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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하게 쓰는 글

by 루펠 Rup L

글을 쓰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감각이 예민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주위에 대한 감각과 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저 문장들만큼 민감한 사람이라면, 저런 막연한 표현을 과연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하지만 정물화를 그리는 사람은 빛에 의해 나누어지는, 마치 무한한 그러데이션을 보는 듯할 것 같은 반면 추상화를 그리는 사람은 주위의 자극에 따라 다시 그 자극을 보는 방식이 실시간으로 변할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을 단지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한 마디로 표현해도 되는 걸까? 음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고 하는데, 모두 똑같은 방향으로 다른 것일까? 세상에 외부의 자극에 의하지 않고 바로 머릿속에서 나오는 음악은 없는 것일까? 글을 쓰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감각이 예민하다고 하지만, 요즘은 자기 계발서나 경제학 서적도 많이 나오는데 그런 책도 감각이 예민해야 잘 쓸 수 있는 것일까?
한 가지, 광고는 확실히 감각이 예민해서 다른 사람들을 감각적으로 흔들기 위해 만들어내는 문구가 많은 만큼, 팔릴 것 같은 책, 특히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을 만드는 것은 광고와 같은 감각이 필요한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감각이 글 쓰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 통상 이야기할 때의 그 정신적인 예민은 아니다.
때로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문장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다. 일상적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의미 없는 대화처럼 그저 입 밖으로 내기 위한 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감각이 예민해서 쓰는 글은 읽다 보면 피곤하다. 뭔가 자신의 감각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너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안개 같은 글이거나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은 글이거나 때로 동어 반복이 있기도 하다. 나는 내가 그런 예민함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무리 없이 섞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그런 것들을 먼저 혼자서 글로 풀어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 글은 읽다 보면 내가 쓴 것을 다시 읽어서 그런 건지 내 글의 특성이 그런 건지 몰라도 왠지 피곤하다. 내가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데도 너무 의미 없는 부분에 집착을 하거나 확실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인데 끝까지 밀어붙이려고 하거나, 때로 글의 시작에서 끝까지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한 것 같으면서도 반복한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런 글은 저장만 잘해 두거나 수첩에만 적어 놓으면 좋을 텐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만도 않다. 시간이 흐르며 그런 경향이 고쳐진다면 한때의 기록으로만 남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 글의 특성이 그런 것으로 남을 테니 어느 쪽이든 남겨 놓아서 나쁠 것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며칠 동안 비가 많이 올 거라는 기상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기 직전 같은 눅눅하고 더운 느낌만 지속되고 실제로는 비가 많이 오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 차 안은 에어컨 덕분에 쾌적하지만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어떤 차는 에어컨 바람이 싫어서 창문을 열고 달리고 어떤 차는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기름을 아끼려고 창문을 열고 다닌다. 나처럼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고 있는 차도 있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이런 습도에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데, 에어컨을 틀고 있지 않은 차의 운전자라면 조그마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만큼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고 다니는 사람들이 조금 더 여유롭게 운전을 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이런 습도에 그냥 다니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라고 하기보다는 짜증을 낼 가능성이 높은 쪽을 짜증이 나지 않는 쪽이 피해 가는 게 감정 소모도 적고 실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낮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글을 쓰면서도 상당히 이것저것 많이 재면서 쓰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소설류는 잘 쓰지 못하는 것인지도. 그렇지만 예술 작품을 생각해 보라. 때로 작품 자체로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 작품이 탄생할 당시 작가의 상황과 연결 짓거나 그즈음의 시대적인 경향과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교차해서 바라보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해가 가기 전에는 존재 이유가 없어 보이던 것이 이해가 가는 순간 그 자체로 존재할 만한 예술 작품이 된다.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서 동글동글한 모양이 되어 한 번 읽어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고 두리뭉실한 것 같은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너무 하려는 말이 직설적이어서 대체 정체성이 어떤지 헷갈리지만 그럼에도 그 모두가 내 안에서 충분한 시간을 굴러다니다가 나온 것이니 어쩌면 작품이라고 불러도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예민하게 글을 쓴다. 그 예민함을 통과해서 나온 글이 누군가 필요로 하는 글인지와는 다른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만이라도 다시 읽기에 좋은 글이니 그것만으로도 고민의 가치는 충분하다. 과연 누군가에게 읽힐 만한 글일지도 의문인 글이 사실 그 글을 쓴 사람조차 읽기 싫어하는 글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쓰지 않는 편이 나을 테니 말이다. 예민함도 선택적으로 발휘하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하나의 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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