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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23. 2024

글 써지는 기계

꿈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소설을 보면 소설 쓰는 기계가 나온다. 알파벳을 랜덤으로 입력할 수 있는 기계로 소설이 나오는지 보는 기계던가 그랬던 것 같다. 사실은 알파벳을 랜덤으로 골라서 입력하면 우연히 단어 하나가 생기더라도 기적같이 느껴질 텐데 소설이 써진다니 가능한 아이디어일까 싶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니 알파벳이 아니라 단어나 문장들이었다면, 주사위를 던져서 작곡도 하는 마당에 수정을 할 수 있다면 가능은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내는 카드 조합으로 글쓰기를 도와준다는 Synapsis라는 제품이 이미 아마존에 나와 있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 만든 조합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조합해서 글을 시작할 수 있는 '태초의 단 한 문장'을 만들어 거기서 글을 시작해 보라는 취지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소설 쓰는 기계를 생각하니 옛날에 내가 생각하던 것이 떠올라서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물건은 구입하기 전에 기대치가 점점 올라가는 법이다. 충동구매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렇게 점점 올라간 기대치로 제품을 구매하면 어느 정도는 실망하는 지점이 생기게 되어 있다. 충동구매는 제대로 된 기대치조차 없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이지만 기대치가 점점 올라가는 것도 기대치의 근거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충동구매와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떠올린 생각은 타자기에 대한 것이었다. 반드시 타자기는 아니고 자판이었는데, 왠지 글을 잘 쓸 수 있게 해주는, 나에게 찰떡궁합인 자판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글이 잘 써지는 자판이라. 누구는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쓴다고 하고, 누군가는 원고지에 볼펜으로 글을 쓴다고도 했다. 누구는 오래된 타자기로 글을 쓴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맥북만 있으면 된다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종이에 쓰기보다는 컴퓨터를 사용할 것이고 웬만하면 노트북으로 윈도에 로그인하여 워드나 한글 프로그램이나 웹 편집기를 사용할 것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 생각을 발전시키고, 다시 그 생각이 문장을 만들어 가고 다시 그 문장이 기다려서 생각이 자라나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손글씨 외에도 글이 생각의 속도만 맞춰줄 수 있다면 내가 쓰고 싶은 만큼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속도를 맞출 뿐만 아니라 생각을 더 도와줄 수 있는 요소가 있지 않은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때 타자기를 구입해 볼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타자기는 7살 때 직접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아는 분이 회사에서 사용하는 것을 출장 때문에 잠시 집에 가지고 왔던 것이어서 만져보지는 못하고 연습하는 것만 보았는데 그 '철컥 철컥'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각인이 된 듯하다. 단순히 글이 써지는 것뿐만이 아니고 손으로 글씨를 쓸 때 손가락에 전해지던 종이의 질감과 '서걱서걱'하는 소리 같은 것을 대체할 요소가 있으면 글이 더 잘 써지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기대감 때문에 구입을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지금도 효과가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지만 컴퓨터로 글을 옮기는 과정이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만약 어떤 기계가 있고, 다른 기계로는 글이 써지지 않다가 그 기계 앞에만 나오면 글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쏟아져 나온다면 그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 기계가 있으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 보기는 했지만, 단편적이었을 뿐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구체적으로 그런 기계가 있면 어떨를 잠자리에서 심도 있게 한 번 고민해 보았는데 결론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글쓰기는 나름 힘든 부분이 있다. 내 생각을 적는 것이지만 내가 모든 분야, 모든 것에 대해 생각과 감정과 입장이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정리해야 하는 부분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 고민 없이 써 나가야 글이 거침없이 써지는 것이다. 그런데 글이 미친 듯이 써진다는 것은 그러한 고민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는데, 고민이 없어지는 것이 곧 글이 빠르게 터져 나온다는 뜻이라면 과연 나에게 좋은 것인가 하는 데에서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항상 A와 B 중에서 어느 쪽이 좋은지 매번 갈등을 하고 다른 결정을 내린다고 하자. 타자기를 사용해서 글을 쓸 때는 내가 고민 없이 A를 고른다면, 혹은 나름 랜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고르게 고른다면, 나는 원래의 내가 하던 고민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고민을 하지 않게 되어 편해졌다는 측면으로만 바라보면 안 된다. 타자기를 사용할 때만 유독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내가 고민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타자기가 내 고민을 가져가 준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의 일부를 타자기에 맡기고 글을 쓰면 그 글이 과연 내 글일까? 타자기로 쓸 때만 글이 다른 경우와 달리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는 건 어딘가 굳건히 서 있는 기준이 있고 그 타자기를 사용해야만 그 기준에 의거한 문장을 받아 적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내 것이 아닌 타자기의 것이다. 고민이 없는 글은 쓸 수 없다. 사실, 고민을 하지 않을 거라면 글을 쓸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쓰는 글이라니.
타자기를 예로 들었지만 애초에 그런 기능이 있는 장비가 있을 리가 없다. 타자기도 마찬가지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토론 주제가 아니고서야 고민은 도구가 바뀐다고 하게 될 수도 있고 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꿈꾸며 기대치를 올리면 안 된다. 글은 내가 쓰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도구를 사용하든 글쓰기의 어려움은 같은 곳에서 항상 터져 나올 것이다.
고백하자면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어서도 아니고 쉬운 길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비슷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지만 사실, 타자기를 한 대 장만하고 싶어서 기대치를 미친 듯이 올린 결과였던 것 같다. 아마 글을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옮기고 저장하고 관리하는 과정 쉬웠다면, 그리고 수첩에 글을 쓰면서 다시 읽거나 찾기 힘들었던 경험이 없었다면 단지 제본을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미 한 대 구입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를 속이려 들고 우리도 스스로에게 속은 척을 못하는 편이 아니다. 내가 정말 글이 잘 써지는 기계가 있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내가 일곱 살 때 같은 유치원 아이들 사이에 글씨 빨리 써지는 연필이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 자기 연필은 미국에서 사 온 거라서 한글 숙제를 빨리 끝낼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친구가 빌려가더니 다음날 가지고 와서 정말 글씨가 빨리 써졌다고 자랑을 한다. 그리고 처음 자랑했던 아이는 빵을 하나 더 받거나 하면서 그 연필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내가 한글 숙제가 귀찮아서 빌려달라고 하니 대답이 "너는 원래 글씨 천천히 쓰잖아."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 잊고 있다가 대학생 때 다시 생각이 났을 때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원래 글씨를 천천히 쓰니까 빌려주면 글씨 쓰는 속도가 변한 것을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애는 거짓말이었기에 안된다고 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저 부럽다는 생각만 했을 뿐. 유명 작가가 타자기를 하나 가지고 나와서 "이것이 제가 지난 수십 년 간 글을 쓸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구입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외로 많을까? "기를 흡수하겠다"는 핑계로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타자기와 연필과 타자기. 이야기들이 돌고 돌았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도구는 도구다. 그리고 고민은 나만의 것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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