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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5. 2024

글 쓰는 나로서의 나

내 안에는 수많은 내가 있다. 학생이었던 나, 출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힘겹게 중심을 잡고 있는 나, 길거리를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눈에 띄지 않게 걸어 다니는 나, 집에서는 아들이자 아빠이자 남편인 나. 이러한 역할들 틈바구니에서 균형을 잡고 한쪽에서의 충격이 다른 쪽으로 미치지 않게 하는 완충작용을 하는 것이 사회의 구성요소로서의 내가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사회의 구성 요소로서의 나의 삶은 하나의 부품으로써의 삶이고 '나의 생을 사는 나'로서의 나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균형추가 아주체적인 행동의지를 가진 별개의 존재여야 한다. 단순한 사회의 균형추, 가정에서의 균형추로는 나의 고유한 가치를 끌어낼 수 없다. 꽃이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거대하든 그 꽃이 없으면 다른 꽃이 대신하면 되는 역할일 뿐이듯이 말이다. 그 꽃이 진정한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눈에 띄거나 누군가의 무덤에 피었거나 하는, 지리적이든 단지 우연한 환경에 의해서든 다른 개체는 안된다는 그런 이유가 있어야 한다. 꽃끼리의 경쟁으로는 부족하고 가치 부여를 하는 주체에게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물리치고 나에게 가치 부여를 할 핑계를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삶에서 가치 부여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생각을 해 보자. 꽃이 다른 꽃의 가치 부여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뿌리가 있는 식물이라 돌아다니면서 그런 평가를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혹시나 화분에 담겨서 돌아다니면서 '평가질'을 한다고 생각해 보았을 때, 그 꽃이 다른 꽃을 보면서 다른 꽃들의 사정을 눈여겨보면서 가치를 부여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폄하하거나 모두 긍정적으로 보거나 하는 정도밖에는 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다른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가치에 대해 끼어들어 왈가왈부하싶어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 나의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가장 객관적으로 안다. 자신에 대해 "내 가치는 무제한이야"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니라, 충분한 고민을 하고 나서 자신에게 결론을 내리는 을 믿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간혹 이런 말을 하면 "그럼 내가 스스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면 자살해야겠네?"라거나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최고라는 결론만 나오면 어떻게 하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발 그러지 않길 바란다. 내 주위에서 식으로 "사이다"라느니 "한 방 먹였다느니" 하면서 비뚤어진 대화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을 전혀 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큰 행복이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다른 사람의 말에 시비를 걸어야만 자존감이 유지되는 사람은 상적인 대화를 할수록 점점 심해질 것이니 공익을 위해 그냥 아메바처럼 생각이라는 것을 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도 또한 평가이다. 평가라는 것은 평가 결과가 필요하기 때문에 시행하는 것이고 목적이 없는 평가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고는 딱히 없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고 그냥 지금 상태가 좋다면 왜 평가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텐데, 나라고 평가를 해도 결과를 쓸데가 없으면 왜 해야 하는지 물어보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늘 되돌아보고 어떤 결론이든 자신의 삶에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가 좋지 않아서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없다. 단지 항상 변화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감정이 아니라 생각으로 반영이 되어야 한다.

