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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21. 2024

시간을 넘어선 기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무척 따뜻했다. 더운 느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쾌한 따뜻함이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습기도 많이 사라졌고, 아침저녁은 살짝 서늘했지만 낮은 따뜻했다. 학교 운동장에는 여기저기 잠자리들이 많이 날아다녔다. 하굣길에 실내화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 동안 한 녀석이 앉아 있는 잠자리에게 천천히 다가가 날개를 잡았다. 잠자리 다리에 손가락을 대었다 떼었다 하니 잠자리가 나름대로 내 손가락을 잡는 느낌이 제법 사나웠다. 운동장 중간쯤 오자 녀석은 잠자리를 놓아주었다. 아마도 국민학교 삼 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직 국민학교 졸업도 뒤로 까마득했지만 입학했을 때의 기억 역시 앞으로 까마득했다. 그때 내 꿈은 나이가 들면 산에 들어가 책만 읽는 것이었다. 생계를 어떻게 할지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사실 궁금해다 해도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막연하게나마 떠올린,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정약용 선생이 제자에게 남긴 글에 있는 것처럼 텃밭을 일구어서 먹고사는 모습과 비슷했다. 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집 주변을 걸으면서 책 읽은 내용을 다시 음미하고 다시 방에 들어가면 떠오르는 것들을 글로 쓰는 것까지. 하지만 글을 쓰는 건 결과적인 행동이고 핵심은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었다. 가끔 집 주변을 돌면서 책 내용을 곱씹어 보는 그 상황을 상상하면서 뒷짐을 지고 교실 복도나 운동장을 걸어 보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걷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고, 어린 나이라 금세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원래 하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리 깊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운동장이 끝나고 교문 밖으로 나와 신호등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원래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천을 복개하여 만든 도로라 자동차가 많지 않아서 눈치껏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을 때 건너곤 했지만 육 차선이나 되다 보니 금방 2차선밖에 되지 않는 도로가 대부분인 동네에서 차들이 이쪽으로 몰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처음 몇 달간 선생님들이 등하교 시간에 차를 막고 학생들이 길을 건너는 것을 지도했었고, 드디어 신호등이 생겼다. 단순히 새로 생긴 도로라는 생각에 질주하던 차들이 신호등을 보고 급브레이크를 밟는 일이 처음에는 가끔 있었 그래서 간간이 교통사고 소식이 들렸기에 어른들은 "신호가 바뀌더라도 반드시 양쪽으로 차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너야 한다."라고 했고, 그때부터 보행자 신호에 초록색이 들어오더라도 자동차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다. 가끔 일부러 자동차 반대쪽을 쳐다보면서 걷는 사람들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람들마다 자라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나처럼 자동차에 대해 교통사고가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별다른 방법이 없다.
신호가 바뀌고 건너편 빌라 위로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새하얗게 뭉쳐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눈부신 가운데는 태양이다. 도로변의 나무가 아직 커다랗지는 않기 때문에 그늘도 없다. 여름에는 걷기에 너무 더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때는 덥다고 해서 힘들게 느끼지는 않았다. 지금은 더워서 지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여름이 아니었던 그날은 무더위라기보다 서늘한 공기에 따뜻한 햇빛이 만나 균형 맞는 날씨였다. 그렇게 길을 건너면서 운동장에서부터 끊임없이 내리쬐던 햇빛을 가득 받으며 항상 학교 준비물인 물체주머니를 판매하던 문방구 두 개를 지났다. 학교 건너편에는 무지개문방구와 학교문방구가 있었는데 학교 문방구에서는 가끔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서 확성기로 쓸데없는 장난감을 대단한 것처럼 소개해서 팔곤 했 나도 모래시계라던지 팽이 같은 것을 가끔 사 와서 집에서 혼난 적이 있었다. 무지개문방구에는 나름 프라모델 장난감이 많아서 일주일에 오백 원 되는 돈을 한 달 정도 모으면 이천 원짜리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날은 그렇게 용돈을 모아 쓸데없는 장난감이나 프라모델을 구입하기 전이었다. 아직까지는 부모님을 졸라서 가지고 싶은 것을 성적이 좋거나 생일이거나 어린이날이거나 하면 선물로 받곤 했다.
발걸음이 무척 가벼. 하늘도, 구름도, 햇빛도, 공기의 온도와 습도도 모두 온 인류에게 축복이며 적당하게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 날이었다. 며칠 전 파란색 우주선 장난감을 친구 부모님에게서 선물로 받았는데 아직 어렸던 나는 도저히 조립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부품을 떼어내고 조립도 못하고 포기한 것을 아버지가 마침 그날 회사에 나가지 않으시는 날이라 내가 하교하기 전까지 조립해 두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었다. 하굣길에 신호등 앞에 서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우주선의 존재가 갑자기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가슴을 뿌듯하게 하면서 우주선의 푸른색만큼이나 끝없이 높은 하늘이 푸르렀고, 하늘이 푸른 만큼 구름의 흰색 역시 형광색이 섞인 하얀 페인트를 칠한 양 너무나 눈부셨다.
지금은 간간이 카페들과 문방구들과 식당들이 있는 원룸, 빌라 동네이지만 당시에는 새마을슈퍼 하나만 가운데 있던 단독주택가였다. 새마을슈퍼에서는 금메달 초콜릿을 자주 사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혹 월드콘이나 부라보콘 외에는 별로 먹지 않았지만 신호등 초콜릿을 사 먹은 기억은 난다. 그렇게 코너를 돌아서 옆에 딸린 조그마한 화단에 징그러운 맨드라미가 피어 있던 커다란 단독주택을 지나 새마을슈퍼를 살짝 들여다본 후 놀이터에 다다라서는 왼쪽으로 돌아서 모자처럼 하늘이 씌워진 단독주택 사이를 지나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오자 책상 위에 우주선이 눈에 띄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바로 가지고 놀았다. 조립하기에는 어려웠지만 별 기능은 없었다. 하지만 가지고 놀기에는 재미가 없지만 조립하기는 어렵다는 말은 곧 어릴 때는 주의 깊게 볼 수가 없는 기계적인 디테일을 살렸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콕핏처럼 우주선 위의 검은 유리창이 위로 열렸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날 점심을 먹고 책을 읽었지만 그 이후에 다시 친구를 만나러 나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교 때부터 완성된 우주선을 손에 쥐고 직접 만져볼 때까지의 기억만이 너무나 강렬하다. 아마도 기대의 힘이리라. 사후에 받을 상이나 천국 같은 그런 것에 대한 기대보다 어릴 때 장난감을, 조립을 못 해서 가지고 놀지 못했던 장난감을 새것처럼 조립된 상태로 받게 된다는 그 기대가 훨씬 다. 기대의 대가는 행복과 추억이다. 죽을 때의 기대는 어떻게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 어릴 때의 기대는 지금에 와서도 행복을 주는 추억이 되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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