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박스

by 루펠 Rup L

나에게는 글을 쓰기 위한 랜덤박스가 있다. 꼭 랜덤박스라는 이름의 박스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랜덤박스도 아니고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박스가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랜덤도 아니고 박스도 아니다. 단지 글을 시작할 수 있는 힌트가 되는 문장들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랜덤으로 문장을 만들어주는 카드 세트도 아마존에서 하나 샀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그 세트를 사용해야 할 만큼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소설을 써야 한다면 그런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는 문장에까지 손을 댈 정도는 아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수준의 랜덤박스는 글감수첩이다. 옛날, 소설 연금술사의 리커버 기념 세트를 구입할 때 들어 있던 노트인데, 뭔가 생각이 나면 간단하게 0.5mm 볼펜을 사용해서 한두 줄짜리 메모를 한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웬만하면 구체적으로 적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두세 줄이 되더라도 말이다. 예전에 메모를 한다는 게 글을 한 편 써버리는 경우가 있어서 웬만하면 짧게 적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그건 핸드폰의 구글 메모장을 사용할 때의 이야기이고 손글씨로 메모를 하면서부터는 글을 어느 정도 이상 길게 쓰는 일은 없어졌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핸드폰으로 글을 쓸 때도 그게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같은 주제임에도 문장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문장에서 끝나지 않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와 글 한 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핵심적인 내용을 메모로 남겨야 하는데, 단순히 그 메모가 도입부가 되는 다른 글이 써진 것이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 고민이 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메모를 남겼는데 그것을 어떻게 글감으로 사용하는가.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메모가 핵심이냐 시작이냐.
메모가 핵심이 되면 메모로 남긴 그 문장이 핵심 문장이 되도록 글을 구성하고 써 나가야 한다. 이럴 경우 대략적인 이야기가 머릿속에 잡혀야 한다. 그 문장이 직접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고 중간쯤에 나올 수도 있으며 결론을 장식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어쨌든 글을 다 읽고 나서는 그 문장이 의도한 의미가 떠올라야 한다. 이런 글을 쓸 때도 생각보다는 꽤 있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글감을 고른 후 하루종일 생각을 하다가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한 뒤에 쓰는 글은 그렇다. 생각에 충분히 시간을 들이면 가능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글 전체의 짜임이라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즉석에서 해내기는 힘들다.
두 번째로 그 문장이 글의 시작이 되는 경우이다.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이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첫 번째 경우를 포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이라는 것은 음악 같아서 한 곡 안에서 멜로디가 어떻게 변하는지, 중간에 삐쭉삐쭉한 음이 튀어나오는지,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마디가 있는지 같은 세세한 것들이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영향을 미치듯이 어떤 문장이 어디에 나오는지가 단편에서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결정하는 경우도 충분히 많이 있다. 문장이 글의 시작이 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쓰기에 따라서는 그 문장이 결론을 미리 말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는 매번 글을 쓰면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대단한 글이 아니지만 그 글은 또한 내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다. 그 글에게만큼은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랜덤박스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수첩에 있는 문장들을 아무거나 고르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훑어보면 어느 순간 "저요!"하고 손을 드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문장이 항상 나온다. 아무래도 손은 여럿이 드는데 그중에 가장 끌리는 것 하나만 눈에 띄는 모양이다. 아니면 뇌 속에 나만의 조교가 따로 있어서 그 조교가 골라서 나에게 최종적으로 한 놈만 지목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글을 써야지, 해 놓고 노트를 보았는데 쓸 것이 하나도 없다거나, 몇 가지가 동시에 마음에 걸려서 그중에 어떤 걸 가지고 글을 써야 할지 갈등이 된다던가 하는 경우는 둘 다 전혀 없었다. 단 한 번도.
그 둘 중 하나를 의도적으로 고르라면 나는 문장을 골라서 글의 시작으로 삼는 것을 선호한다. 솔직히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 방식을 많이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의지와 내 취향이 일치하는 경우인 것이다. 왜냐하면 전문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주제를 받아 그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긴다는 뜻인데, 글은 언제나 시작이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내가 띠지에 대해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치자.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세상에는 띠지라는 아주 좋은 발명품이 있다."라고 해야 할까? 내 생각에는 띠지에 대해 정보를 전달하는 글을 쓸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띠지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띠지에 대한 말은 자연스럽게 등장해야 하고 독자에게 띠지에 대한 말을 할 것이라는 힌트는 제목에서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제목에서 띠지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은 후 전혀 상관없는 듯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점점 띠지를 향해 진행하는 것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시작하는 데 사용할 문장들이다. 이 연습이 충분하지 않으면 결국 매번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서 내가 혐오하는 "~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출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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