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상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펠 Jun 29. 2024

글의 죽음

좋지 않은 일이 요즘 이어지고 있어서 기분 나쁘게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알 수 없는 짜증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급기야 잠에서 깨어 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깨면 멍한 상태에서 잠이 완전히 달아나기 전에 다가오는 생각에 속수무책으로 잠기게 된다. 오늘 그 생각은 죽음이었다. 마치 구름처럼 지나가는 안개에 손을 대었을 때 묻어나는 미세한 물방울처럼, 누워 있던 내 위를 스치듯 흘러가고 있던 죽음에 대한 아이디어가 내가 일어나면서 의식이 담가지는 바람에 내게 죽음이 스며든 것 같은 느낌이다.
오해는 말라. 죽음이 스며든다는 것은 내 생명에 뭔가 시들해지는 현상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아이디어'로 인한 이성적인 무언가가 나에게 억지로 생각을 해 보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나의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이다.
나는 윤회는 믿지 않지만 어떻게든 모든 삶은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는 편이다. 농구공의 줄무늬처럼 어디에선가 동시에 생겨난 영혼들이 이 세상에서 각자의 궤적을 따라 움직여 결국 반대쪽으로 모이는 모델이든 윤회든, 겹쳐진 꿈들의 총합이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게, 영혼은 다른 영혼에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막연한 믿음이다. 그러다가 잠결에 그리고 잠이 완전히 들지도 깨지도 않은 덕분에, 문득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결과가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회설에 따른다면, 내 전생에 있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가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였을까, 단순히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였을까. 어느 쪽이든 마지막 순간에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론은 그런 상황을 다시 맞이하지 않아도 될 삶을 갖는 것이었을 것이다. 피하기 위해서든, 정면으로 마주치기 위해서든 죽음을 앞당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이 완전히 깨었을 때는 오히려 우울해졌다.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꿈을 박차고 나왔지만 현실에서 삶을 시작할 때는 서글픈 기분이 된 것이다. 나는 그 죽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니 그 정도만 해도 성공한 건가. 그 모든 것이 내 전생이라는 것이 어찌어찌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경우를 상정한 것뿐이고, 심지어 나는 전생을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그런 생이 전에 있었다면 너무 안타까워서, 위로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딱히 진지하게 믿지 않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약간은 있었을 것이다.
다시 어제와 그제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치솟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책을 읽다가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계속해서 머리 한 구석을 기웃거리는 것을 느꼈다. 약 올리려는 건 아니고, 뭔가를 나에게 말하려고 왔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치우고 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를 올려놓았다.
내 글들은 모두 죽었다.
머릿속을 기웃거리던 그 생각이 외친 것은 그것이었다.
내 글들은 모두 불에 타 죽어버렸고, 잿더미를 이어받은 것은 바로 나이다. 태워버린 것은 내가 아니지만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 글들은 뜨거운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고 마침내 그 잿더미를 영토로 받은 나는 그 글들이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 피닉스. 내 글은 하늘을 향해야 하지만 하늘을 향한 것은 단지 그 불꽃과 연기들 뿐이었다. 그 글들은 다시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있고 나는 그것들을 다시 날려 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그 글들이 죽어서 다시 태어났다.
그 글들을 써야 한다고 해도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기억들은 그 불길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 이루어진 삶뿐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타버린 것들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기억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그 영토 위에 서 있으니, 내가 글을 쓰면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이 마치 숯 위에 올려 두었던 바나나를 먹으면 바나나에서 숯 냄새가 나듯이 스며들지 않을까?
갑자기 소명을 느낀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소명. 지극히 개인적인 소명. 내가 발디디고 있는 곳에서 잿더미가 되어 있는 그 글들을 다시 써 내려가는 것. 들어 본 적도 없고 읽어 본 적도 없는,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것들을 향기라도 스며들게 하기 위해 계속 써 내려가는 것. 언젠가 내가 내 글에서 나밖에 쓸 수 없지만 나의 것이 아닌 그런 것을 알아보게 된다면, 저절로 그것들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게 내 소명이 맞기는 할까? 타버린 것은 내 글이 맞을까? 혹시 무한히 돌아오는 시간은 아닐까? 내가 일생동안 남긴 글들이 나의 죽음과 함께 타버리고 다른 생에서 그 재를 소중히 모아 담아 글들을 쓰고, 다시 나의 죽음과 함께 타버리지만 그 잿더미는 그 전의 잿더미와 정확하게 똑같은 성분과 똑같은 향기인 것이다. 나는 다른 삶에서 글줄기를 만들고 그 글줄기가 타버리고 나서 보면 내 인생과 경험은 아무 가치가 없어 결국 재에서도 남은 것은 원래의 그 잿더미에서 나온 것뿐인 허무한 상황.
알지 못해서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삶은 소중하다. 호기심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삶은 불행하다. 호기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서 하자고 하자. 나는 기웃거린다고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하지만 존재는 어렴풋하나마 확실한 그 문제를 따라가련다.
그 재의 향기는 장미 같다. 장미향을 풍기는 잿더미라니. 과연 잿더미가 되기 전의 글도 그랬을까. 태워야만 아름다운 것이어서, 단지 태우기 위해 모아들이는 유황처럼, 그래서 태워버린 것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틀렸다고 하지 말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