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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펠 Jun 30. 2024

글이 만들어지는 공간, 작업실

작업은 언제나 성스럽습니다. 누가 어떤 작업을 하든지 정성을 다하거나 거기에 들이는 시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작업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워지고 나 또한 무언가를 위해 기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 공포영화를 보면 범인이 피해자를 가지고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운다는 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기괴함을 연출하기 위해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많은 기록을 남긴 사람들을 기리는 것도, 무언가 대의라는 것을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민을 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해내려고 하는 자세가 생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헌책방에서 책을 한 권 샀습니다. 헌책방이든 교보문고든 영풍문고든 책을 사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기는 하지만 직접 책을 펼쳐서 손에 전해오는 감촉과 사람이 아주 없는, 혹은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아니면 적당히 어둡게 조절한 조명 아래에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만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분위기들 그런 것들이 합쳐지면 집에서 읽는 것과는 다른 면에서 생생한 책의 내용이 전해집니다. 모델이 입은 옷을 보고 구입한 옷과 같이, 그곳에서와 집에서 읽었을 때가 약간 차이가 있어 보이는 그런 읽기가 됩니다.
그렇게 사온 책은, 유명한 작가들의 서재를 방문해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방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엮은 '작가의 방'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생생하게 전하려고 한 만큼 그림보다는 사진이 낫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었고, 좋은 점은 원래 원서에서 주려고 한 듯한 친근한 느낌의 말투를 번역에서 아주 잘 살린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헤밍웨이가 글을 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아주 좋아합니다. 영화 '트럼보'에서 연출한, 줄거리를 고민하고 글을 쓰고 쪽지를 이어 붙이고 다시 이어서 쓰는 그 장면들도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작가들의 실제 작업 장소들에 대해서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뿐입니다. 가보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보기만 하면 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쓰던 테이블도 보고 싶기는 하지만, 사진으로 보면 그만입니다. 글에 집중하는 모습과 집중할 때의 순식간에 흐르는 시간까지도 그녀는 소설 '세월'에 충분히 실감 나게 묘사해 두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모습이 사진이 있었을 텐데도 그림으로 변환되어 있으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저도 글을 쓸 때는 단지 키보드와 모니터에 집중할 수 있고, 키보드의 오른편에 맥주든 커피든 놓여 있으면 그만입니다. 고개를 돌리면 되는 곳에 통유리가 있고 그곳에서 서울이든 바다든 내려다보이기만 하면 '호텔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집에서 글을 쓸 때는 뭔가 몇 편의 글을 이어서 써야겠다거나 할 때는 한강을 비추는 유튜브 라이브를 켜 놓고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쳐다봅니다. 스포티파이에서 '글 쓰기 좋은 음악 플레이리스트' 따위를 검색해서 틀어 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마치 책을 읽을 때처럼 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습니다. 간혹 고개를 들어 화면이나 창밖을 내다보기는 하지만 음악은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음악이 들리는 동안은 글을 짜내는 것입니다.  어느새 내가 음악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하게 되지만 그건 음악 때문에 글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 덕분에 내가 글에 집중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도 음악은 집중을 하게 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집중하고 나면 어느새 트랙이 몇 개나 지나서 혹시 내가 어느 곡은 좋다, 들어야겠다 하고 생각을 했어도 넘어가 버렸기 일쑤입니다.
저의 글 쓰는 환경은 이것이 끝입니다. 더 화려하고, 혹은 더 수수하지만 전용 공간이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때로는 글을 쓰다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상하기에 즐거운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이 글을 쓰던 공간도, 그들이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기에 소중합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제가 정말로 그런 공간을 만들어서 글을 쓸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곳을 생생하게 사진으로 볼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네요.
십 년 전에 비슷한 책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나오지 않지만, 인스퍼러빌리티(Inspirablility)라는 책인데, <최고의 크리에이터 40명이 말하는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오자마자 샀다고 생각했는데도 초판 2쇄인데, 디자이너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들 사진과 함께 인터뷰를 실은, 잡지 형태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서문에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인터뷰가 끝나면 일회용 카메라를 주고 스튜디오를 직접 찍어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작업공간을 찍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만 간신히 나오게 찍기도 했습니다. 다들 자신만의 스타일이겠지만 사진에 나온 대상의 범위가 인터뷰 내용과 생각보다 어울려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본성'이나 '본능적인 감각'에 민감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마음에 든다'는 추상적인 느낌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추상적인 것이 보다 더 직관적인 만큼, 우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 관심을 더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들의 작업 공간에서도 때로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목업이나 도면이 올라갈 자리이지만 아직 작업이 시작되지 않아서 비어 있는 듯한 책상을 보면 타자기나 노트북을 올려놓으면 글이 잘 써지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겠지요.
자기 입에 풀칠할 돈을 벌기 위해 뭔가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사람이든, 타고난 감각이 있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기만 해도 작품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의 감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셰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삽니다. 기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정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돈이라도 펑펑 씁니다. 저는 어떻게 기여해야 할까요? 나만의 글을 쓰고, 그 글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때가 되면 저는 어떤 서재에서 어떤 도구로 글을 쓰고 있을까요? 하지만 오늘은, '과연 그때가 올까요?'라는 질문은 하지 않으렵니다. 거기까지 가는 것은 운명이 할 일이고, 거기까지 헤엄을 치는 것까지가 제가 할 일이네요. 꽤나 자연스러우면서도 꽤나 낭만적인 장마의 시작입니다. 장마치고는 가벼운 빗소리 때문일까요?
빗소리를 타자 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폴 오스터가 자신의 손으로 쓴 원고를 보면서 타자를 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웹툰 작가가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 모두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을 하는 곳을 제가 상상으로 엿봅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작업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려할 수도, 초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겉으로 평가받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나오는 작품으로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공원의 벤치에서 십 년 동안 매일 3,000자씩 쳐서 나온 장편소설이 있다고 하면, 그 작품에게 있어서 그 공원은 성지와도 같은 곳이 될 것입니다. 작업실은 사람이 아니라, 작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작업으로 태어난 작품이 판단을 합니다. 내가 내 취향에 맞는 공간에서 쓴 글이 그 공간을 좋아하면 가장 좋겠지만, 아무래도 제 글은 제가 따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면서 틈나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을 더 선호하는 듯합니다.
제 앞에는 이제 세 권의 책이 놓여 있습니다. 서재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린 그림이 들어 있는 '작가의 방', 디자이너들의 작업실 사진이 들어 있는 'Inspirability', 마지막으로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작가가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서 글을 쓰기 위한 의지를 보인 손글씨를 모은 '연필로 쓴 작은 글씨'. 저는 글을 씁니다. 이 말을 하기에 부끄러울 때도 있고, '출판을 해서 돈을 내고 읽으라는 것도 아닌데 부끄러울 게 뭐 있어?'라며 자위할 때도 있지만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서재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업실도 저는 너무나도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 날은 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제가 쓰는 글이 어떤 글이 될 것이냐가 중요하겠지요. 서글픈 것은 그럼에도 제 글들은 그런 저 자신의 인간적인 고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다 타버린 글들의 재와 그 재 위에서 나는 향을 품은 새로 쓴 글. 그 사이에서 저는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의 파도를 거스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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