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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17. 2024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별들

피곤한 퇴근길이었다. 회사에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는 순간이 오기 전부터 왠지 오늘은 피곤한 월요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전까지는 괜찮았지만 점심시간에 어쩌다 보니 일에 매달리게 되면서 세 시쯤 되어서는 이미 퇴근시간을 넘긴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어쨌든 퇴근시간은 왔고, 온몸의 진이 빠질 만큼 뛰어다닌 건 아니라서 퇴근길은 피곤하면서도 가벼웠다.
강변북로를 달리는 동안 멀리 여의도가 보였다. 아름답게 햇빛에 반사되어 천연색으로 빛나는 은빛, 빨강, 파랑의 여의도는 지금의 모습을 십 년 전에만 보았더라도 미래도시 같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렇게 금융 중심지다운 모습으로 강 앞에 묵직하게 서 있는 빌딩들과 푸른 한강, 그리고 그 앞으로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니 문득 이 많은 자동차의 운전자들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직장이 여의도인데 휴가를 낸 날이어서 도로에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테니 더더욱.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한때는 정시에 퇴근할 때도 어둑어둑해서 가로등과 건물의 불빛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는데, 푸른 하늘 아래에 서 있는 건물들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하다니 낮이 정말 길어졌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그 길어진 해 뒤에는 낮이 짧았을 때에는 보이던 수많은 별들이 여전히 있겠지. 우리 은하에는 천억 개가 넘는 별이 있다고 한다. 지금 강변북로에 있는 모든 차의, 모든 부품을 합치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의 관점을 지구에 가져다 대면 어떤 것도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불균형을 보게 된다.
빛나는 태양, 햇빛이 내려쬐는 도로, 자동차, 햇빛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한강과 여의도.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부정적인 을 통과해서 집에 도착했다. 이제는 퇴근이 아니라 휴식이다. 맥주 한 캔을 '탁'하고 따서 전용잔에 따른다. 바이엔슈테판 맥주를 구입할 때 세트로 들어 있던 500ml짜리 잔이다. 잔 모양이 길쭉해서 마치 부부젤라 같은 느낌인데 차가운 맥주를 따르면 그 긴 잔 전체에 맺히는 물방울이 보기만 해도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다. 맥주를 네 모금에 다 마셔 버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빈 잔을 바라본다.
퇴근하고 나서 피곤한 날도 있고 피곤하지 않은 날도 있다. 일 년에 250번 정도의 퇴근들이 모두 다르다. 퇴근이라면 모두 즐거울 것 같지만 피곤하게 퇴근하는 날은 왠지 회사에서 퇴근 후의 시간을 희생 느낌이다. 그렇지만 쌩쌩하게 퇴근하면 퇴근 후에 짧지만 또 하나의 휴가 같은,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오늘은 피곤하게 퇴근했지만 맥주를 마시고 살아났으니 새로운 날을 시작하겠다!
문득 퇴근길에 보았던 여의도와 나와 함께 달리던 자동차들, 반대편 선에 있던 자동차들 생각이 난다. 운전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니다. 몇몇은 생각이 난다. 난폭운전을 하면서 내가 차선에 들어서자 바로 뒤에 전투기들이 적기에 미사일을 겨누듯이 바짝 따라붙던 마티즈, 수시로 브레이크를 밟아서 뒤차들은 엉금엉금 가게 하면서 다른 차들은 마음껏 우리 차선을 넘나들게 해 주던 소나타. 그래도 제시간에 집에 도착했으니 앙심은 없다. 어차피 너무 심하지 않으면 블랙박스에서 영상을 가져오는 게 더 귀찮으니까. 아무튼 그 풍경 자체가 너무 인상 깊었다고나 할까. 뭔가 퇴근길이지만 퇴근길 같지 않고, 우리나라의 도로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왠지 현실 같지도 않았던 그런 순간이 그 중간에 있었다. 꿈같기도 하고 현실 같기도 하면서 풍경을 보면서 우주를 생각할 때 모든 것이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싸우고 있었던 것 같던 느낌과 정 반대인, 태양 때문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별들에서 지구를 본다면 파란 행성만 보겠지만 막상 그 모습만 생각하고 지구에 오면 수많은 자동차와 비행기와 우주 쓰레기에 정신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물론 꿈같기도 하고 현실 같다고 한 건 졸았다는 뜻은 아니다.
태양의 지름이 지구의 지름의 105배였다던가. 하지만 태양에는 생명이 없지. 그리고 태양이 가까운 덕에 생명들이 자라나지만 수많은 별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보이지 않는다. 별이 보이기 때문에 종교가 생기고 영생에 대한 꿈이 생겨났다는 가설을 들은 적이 있다. 저 너머 닿지 못하는 곳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생기지 않았을 사고가 있다는 것이다. 낮에는 태양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하지만 밤에는 수많은 별이 있다. 30년 전 문경새재에서 보았던, 쏟아질 것처럼 무섭던 은하수를 지 못한다. 그것은 낮에 보이지 않아도, 또한 서울의 밤에는 보이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별 하나하나 중 어딘가에 생명이 있을 것 같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은 내가 없더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뭔가 우주의 스케일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만 들뿐이다. 이 세상이 다 그렇다. 내가 도로에 나가지 않는다고 강변북로가 뻥뻥 뚫리는 건 아니다. 내가 오늘 본 차들, 그 모습 그대로 내일도 이어질 것이다. 퇴근하면서 느꼈던 상쾌함을 누군가는 또 느낄 것이다. 그렇다 오늘도 나와 똑같은 느낌을 받은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일까? 수많은 별들이 있는 것을 알지만 낮에는 볼 수 없듯이, 가벼운 퇴근길, 피곤한 퇴근길의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차 안에 있는 나로서는 각자 차 안에 있는 그들의 느낌을 알 수가 없다. 태양빛이 밝아서 다른 별을 볼 수 없듯이, 햇빛이 내려쬐는 도로에 있으면 내 차 안이 시원한 것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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