평가를 할 때는 평가의 목적만큼이나 평가의 기준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무슨 기준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 사회성? 그건 우리가 나아지고 싶은 부분이 어디인지에 따라 다르다. 국회의원이 지역구 사람들의 의견이 어떻든 다른 국회의원들 간의 사회성만 스스로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요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지역구 여론에는 귀를 닫고 각종 당직과 당론에만 힘을 쏟을 것이다. 자신의 재선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매일 바쁜 일정이 단지 상대 당에 대한 조롱과 당대표 지키기 같은 당리당략 수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것이 지금 정권에서 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저울질로 나온 행동이라면 내적인 결론을 가지고서는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도 이러한 준이 필요하다. 사회성 면에서 내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더라도 다른 기준으로는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히 나을 수 있다. 그런 면을 보지 않고 습관적으로 하나의 기준으로만 스스로를 바라보고 열등감을 느끼고 좌절한다면 삶은 나아지는 것,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진 김에 살게 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회식에서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니 당연히 술 마시고 다들 정신이 없는 데서 같이 어울리지 못하는 것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신이 멀쩡하니 대리기사를 부르고 술자리 정리를 하고 술집에서 술병 숫자를 속이는 것을 잡아내고 그런 일이 반복다 보면 회식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 물론 반드시 이런 반전이 있는 건 아니라서 스스로 다른 좋은 쪽을 보고 그쪽으로도 계속해서 되돌아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연극 배우는 연기로써 평가받는다.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무대에서의 연기로 어떠한 연기자인지 평가받는 것이다. 무대 밖의 문제로 연기를 평가받지는 않는다. 무대 밖의 문제로 인해 무대에 올라가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건 인간적인 문제 때문에, 떳떳하지 못해야 하는 사람이 남들 앞에 당당하게 서야 하는 그 직업에 적합한지를 평가받은 결과이지, '인간적으로 못되었으니 저 연기는 잘하는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평가를 꼬아서 내리는 것이 아니다. 가수가 학폭으로 인해 활동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그 이유에 구질구질하게 노래 실력이나 그런 이유를 붙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쓸 때는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순간에는 오롯이 글만 쓰는 사람으로 마치 빙의되듯이 변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나는 회사의 ㅇㅇ로써 글을 썼으니 이 글을 깎아내린다면 내 회사 생활의 경험을 비하하는 거야'라는 식의 연결을 지어서는 안 된다. 글을 쓸 때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의 존재감을 지키고, 그렇게 해서 글을 쓰고 나면 오직 그 글을 가지고 평가받아야 한다. 평가라고 해서 반드시 남들로부터 독후감을 받는다거나 지적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 평가는 자신이 글을 읽어 보아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 과거보다 조금 힘들게 써졌다 등등. 그래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내가, 과거의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에 비해 나아졌는지, 내가 보기에 나라는 사람의 글은 어떤지 평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글쓰기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글 자체로 평가할 수 없다. 내 글이 내 눈에도 부족해 보인다면 글 쓰는 나의 부족한 점을 찾으려 애쓸 일이지 주제를 탓하거나, 나의 다른 면에 책임을 물어서도 안 된다. 회사 생활에 대한 글을 썼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면 글 쓰는 나에게 같은 이야기도 더 짜임새 있게 쓸 수 있는 글솜씨를 키워야겠다는 평가를 해 주어야지, 글 쓰는 나와 회사 직원으로서의 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단순히 '회사 생활의 경험이 적어서 글이 안 나온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것은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좋은 수단이라고 하지만, 아마추어에 머무른다고 해서 나의 모든 면이 뒤섞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면으로 인해 평가가 실제보다 후하게 되거나 깎아내려져서는 안 된다. 그런 외적인 것들을 한둘씩 섞는 것은 그 평가를 받아들이는 자존감에도 실제 글쓰기를 계속해 나가는 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내리는 평가이니 나 역시 그것이 합리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또한 남의 글과 나의 글을 비교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비슷하다. 가장 좋은 건 글쓰기는 나와 내면의 내가 함께 하는 활동인 만큼 '나와 내면의 내가 함께' 과거에 쓴 글과 현재의 글을 비교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글쓰기가 다른 나에 대한 평가가 아무리 박하더라도 한줄기 버팀목이 되는, 유일하더라도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면으로 남을 수 있는 그런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웃음도, 좋은 일도, 앰프가 공기를 진동시키는 무대 옆에서 몸을 흔드는 것도 결국은 살아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기 위해 하는 일이다. 글쓰기도 잔잔하고 늘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그렇게 피부에 와닿게 주지는 못하지만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신호'는 줄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삶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점점 좋은 삶을 살아가고 주위에 좋은 글 쌓가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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