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새내 나들이

잠실새내 알라딘 중고서점

by 루펠 Rup L

오늘은 볼일이 있어 점심 즈음에 잠실 쪽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볼일은 곧 끝났고, 모처럼 봄 같은 날씨여서 기분 좋게 걸어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늘은 새파랗고 드문드문 구름도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햇빛도 쨍해서 그림자와 햇빛의 대조가 눈이 부실 정도였고 기온도 따뜻해서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올해 들어 어느 때보다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 역시 반팔 티에 가방을 메고 있는 상태였고요.
잠실 새내 역에서 내려 구불구불해서 혼자서는 못 나올 것 같은 출구를 찾아 일행을 따라 걸었습니다. 마지막 출구는 출구를 만들어 달라는 민원을 견디다 못해 억지로 만든 것처럼 좁은 골목처럼 만든, 지하상가는커녕 가판대조차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지하도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날 좋은 거리를 지나 맥도널드 앞에서 약속한 나머지 일행을 만나 뒷골목으로 들어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하드핸드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나왔습니다. 저는 스타벅스에 쿠폰이 생겨 출발 직전 벤티 사이즈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바람에 커피를 더 마실 수 없을 것 같아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일은 한 시간 만에 끝났습니다. 그동안 간간이 글 쓰기 도구로 쓸 만한 기기들을 아이쇼핑 겸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쓸 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메라는 일본어로 글을 쓸 때 사용할 기능들을 개발을 많이 해서 가격이 나가는 것 같은데, 한글을 쓰는 저로서는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기능 때문에 그 가격을 지불해야 하게 되었지요. 엔저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40만 원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다음으로 워드스마트 사에서 나온 네오라는 제품이 있었는데, 이미 단종된 것 같은데 가격이 16만 원 정도로 저렴해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영어 말고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프리라이트 알파 모델이 비슷한 외모를 가졌는데, 영어 말고는 지원할 계획이 없다더니 그 모델의 사용층을 타깃으로 개발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동이든 전기든 종이에 글을 찍는 타자기는 글을 쓰고 나서 후속 작업이 너무 복잡해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양쪽으로 두 줄씩 난 코로나 모델은 모양이 탐나기는 한데 영문 타자기라 쓸 데가 없을 것 같고, 한글 타자기는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후기 디자인인 데다가 글을 다 쓰고 나면 다시 스캔해서 문자 인식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에 대고 터치를 길게 했더니 글자를 복사하긴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메일로 시험을 해 보았는데 스캔해서 처리한 것보다 손글씨는 확실히 성능이 좋았습니다. 타자기 글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글을 쓸 때마다 페이지 별로 그런 작업을 해야 한다면 그건 아무리 할 수 있어도 글 쓰는 일이 업이 되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아무튼 아닙니다.
볼일이 다 끝나고 다시 서울다운 거리를 걸었습니다. 서울다운 거리는 저에게 정확히 무엇을 보고 정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서울답다, 는 생각이 드는 그런 거리입니다. 이태원, 시청, 종로, 홍대 앞 같은 곳은 서울답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상하게도 교대, 가산디지털단지, 충정로역 근처 같은 곳은 서울답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정말 순수한 개인적인 느낌일 뿐, 정확한 기준은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오늘 잠실새내역 근처는 서울답다는 느낌이 풍부하게 들었습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어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마치 책 창고 같았습니다. 책이 빽빽하게 좁은 서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공간 자체는 좁지 않은데 책이 너무 많아서 서가와 서가 사이의 간격이 꽤나 좁았습니다. 두 명이 지나가기만 해야 할 정도의 폭이었으니까요. 그곳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책이 많은 곳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간혹 중고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알라딘의 경우 잠실에서 제가 받은 책만 두 권이 됩니다. 이 정도 되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이 들 만한 책의 밀도였습니다. 집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권이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기 때문에 2권을 모르고 먼저 사서 다 읽은 저로서는 그 책만 기다려질 법도 한데 그런 책판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호기심이 드는 대로 읽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벌써 책에 대한 책 한 권과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또다시 이 책 저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당연히 다 읽은 건 아니고, 이야기만 들어 본 책을 실제로 어떤지 하나씩 '확인'만 해 본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다 폴 오스터의 책들을 보았는데, 생각보다 그의 책은 수량이 적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공중곡예사'는 구매하려다 제가 사는 곳에는 없어서 새 책을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책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펼쳐 보았는데, 그 책은 소유자가 책 등 길들이기도 하지 않고 험하게 보거나 확 꺾었는지 겉표지를 펼치자 자동으로 펴지는 페이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전에 펴 보았던 책을 읽었듯이 펼쳤는데 말입니다. 어차피 문학 작품에 인쇄돼서 판매되는 내용이니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바로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염병한 개새끼!" 내가 소리쳤다. "재수 없는 사기꾼! 똥 같은 낯짝을 한 쓰레기야!"

였습니다. 그리고 눈에 바로 들어오게 된 것은 그 두 인용구에는 파란 사인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황당해서 사진도 찍어 두었습니다. 책의 중간으로 가면 그런 표시가 형광펜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은 매우 깨끗해서 읽어 보기나 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소설을 공부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도는 모르겠으나 그런 책을 왜 검수를 못하고 여기서 판매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분명히 헌책을 매입할 때 상태를 보기는 하던데 말입니다.
희한하게도 그 밑줄들을 보는 순간 음식을 먹다가 벌레를 보면 입맛이 떨어져 버리듯이 재미가 확 달아나서 그대로 들고 있던 책들만 다시 확인하고 결제한 후 나왔습니다.
폴 오스터의 책은 대학 시절 달의궁전을 읽고 나서 희한한 속도감에 이것저것 읽었는데 공중곡예사도 대표작이라고 해서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언제쯤 읽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당분간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오늘의 잠실 나들이는 여기까지였습니다. 해주 냉면이 근처라고 해서 가 보았지만 이미 돈을 벌어서 잠실운동장 쪽에 건물을 아예 새로 세운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맛을 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갔어도 시그니처라는 매운 냉면은 먹지 못하고 순한 맛으로 골랐을 것이기에 크게 아쉽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치를 찾다가 밀키트가 있는 것을 알았으니 조만간 사다가 해 먹어 보아야겠습니다.
다시 2호선 외선순환 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잠실 나들이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삼성역과 교대 역에서 의외로 내리고 타는 사람이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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