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함은 천재의 상징이라고 한다. 또한 우울함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과의 단절은 천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술 작품이나 글을 쓰는 데 있어 필수 요소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사람에게 외부와의 완벽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세상과의 접점 대신 다른 어떤 것과의 연결을 세상의 관점에서만 보면 세상과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는 것뿐이다. 자폐증이라고 해서 바깥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누군가 멍하게 있다고 해도 그의 뇌 속에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감정이 격할 때 생각조차 멈추는 것도 우리는 많이 본다. 사고에 있어서 완벽한 부재, 진공은 없다. 의사소통의 부재, 감각의 상실은 있을 수 있으나 생각 자체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멈추는 것은 생각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이 고여 있다고 하지 멈춰 있다고 하지 않듯이 생각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생물처럼 사람의 생활과 감각 구석구석까지 스며든다.
나는 지금 끌어당김의 법칙이나 긍정의 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이야기가 내가 쓰려고 했던 것의 주제도 아니다. 나는 우울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나게 뛰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우울함을 느낀다. 가벼운 우울함은 참을 만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오래 지속하고 나면 그 우울함 역시 일정 시간 동안 지속된다. 문제는 어느 이상 되는 우울함은 가벼운 우울함과 달라서 일정 기간 동안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점점 심해지는 우울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 상태에 머무르는 요령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했다.
점점 심해지는 우울은 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단순히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부정 상태를 느끼는 것이다. 그 우울을 깨부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도 동반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죽을 때까지 견뎌 나가야 할 것만 같다. 그 느낌만으로도 힘겨운데 그 느낌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은 그 느낌을 더 키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력감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게, 그 느낌이 들 때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그 순간은 잊어버릴 수 있지만 그 순간을 지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이 갔는데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다는 사실 역시 또다시 상황을 악화시킨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 한정해서는 이런 경우 그 느낌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안에는 끝나지 않을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경우는 보통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서 웃고 떠들었을 때 생기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그렇게까지 마시는 일을 줄여서 최근 일 년 동안은 그런 적이 없지만, 앞으로 전혀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이든 확신하면 그것을 깨는 것이 삶이니까.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것들은 세상에 많이 있다. 많이 돌아다니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을 구경하고, 특별할 게 없는 시내 풍경을 관찰하면서 돌아다닌다. 집에 돌아오면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다음 날 밖으로 나가면 세상도 달라진 게 없고 나는 여전히 돌아다닌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느낌과는 달리 실제 환경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내면의 나에게 은근히 어필하는 방법이다.
그게 아니라면 책을 읽는 것, 특히 두꺼운 책을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읽는 것도 좋았다. 단,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용은 따라갈 수 있도록 이미 읽어서 내용을 알고 있는 책이어야 한다. 그리고 며칠이고 지나도 성의 없이 읽으면 끝낼 수 없는 분량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가 나에게는 좋았다. 스토리도 시간이 가는 대로 물이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고 딱히 음악을 듣는 것처럼 오르내리는 정서도 없다. 우울한 느낌은 보통 길어야 삼사 일 가는데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삼사 일 안에 다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때로 굴 속에 누워 있는 장면들은 눈에 들어오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그런 문장 몇몇 때문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의 소설이어서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음악을 듣는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밝은 분위기의 곡들은 공감을 할 수가 없었고 우울한 곡들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 배경으로는 모를까 그 자체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우울함에 빠져서 글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감각마저 무력감에 문을 닫는 시기이기 때문에 내 의지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다. 그 상태가 되기 전에는 그 상태에서 글을 써볼까 생각을 할 수 있어도 그때에는 책을 한 권 집어드는 것조차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그때 내가 보는 시선으로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써질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는 했다. 과연 우울함과 광기는 천재의 신호일까. 일반인도 그 원 안으로 들어가면 천재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까.
우울에 따르는 세상과의 단절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그 느낌 안에서 버티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버티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새로 보이는 것이 있을까. 내가 느끼는 우울은 바닥이 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까스로 공중에 붕 떠 있지만 언제 그 아래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 보통 기분이 좋지 않을 때를 숫자로 1,2라고 해도 어쨌든 긍정의 쪽에 서 있다면 그때 내가 느꼈던 우울은 완벽한 0의 상태였다. 언제 마이너스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 아파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떨어져야 할 것 같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시체조차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세상에 부정적인 영향만 잔뜩 안겨주는 존재라는 자각. 그럼에도 그건 긍정의 방향에서 긍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곤혹감일 뿐이다. 실제 광기로 연결된다는 천재들의 우울은 이 정도가 아니리라 믿는다. 아마도 마이너스로 더 진행하면 무엇이든 해야만 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니 인위적으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며, 들어가면 나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를 플러스 50, 아주 기분이 좋을 때를 100이라고 하면, 보통의 사람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느낄 때, 그리고 거기서 바닥이 사라졌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는 0일 것이다. 완벽한 0. 벌거벗은 바닥이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내면에서부터 인식하고 있는, 실제 바닥이 아니라 고도 0이라는 그 지점이다. 하지만 세상과의 단절이 일어난 후에는 주변 또한 세상과 같지 않다. 세상은 긍정이다. 모든 질량은 플러스이고 시간은 항상 한 방향으로 흐르며 우리 역시 모든 감정을 시간에 따라 소비한다. 하지만 소비하지 않는 감정과 질량을 느끼지 않으며 시간이 의미가 없어지는 그 지점에서는 우리의 기분도 마이너스가 된다. 감정적으로, 물리적으로 세상과 연결할 수 없는 상태, 손을 대면 모두 마이너스로 끌어내리게 되는 상태.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단지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이라고 가정하고 바라보는 세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나는 상상할 수 없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과 그들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은 역사가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 마이너스 측면의 자신의 인생으로 세상의 마이너스 측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남긴 작품들은 눈에 보이는 곳에 허수를 펼쳐놓는 과학자와 비할 수 있지 않을까? 천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 표시를 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들의 시선을 따라 하려는 것 자체가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면서도 그걸 감수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들이 플러스인 세상을 손에 닿으면 마이너스가 되는 그들의 손가락을 신경 쓰지 않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길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을 끌어올려주는 것만큼이나 세상 대신 뭔가에 연결되어 있는 그 상태에 대한 호기심도 크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