. 모나미 153 볼펜은 잉크가 자주 뭉쳐서 나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수첩 여기저기에 점이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작성한 서류의 초본에 이리저리 고칠 것들을 표시하고 버릴 때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용하기 편하고 가볍고 무엇보다 회사에 쌓여 있어서 잉크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똑같은 것을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샤오미 볼펜을 몇 상자 사다 놓고 쓰고 있지만 회사에서는 사다 놓는 대로만 사용해야 하니 획이 흐리고 갈라지기도 하고 잉크도 뭉치지만 그냥 사용하는 것이다. 153 볼펜은 아마 집에 쌓여 있다고 해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수첩에 기록을 할 때는 굵은 글씨를 선호하고 책에 메모를 할 때는 여백에 최대한 많은 글자를 넣을 수 있어야 해서 0.28mm가 되는 가는 심을 사용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 153 볼펜은 해당되지 않는다.
내가 집에서 절대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153 볼펜은 아까 썼듯이 회사에서는 잘 사용하는 제품이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말 그대로 개인적인 글을 쓸 때의 이야기이고 회사에서 사용하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용도가 아닐 때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회사에서 기록을 남길 때는 플러스펜을 준다. 아마도 꾹꾹 눌러쓰면서 뒷장에 흔적이 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보안 차원도 있다고 들었지만 확실한 건 모르겠다.
내 글을 다시 읽다 보면 쓸모없는 글처럼 여겨지는 글들이 몇 편 있다. 마치 153 볼펜 같은 느낌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위로를 받을 수 있겠다 싶은 글이 있는가 하면 어떤 글은 그냥 내가 속풀이 하려고 적은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 아니라면 공개할 필요가 있을까? 쓰는 순간에 나에게만 도움이 되는 데 그치는 글이라면 일기도 아니고 굳이 공개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만 153 볼펜을 예로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쪽의 용도로는 쓸모없는 제품이고 심지어 실패한 발명품처럼 보일 정도이지만 다른 용도로는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제품이라는 건 없는 셈이다. 단지 '나에게', '지금' 쓸모없는 제품일 뿐이다. 쓸모없는 제품은 세상에 없다. 쓸모 있는 순간이 아닌 제품들이 있을 뿐. 그러니 내 글에 대해서도 위로를 하자면, 쓸모없는 글은 써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단지 쓸모 있는 순간이 아닌 글을 내가 써 놓은 것일 뿐. 언젠가 쓸모 있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지 모른다. 내가 직접 탄생에 기여한 내 글에 대해 너무 우울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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