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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23. 2024

규칙적인 생활

6월 21일

생활이 규칙적이 되면 가장 좋은 점이 지금 무엇을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매 순간 "이제 뭐 하지?",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 하는 고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회사에서는 한 시간 반에 달하는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모여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 잠을 자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보아도 그중 어떤 것도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굳어졌으면 재미있게, 혹은 개운하게 리프레시하는 데 시간을 사용한 것뿐이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게 시간을 버리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뭘 할지 모르겠으면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산성을 따지는 게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본인의 선택이라면 잠을 자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십 분 동안 식사를 한다. 그리고 사십 분 동안 운동과 샤워를 한다. 그러면 남는 삼십 분은 샤워를 하면서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한다. 고민이라고 해도 선택지는 단 두 가지이다. 문장을 읽느냐, 문장을 쓰느냐. 책은 아무거나 그때그때 다르지만 이미 출근하는 시점에서 어떤 책인지는 정해져 있다. 요즘은 페소아에 꽂혀서 그의 책을 전자책으로 시립도서관에서 대출해 놓은 상태이지만 때로는 지하철에서 읽던 소설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그냥 브런치나 인터넷일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쓴 브런치 글에서 오타를 집어낼 요량으로 다시 읽어볼 때도 있다. 문장을 쓰는 건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글감 노트를 펼쳐서 새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다듬어서 기록해 나가거나, 혹은 글감 노트에 있는 아이디어로 글을 쓰거나.
옆에서 보면 열심히 사는 모습이 대단해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렇지만 그건 열심히 사는 게 아니다. 단지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업이 아니라서 짬을 내야만 글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아등바등하는 것일 뿐이다. 휴대폰 게임이 재미있으면 틈만 나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선 책을 들여다보거나 글을 쓰는 일을 틈이 날 때마다 할 수는 없고 그나마 점심시간이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에 묵혀 두고 묵혀 두다 점심시간에 최대한 많이 꾹꾹 눌러서 소화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일주일은 5일이고 따라서 선택을 마음대로 하는 일은 오히려 매일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의 선택이 부담스럽지 않고 결과적으로 선택대로 하는 일도 어느 쪽이든 즐겁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꽤나 도움이 된다. 매일 책을 읽어도 되고 이틀은 책을 읽고 나머지 3일은 글을 써도 된다.
최근에는 이런 생활이 완전히 깨진 적이 있었다. 운동 후 샤워를 하고 나면 사무실로 원두커피 한 잔을 가지고 올라와서 책상에 앉아 결정한 대로 글감노트나 전자책을 꺼내는데 점심시간 내내 매달릴 일이 있어 운동도, 샤워도, 커피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짬 내서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고 밥만 얼른 먹고 올 정도였다. 그런 생활이 일주일 조금 넘게 이어지니 리듬이 깨져 버렸다. 글을 쓰는 리듬도, 책을 읽는 리듬도 없어졌다.
원래 당연한 것이었던 것이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진실이 밝혀질 때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던 것이 소중해지는 일도 없다. 글을 쓰면서 문장을 조금 더 잘 다듬고 싶다는 마음과, 원래 좋아하던 종류의 책들을 계속 읽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져 새로운 책을 고르고, 그렇게 골라서 읽은 책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 다시 새로운 의지로 글을 쓰게 되고, 그런 것이 없을 때는 저절로 떠오른 생각들을 글감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일종의 상부상조 같은 세 가지 작용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당연할 수가 없었지만, 막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고 나니 그 세 가지는 서로 상부상조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그 세 가지 모두 행복한 순간을 주는 원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깨가 말리는 느낌이 나서 퇴근 후에도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물리적인 작용이니 제쳐두고도 점심 때 하던 활동들이 의외로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오늘, 드디어 다시 점심시간을 되찾았다. 이게 마음대로 조절하는 데에 분명한 한계가 있어서 다음 주에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일이라 주말 동안 어떻게 할지 생각을 좀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럼에도 당장은 일상으로 돌아간 점심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식사를 십 분만에 끝내고 운동을 삼십 분을 한 후 샤워를 했다. 커피를 들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사십 분이 남았다. 그때부터 딱 십분 간, 1998년에 나온 엔야 베스트 앨범을 틀어 놓고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었다. 그렇게 그의 문장에 내 생각의 가장자리를 긁히는 즐거움을 느낀 후 나머지 삼십 분 동안 글을 써 내려갔다. 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활동들을 꾸역 구역 밀어 넣어서라도 기존의 점심시간에 하던 활동들을 골고루 느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글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압축되어 있던 욕망이지만 이 정도라는 것은 내가 하던 글쓰기와 독서가 생각 없이 되는 대로 한 일 아니라는 뜻이어서 만족스러웠다.
회사는 내 시간을 가져가는 것으로 계약이 되어 있다. 그 계약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은 최대한 일만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 계약이 영원히 돈을 벌지 못하게 만든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다고 바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창업을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계약에 충실하면서도 원하는 삶을 이어 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든 출근 전이든 퇴근 후이든 계약에 충실할 필요가 없는 시간은 나의 욕망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나에게 충실할 방법은, 그러니까 원하는 삶이라는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문장을 얻고, 문장을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문장의 사람에게는 당연한 활동이다. 세포의 사람에게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다른 생물의 세포가 축적한 영양을 흡수하고 그 영양을 소비하다가 결국 세포를 내놓고 죽는 것이 삶이듯이 문장의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문장이 담은 온전한 의미를 섭취하고 그 의미를 삶 속에서 소비하다가 내 문장을 내놓는 것이 삶인 것이다. 그러니 점심시간의 루틴을 빼앗긴 것이 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귀중한 기회가 된 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을 비유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새삼 질투심이 든다. 그 사람들은 실제 그 느낌을 미분해서 깨닫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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