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상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p L Jun 15. 2024

글을 써야 살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이자 암시이자 결심

글을 써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믿음이자 암시이자 결심이다. 글을 씀으로써 조금 더 나은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선언이자 믿음이자 하나의 지지대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근거가 있는 믿음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글쓰기가 삶에 있어서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결국 계속해 나가게 하는 일종의 동기가 있어야 하고 그 동기를 유지할 만한 사고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그 가고 체계가 신념일 수도 있고 믿음일 수도 있으니 결국 하나의 순환논법이 완성되는 셈이다. 하지만 반드시 순환논법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 그것들이 시간이 가면서 하나씩 그다음의 효과를 가져오는 방식이기 때문에 내가 '글을 써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하면, 그 결론이 아무리 같은 사고 과정을 통해 나왔다고 하더라도 다음 주에 내가 내릴 '글을 써야 한다'는 결론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반박할 경험을 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간 일주일의 시간으로 인해 나의 결론은 미세하나마 조금 더 공고해졌다.
잠자리에 들 때의 만족스러운 느낌과, 평소 느끼는 스트레스의 정도가 글을 쓰기 전보다 훨씬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말 체감한 만큼 실제로 좋아진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좋아져 보았자 그 느낌 정도인 것일 뿐,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을 최소한의 정도만 바뀌었더라도 우리 자신은 인지하지 못한다.
운동을 할 때 혈관, 뇌의 혈관이나 눈의 실핏줄 등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을 많이 주어야 하는 동작을 할 때는 숨을 내쉬어야 한고 한다. 덤벨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는 운동을 한다면 덤벨을 어깨 위로 밀어 올리는 동작을 할 때 내쉬고 아래로 내려놓을 때 들이쉬어야 하는 것이다. 숨을 쉬지 않고 가두면 그렇지 않아도 운동으로 인해 혈압이 올라가는데 거기서 호흡의 중단으로 인한, 게다가 단순히 호흡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배에 힘이 들어감으로써 더 많은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에 탱크에 뭔가를 채울 때 공기가 빠질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압력을 해소할 방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페트병에서 콜라를 부을 때 왈칵왈칵하는 것이 공기가 들어가면서 콜라가 나올 수 있게 하려는 것인데, 콜라가 나올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많은 공기를 한 번에 밀어 넣으면 페트병이 부풀어 오를 것이고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면 콜라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숨을 참고 운동을 하는 것은 혈압이 가득 차 있는 혈관에 더 많은 압력을 밀어 넣는 것과 같아서 실핏줄이 터지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단지 힘이 들어갈 때 날숨을 쉬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상당히 완화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숨을 조절하면서 운동을 한다고 해서 압력이 운동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 역시 계속해서 쌓여가면 그 압력이 버티기 힘들어질 만큼 커지는데 글쓰기를 통해 그런 것을 조금씩 풀어준다면 실제로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그저 공기를 조금 빼 주는 것 같은 정도에 그치지만 점점 커지던 압력이 줄어드는 체감상 스트레스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글쓰기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뭔가를 만들어내는 취미 활동 전반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작은 노력으로 커다란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사례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반드시 그 활동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무엇이든 용도에집중하면 언제 가치가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써 나가기 위해 계속 써야 한다고 믿는다. 신념의 정도까지는 가지 않지만 믿음의 영역으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믿음의 영역이 되면 여러 모로 편한 점이 있다. 일단 스스로 글을 써야 한다고 스트레스를 주지 않아도 된다. 그냥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누군가 게으르다고 할까 봐 글을 쓰는 것은 계속해서 써야 하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계속해서 쓰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쓰는 것뿐이다.
지난주에 종로에 갔다가 보수단체의 집회 현장을 지날 일이 있었다. 집회가 끝나고 정리를 할 때였는데 햇빛을 피해 아주머니들이 건물 그늘에 촘촘히 앉아 있었다. 땡볕에 나란히 서 있는 파란 천막은 의자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 비워져 있었다. 무대장치를 설치했던 업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의자와 방송장비를 트럭에 싣고 있었다. 시청에서 교보문고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그 아주머니들의 틈바구니를 지나오는데 한 아주머니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설을 하는가 싶어서 왼쪽을 쳐다보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그저 옆 사람에게 강의하듯 큰 소리로 열심히 설명하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이었다. 아주머니가 매우 빠른 말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중에 내 귀에 들어와 꽂힌 이야기가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온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아? 이 땡볕에 여기까지 나왔다는 건 결국 다 나라를 위해서 그런 거야. 우리는 애국심이 있으니까 나온 거라고. 우리는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우리 같은 사람이 여기 나오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있겠지. 여기 우리들하고 우리와 같지만 나오지 못한 사람들, 그렇게 애국심으로 꽉 찬 사람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은 내일 망할 운명이었어도 1년은 더 갈 거야."
찬성이든 반대이든 듣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믿음의 힘이다. 한때 로마의 기독교인들도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그것이 세상을 예수의 재림과 그때에 몰려올 수많은 사람들의 종말을 지연시키고 한 명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기도가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덕분에 세상이 하루라도 더 유지되고 있다'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믿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글이 있어야 내 인생이 유지된다고 믿는다. 글이 있어서 조금 풍족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계치까지 치솟았던 스트레스 수치를 내 안에서 나오는 글을 풀어줌으로써 풍선에 바늘을 꽂듯이 확 낮추었다고 믿는다. 믿음의 효과나 믿음의 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해야 한다'의 벽을 넘어야 습관이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의 벽을 느끼지 않고 습관으로 만드는 지름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 쓰는 나로서의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