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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19. 2024

전자책을 믿지 않아서

매일 페소아의 책을 적어도 대여섯 페이지는 읽는다. 읽던 책이 있더라도 페소아의 글을 읽지 않고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그의 글은 꿈속 같은 느낌이 있다. 현실 안에 완전히 빠서 허우적대며 뭔가를 잃어버렸지만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깨달음만 있을 뿐, 잃어버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그런 상태에서 적어도 망망대해가 아닌, 가까운 곳에 헤엄쳐서 나갈 수 있다는, 내가 생각보다 그렇게 혼자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글들이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독자여서 그가 쓴 모든 것을 이해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단지, 시간을 관통하는 글이 하나 있으니 든든한 느낌 같은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의 글이라도 내 마음에 닿은 그런 책이 있다면 계속해서 읽어 나갔을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하루키의 소설 두 개, 성경, 그 정도뿐이다. 그나마 스토리가 이어지면 생활의 일부에 머무르면서 다른 책을 읽어도 상관없는 그런 상태가 되기 힘들어서 일기 형식으로 된 '불안의 서'가 좋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판본도 있지만 번역이 일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집에는 서로 다른 번역의 두 권 다 사다 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그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 그때는 하지만 다른 책도 읽으면서 내 삶의 밑바닥에 기초공사하듯, 또는 배에 평형수를 채우듯 읽던 때가 아니라 처음 읽을 때여서 끝까지 읽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에 서너 페이지만 읽는지라 책을 통째로 가지고 다니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글을 쓸 준비물과 메모를 하는 수첩 투자 정보가 담긴 수첩에 우산 등을 채우다 보면 조금씩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가방을 어깨에 메지 않고 손에 드는 것으로 바꾼 후에는 더욱더 무게에 민감해졌다.
얼마 전부터 '불안의 서'를 컴퓨터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 자체는 한 지 몇 주 되었지만 섣불리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다. 매일 읽는 만큼만 키보드로 치면 되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면 하기 싫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겁이 먼저 나는 탓이다. 시작을 하고 나면 하기 싫어도 계속해야 될 텐데, 문제는 일단 시작하고 끝을 향해 가게 되는 순간, 남은 양에 연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이제는 그 책을 다 읽으려고 읽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위로를 받기 위해 몇 페이지 훑듯이, 누군가 속삭이는 말을 듣듯이 읽어나갈 뿐인데 옮겨 적는다는 것은 끝이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엄연히 다른 성질의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럴 거면 전자책으로 구입을 해도 될 텐데, 굳이 옮겨 적으려고 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질문에는 당연히 단호하게 '그건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책은 구입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장기 대여'라는 말이 맞다. 대가를 지불하고 소유권 대신 접근권한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용어도 구입 대신 소장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소장도 틀렸다. 소장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건 엄밀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좋은 말로 표현하고 싶겠지만, '해당 아이디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만 해당 웹사이트에 소장'이라는 뜻이라고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는 결국 똑같은 이야기이다. 기계로 다운로드하여서 다른 곳에서 읽을 생각 없이 그 기계에서만 읽으려고 해도 한 번씩 계정확인을 하겠다고 해서 로그인이 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오프라인으로 파일만 받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직접 그 기계로 다운로드했어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은, 해당 웹사이트에 이상이 생기거나 서버에 이상이 생기거나 혹은 회사가 망한다면 내가 오프라인에 다운로드한 파일도 쓸모없어진다는 뜻이다. 한 권에 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구입하는 전자책이 그 모양이라니. 책값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말은 더더욱 필요 없다. 책값이 상대적으로 비싼 건 논란이 있지만 도서정가제 때문에 책정된 높은 가격에 구입량이 줄면서 다시 어려워지는, 요즘의 극장가 같은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져서가 아닌가? 그리고선 그것보다 저렴하니 괜찮다는 건 좀...
어쨌거나 옮겨 적는 일은 아무리 많이 해도 하루에 네 페이지를 넘지 않게 할 생각이다. 욕심은 부리면 안 된다. 그냥 평소에 읽는데 손가락만 더 움직이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글자를 치는 행위에 너무 의미를 두거나 집중을 하게 되면 평소에 글을 읽으면서 얻어가던 위로조차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전자책 파일이 만들어지면 그때부터는 휴대폰으로도, 전자책 단말기로도 브런치에서 내가 팔로우하는 분들의 글을 읽듯이 차례로 읽어 나갈 것이다. 아마도 전자책을 판매하면서 소비자의 권리를 최소한으로 묶으려 한 것도 사실 출판사와 저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역시 모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리라 생각한다. 저자도 아니고 출판사 관계자도 아닌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는 또다시 '비영리적이고 개인적인 사용 하에 허락'이라는 전제 붙이려 하겠지만 그건 뭐, 나에게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종이책의 복사에도 해당되는 얘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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