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종로거리

기억과 추억

by 루펠 Rup L

봄이 되면 가만히 길을 걷기만 해도 많은 생각들이 뛰쳐나온다. 그저 봄기운에 기분이 좋다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과거에 있었던 좋은 일들, 혹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고 중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러이러한 변수가 생겼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들이 겨울날 똑같이 걸었다면 들지 않았을 시점에 갑자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다.
어느 날은 잠실에서 걷고 있는데 문득 종로 거리를 걸었던 때가 생각났다. 내가 걷고 있었던 것은 2024년 봄이었고, 갑자기 나타난 그 기억은 20년 전인 2004년도였다. 아직도 서울은 월드컵 응원의 열기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광장 문화라는 신조어를 언론에서는 어떻게든 연명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었고, 갑자기 거리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이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때 대학교 여름방학, 영어 학원을 다니기 위해 매일 종로를 왔다 갔다 하던 시기였다. 술집들이 많은 종로 2가 거리가 수업 중 점심을 먹으러 나오면 점심 식사가 가능한 몇 개의 식당을 제외하고는 아주 조용했다. 점심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학원 뒤쪽의 된장찌개 집을 가고는 했다. 어차피 매일 같은 것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메뉴를 통일해서 주문을 하고 다음 날은 다른 것을 다시 통일해서 먹는 식으로 메뉴들을 골고루 먹어 보았다. 때로는 한솥도시락을 주문해서 먹기도 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나면 커피를 마시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직 커피를 왜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커피라고는 시험 기간에 밤을 새우기 위해 '레쓰비' 한 캔을 밤 열한 시에 마시는 것 외에는 자판기 커피조차 마시지 않았던 나는 그 시간에 학원 밖을 돌아다니고는 했다. 비가 오는 날은 어쩔 수 없이 교실에 있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햇빛을 받으며 종로 거리를 걸었다.
그때 이미 청계천 고가가 철거가 되었던가. 모르겠다. 청계천까지는 가지 않고 종로와 청계천 사이의 길로 종각 근처까지만 갔다가 종로를 따라 돌아오는 코스만 간단하게 걸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멍하게 주변을 구경했었는데, 사람이 많이 다니도록 큼지막한 블록으로 되어 있는 거리가 대낮이라, 어둡지 않아서 사람이 없다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햇빛이 가득 아스팔트를 데우고 있었다. 건물들이 가득한데 건물의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고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찼는데 그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고, 그 한가운데로 내가 걷고 있다는 것은 마치 좀비물에 나오는 거리 같은 모습이었던 데다가 종로에 다다르면 갑자기 차로 가득하고 어디서 나오는 건지 사람들이 종각역에서 나와 계속 이쪽저쪽으로 바쁘게 걸어 다니는 모습과의 대조로 인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종로에서 길을 건너 인사동도 구경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두 거리의 대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것이 기억할 만한 것인지 어떤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거기에 내가 있어서 온몸으로 느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렇게 되돌아보면 그렇게 쌓아간 느낌들이 지금의 나에게 보이지 않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내가 생각해서 해낸 일들이 아니라 내가 알게 모르게 나에게 방사능처럼 저절로 와서 닿았던 상황들이 말이다.
점심시간의 거리는 그렇게 따뜻했지만 모든 수업이 끝난 후의 똑같은 거리는 조금 달랐다. 공기의 온도는 따뜻하기는 했지만 점심시간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그런 것보다는 피곤하고 나른한 따뜻함, 여행 중에 욕조에 몸을 뉘었을 때의 따뜻함이었다. 매연과 먼지도 더 많은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저녁이 되면서 퇴근해서 집으로 가는 사람들과 퇴근해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 퇴근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뒤섞여서 그 넓었던 거리가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버렸다. 점심시간에는 거리를 온몸으로 느꼈던 내가 저녁 시간에는 사람들만 피해 다니기에도 바빴다. 모든 것이 자극 투성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저녁에만 갔다면 당연했을 것들이 점심시간에 걸어보는 바람에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화려하게 깜빡거리는 네온사인도 생소했고, 노래방 입구마다, 술집 창문마다 달아 놓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특히 점심시간에 햇빛이 가득한 아스팔트와 대조적으로 그늘이었던 곳이었던 것이 아스팔트가 어두워졌는데 화려한 빛깔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고함을 치는 것 같았다. 특히 물이 흐르듯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시냇물에 박혀 있는 바위처럼 또 많은 사람들이 그 흐름을 무시하고 서너 명씩 모여서 서성거렸다. 거기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밤이 오지도 않았는데도 술 취해서 큰 소리로 혀꼬인 한국어를 외치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봄이었다. 겨울에는 그 모습들이 한가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목적지를 정하면 추워서 빨리 가려고 서두르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이기 때문이다. 봄이니까, 혹은 여름에도 그렇지만, 따뜻해서 거리에서 여유가 있는 것이었다.
술 마시고 소리치는 사람들 옆을 지나가면 귀에 큰 소리가 들리는 게 싫어서 인상을 쓰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곳을 거의 매일 지나다닌 것은, 종로 큰길로 걸어서 종로 3가 출구로 바로 들어가 버렸다면 그런 모습을 보지 않았을 텐데 굳이 그 가운뎃길로 종각역까지 걸어갔던 것은 그런 자극만 싫었을 뿐, 그 모습은 그 자체로 즐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쪽을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그 가운뎃길은 가 보게 된다.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도 종로 3가부터는 그쪽으로 돌아간다. 밤에 흥하는 곳은 여전히 낮에 여유가 넘친다. 밤마다 오는 사람들은 가게들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이겠지만, 낮에만 지나가는 사람은 어떤 가게가 어떻게 바뀌는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절반 이상이 불경기로 문을 닫더라도 낮에는 잘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추억을 다시 느끼기 좋은 곳이 되었다. 옛날부터 종로를 아는 사람은 이미 2004년에도 많이 바뀌었다고 하겠지만, 그 상태에서 처음 가 본 사람은 2024년에, 많이 바뀌지 않았다고 포근함을 느끼며 안도하고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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