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길은 맛있는 향을 만든다

by 루펠 Rup L

길을 걸으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경험에 가장 가깝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익히는 길은 말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일뿐, 사실 단순히 특이한 구경거리가 아니고서는 그 안에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이 들어 있는 일은 극히 드문 것이다. 상습적인 정체 구간에서 시간을 오래 보냈기 때문에 그 길에 정이 들었다는 미치광이는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 길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져서 반어법 내지는 남은 자들에 대한 위로 겸 놀림으로 그런 말을 하면 모르겠지만. 길은 필요한 구간을 빨리 지나쳐서 빠져나오는 것, 지나가는 것, 바퀴를 힘껏 굴려서 매 순간 뒤로 최대한의 거리를 보내 버리는 것이 목적이다. 인생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련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해 소모하는 시간과 장소라면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보다는 공항이 훨씬 삶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공항 역시 비행기를 탈 때까지는 우리가 몸을 이끌고 돌아다녀야 하는 하나의 장소로 마련된 곳이기 때문에 길과 다르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과 마찬가지로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을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인터넷으로 지도와 위성사진을 보고 또 위성사진에 장소와 길이 표시된 것을 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걸어보아야겠다'이다. 걷다 보면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두껍게 껴입은 탓에 오래 걸으면 여름이나 마찬가지로 땀범벅이 된다. 가을과 봄이 걷기에는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럴 때, 실제 몸을 이끌고 두 다리로 걸으면 그 길은 지도에 새겨진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 불과하던 것이 내 삶의 일부로 들어와 있게 된다.
그것은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바라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시내 주행이라 교통 상황이 좋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가르는 것은 내가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무느냐가 아니다. 눈앞에, 내가 걸음을 멈추면 영원히라도 그 자리에 있을 광경, 시간과 공간을 내가 온몸으로 느끼는 장면이냐 2차원의 지도에 있는 한 조각 그림이냐의 차이이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남이 운전하는 차여서 최대한 생생하게 느낀다고 해도, 심지어 생각에 잠겨 버스를 탄다고 해도 그저 눈앞을 지나가는 하나의 풍경일 뿐이어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뮤직 비디오가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눈이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창문 밖'의 무엇일 뿐이다.
헤밍웨이의 '내가 사랑한 파리'에 나오는 장소들이 모두 들어갈 만한 축척의 지도를 출력한 후 다시 똑같은 범위의 위성사진을 출력했다. 중요한 곳은 스트리트뷰도 출력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현장을 보고 싶은 것은 눈으로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생생하게 그 장소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건 출력을 해서 눈으로 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단순히 눈으로 사진을 보면 만족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수많은 여행 상품 중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서울에 대한 글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집돌이이다. 누군가를 만나 약속을 하기 위해 수시로 외출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에서 책을 읽고 메모를 하고 글을 쓰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누군가 만나야 하는 상황이 있어도 약속마저 무시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경제가 좋지 않을수록 대화에서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의 빈도가 점점 높아져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한몫하기는 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자주 가는 곳이 아주 좁은 폭으로 축소되어 있는 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편한 편의점'처럼 좁은 배경의 작품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겠지.
결론은 엉뚱하게도, 헤밍웨이의 파리를 느끼기 위해서 사진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파리에 가보아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외출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생활의 루틴을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먹는 그런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들르는 장소, 그리고 그 장소의 종업원이라고 하더라도 규칙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반드시 대화를 하기 위해 만나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유는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동네에 있는 카페라도 좋고 산책로로 사용하는 한두 블록에 불과한 거리라도 상관없다. 일단 집 밖에 규칙적으로 가는 곳을 주말에도 만들어 두는 게 좋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면 나에게도 그런 지도 같은 것으로는 되지 않는,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떠올리고 회상할 수 있는 장소들이 생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삶을 원한다면 자동차는 안 되고 도보는 된다. 자전거도 안 되고 킥보드도 안 된다. 길을 내가 방문하고 그 위를 걷는 배경이 아니라 지나가야 하는 대상이 되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순간 어차피 내려올 걸 왜 오르는지 모르겠다는 등산에 대한 푸념과 다를 것이 없는 외출이 된다. 생각해 보라.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갔는데, 그 목적지에 가는 이유가 돌아오는 거라면, 그건 쓸데없이 돌아다닌 게 아닌가. 그게 쓸데없이 돌아다닌 것이 아니게 되려면 간다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수밖에 없다. 가는 시간과 길, 오는 시간과 길 각각이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들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목적지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마어마한 일이 되던가, 오고 가는 길을 포함한 모든 순간이 귀중한 시간이 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리고 은행을 털거나 할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상의 선택은 전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해, 그 달, 그날, 그 시각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던, 지구상에서 그 지점과 내가 교차되면서 유일한 추억이 된다. 뭘 회상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굿즈들보다 그런 기억 한 조각이 더 소중하다. 왜냐하면 그런 조각조각들은 소금과 같아서 어떤 말을 해도, 어떤 글을 써도, 내가 인식을 하든 까맣게 잊어 떠올리지도 못하든 어쨌거나 녹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들을 많이 모을수록 내 글과 말에는 더욱 풍부한 향기가 떠오를 것이다. 모든 순간들이 다 같은 소금은 아니니까. 내가 써야만 하는 글이 있다고 해도 그 글이 결국 내 인생을 통해 나오는 것이라면, 나는 그 인생이 충분한 맛을 낼 수 있게 노력할 의무가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손에 잡히는 자료들의 유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