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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22. 2024

의식, 꿈, 죽음

고등학교 때였다. 어느 6월 햇빛이 쨍쨍하게 내려쬐던 날 오전에 전교생 조회가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운동장 조회를 당연한 듯이 했다. 햇빛 때문에 피부뿐 아니라 짧게 깎은 머리도 따끔따끔한 느낌이었다. 그날은 교장의 이야기가 매우 길었다. 끝날 때가 다 되어서인지 중간인지 모를 시간에 햇빛빛인지 운동장의 흙인지 노란색이 온 시야를 가리면서 내 속이 조금씩 울렁거리더니 마침내 시야의 가장자리가 저릿저릿하다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은 깨어나고서야 알았다. 깨어났을 때의 느낌은, 마치 내가 꺼졌다 켜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뇌는 몸의 체온을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겠지만, 의식은 잠에서 깬 것도 아닌 그저 암흑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꺼졌다 켜진 그 가운데 기억나는 한 가지는 내가 기차를 타고 가는, 꿈 비슷한 무언가였다. 분명히 기차에서 창문 밖으로(유리가 없었다.) 내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 살 때 집에 있던 장난감 트럭, 당시 내 손에조차 그렇게 크지 않다고 느껴졌던 노란 트럭의 바퀴를 부러뜨렸던 일, 10살 때 물놀이를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던 일 등 중간중간에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필름의 형태로 기차 안에서 밖을 향해 날아가면서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죽기 전에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 기억들이 그건가 싶기도 한데, 사실 깨어나기 직전의 기억인지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의 기억인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 이후로 가끔 의식과 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식의 영역일 테니 깊게 생각한다고 나름의 결론이 나오기는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다 보니 꿈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기도 하고 의식과 죽음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의 경험을 토대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가 있으면 책이라도 읽어보려 했지만 그런 책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의도로 쓴 것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잠을 잘 때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그 환경 속에서의 나의 의지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만 배경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배경에 자신만의 의지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건 내 눈에 비친 것이 그런 것일 뿐, 실제로는 자아가 둘로 갈라져 하나가 배경이고 하나가 나일지도 모른다. 의식을 잃었을 때의 과거를 보는 기차 안의 나를 보면, 기차에 타고 있는 나도 나지만 내게 기억을 보여주는 기차 역시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나이다. 그러니 꿈에서는 안과 밖이 모두 나인 셈인데 의지가 어느 쪽에 있든지 상관이 있을까?
꿈이 그렇게 나로 이루어진 세계와 나로 이루어진 다른 한 편의 세계라면 꿈은 결국 의식의 세계가 맞다. 의식과 무의식이 만난다고는 하지만, 결국 의식이 있어야 꿈을 기억을 하는 것이니까. 무의식 속에서 내가 아무리 뛰어다닌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의식 속에서 무의식에 미치는 영향, 의식 속에서 무의식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중요하지 무의식 그 자체로는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다. 죽음과 잠이 많은 유사성으로 비슷하게 여겨지지만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대처가 없거나 늦다는 것 외에 별로 공통점이 없다. 잠을 자는 사람이 무생물로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기절했을 때처럼 꺼졌다 켜졌다는 느낌이나 기억이 중간에 사라진 느낌은 사실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잠과 죽음이 아니라 '의식 없음'과 죽음을 비교해야 하는 건가 싶다. 이것은 차라리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이미 의식이 완전히 없고 생체 유지 활동만 하는 것을 '식물인간'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던가. 정신을 잃은 것, 의식이 없는 것을 잠에 빠진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일부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몸 밖으로 너무 멀리 나가 몸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의식이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틀린 이야기이다. 의식이 없다가 고착되어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잠을 자다가 그럴 수는 없다. 잠을 자면서 동작하는 의식의 세계는 틀림없이 뇌에서 어느 정도 관여를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활동은 뇌가 필요 없는, 의식 없음의 영역이어야 한다.
의식 없음의 상태는 전신마취의 상태와 비슷한 것일까? 그 지점이 가장 모호해 보인다. 그렇지만 잠과 의식 없음은 엄연히 다르고, 따라서 잠과 죽음도 매우 다르다. 의식 없음에서 죽음으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잠에서 죽음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꿈을 꾸다가 가끔 음식을 먹는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나면 항상 아팠다. 독감에 걸렸을 때도,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항상 그랬다. 몸이 아파서 저승에 가깝다는 의미로 꿈속에서 음식을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스 신화에는 저승에서 음식을 권해서 먹는 바람에 저승에 매인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몇 번 아프고 나니 그 이야기와 내가 꿈속에서 음식을 먹은 것과 연결을 하곤 했는데, 결국생각해 보니 꿈속에서 음식을 먹어서 아프다면 저승의 음식을 먹고 저승에 매이는 것과 유사하게 꿈에서 음식을 먹으면 저승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질병의 상태'로 가는 것일까 싶었다. 그렇다면 잠과 죽음은 다르지만 꿈속과 저승은 비슷한 곳인 걸까.
꿈이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의식 없음의 상태, 죽음에 가까운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 세 가지의 관계를 알 수 없으면서도 과연 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다가 또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억하는 잠들기 전의 상황이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었을 때뿐이라면 나는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할 것인데 그러면 잠들 때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죽음에 가까이 간 것처럼 느끼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닐 테니 그러면 과연 우리는 그것들 사이를 구분이라도 할 수 있는 걸까 싶다.
생의 시간을 걸어가는 동안, 언제나 끝은 다가오게 마련이고, 그 끝이 실제로 어떨지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눈앞을 보듯이 생생하게 그 끝을 상상하고자 한다. 그 상상이 우리를 이끄는 곳이 실제와 얼마나 비슷하냐를 가지고 종교들이 경쟁을 하지만, 그런 경쟁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실제로는 아무도 그 무엇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의 끝은 가 보아야만 알 수 있지만, 허무하게도 의식을 잃었을 때처럼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혹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정도로 황홀할지도 모른다. 아니, 황홀하다는 것은 뇌의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아마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의식적인 차원에서 느끼는 감정 따위는 육체에 기대는 임시방편에 불과할 정도로 약하게 느껴지는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돌멩이 두 개를 놓고 무게를 재는 대신 어느 쪽이 무거운지 토론을 벌이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이며 무의미하다. 끝을 향해 가는 길이 외줄 타기라면 떨어지지 않게 눈앞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끝을 고민하느라 한 번일지 모를 생을 버리는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된다. 죽음 후를 알게 되는 일보다 당장 교통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 먼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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