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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잡히는 자료들의 유혹

by 루펠 Rup L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조금 독특하다. 책을 한 권을 읽는다. 하지만 끝까지 읽으려는 욕심은 없다. 그렇다고 끝까지 읽지 않은 책들이 집에 수두룩한 것은 아니다. 단지 첫 장을 펴고 나서 그 상태로 끝까지 읽겠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단순히 쉬어가며 읽는다는 뜻도 아니다. 책을 읽다가 내려놓으면 다시 책상에 앉았을 때는 다시 눈에 띄는 다른 책을 펴들 때도 있다. 혹은 책을 읽다가 생각나는 다른 책의 구절이 있어서 그 책을 폈다가 계속 읽어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새로 펴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원래 읽던 책을 다시 읽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읽다가 문득 전에 읽던 책에서 끊어진 부분이 생각이 나고 그 뒷부분이 궁금해지면 다시 그 책을 꺼내 들고 전에 읽다 만 부분부터 다시 읽어 나가기 시작한다. 뒷 내용이 궁금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책이다. 그런 책은 나는 절대 끝까지 읽을 수 없다.
그런데 두 번째 책을 읽다가 거기서 다시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 다른 책을 펼 수도 있다. 그래서 해당 구절만 확인을 하려고 했다가 다른 책이 눈에 띄어서 들어서 아무 페이지나 열었는데 그 부분을 지난번에 읽었을 때가 생각나 계속 읽어 나갈 때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읽다 만 책들이 집 안에 한꺼번에 여섯 권이 책갈피가 꽂아진 채로 여기저기 놓여 있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책들은 며칠 안에 순서야 어쨌든 다 읽히고 만다. 그렇게 읽으면 끝까지 읽지 못할 것 같은 책은 처음부터 구입하지 않고, 빌리는 책은 반납해야 할 기간이 있으니 웬만하면 일주일 안에 다 읽거나 혹은 다른 책에 눈길도 주지 말고 하룻밤에 다 읽어 버리려고 하는 편이다. 럼에도 반납 후 나중에 생각이 나서 다시 대출받아 이어서 읽은 적도 없지 않다.
나는 이런 독서 방식에 크게 거부감이 없다. 이 책 저 책을 읽다 보면 책의 흐름이 기억 속에서 섞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었지만, 그 책의 내용인 줄 알았던 것이 실제로 다른 책에서 나온 것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이미 내 방식으로 굳어져서인지 그것 때문에 불편할 수도 없고 또 헷갈리던 것들은 어차피 몇 번에 걸쳐 반복해서 읽으면 저절로 정리가 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부러라도 그렇게 섞어주는 과정은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책을 소화하는 방식은 위장에서 음식물들을 강제로 섞어주듯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순서대로 들어오지도 않지만, 문장 대 문장으로 머릿속에서 의식의 흐름처럼 자기만의 고리가 있어서 그 고리가 마음에 드는 다른 문장을 걸어서 끌고 다니듯이 그렇게 뭉쳐져 가는 식이다. 마치 철사로 엮은 옷이 바닷속 모래 위에 살포시 쌓이는 것을 상상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책을 읽는 방식이라는 말이 단순히 눈으로 페이지를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는 방식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을 좋아한다. 손에 잡히지 않으면 아예 머릿속에 관념처럼 들어앉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이해하기보다 체화하기를 바라는 식이다. 내가 노력해서 끌어내어도 힘들게 만든 쟁기가 언젠가는 녹이 슬듯이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보면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수없이 보고, 그 결론을 가지고 낸 다른 결론들을 충분히 접하고 나면 우리가 가속도의 법칙이 너무 익숙해서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 나에게 익숙한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외우기보다 이해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 이해조차 불완전하다고 느낀다.
지금 읽는 책은, 페소아의 글들 사이에 들어앉은, 헤밍웨이의 '내가 사랑한 파리'이다. 책을 읽다 보니 파리 지도를 출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교재 내지 참고자료를 만들어서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손에 잡히는 자료가 책에 붙어 있으면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 책 속을 여행하는 것과 굉장히 비슷해진다. 그래서 '젠틀 매드니스'의 경우에도 책에서 언급한 웹페이지 자료는 대부분 출력해서 다른 노트에 붙여 두었다. 그리고 그 노트는 내 책꽂이에서 젠틀 매드니스와 항상 나란히 꽂혀 있다. 나에게 그 자료들이 꼭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은 '필요'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교양을 쌓을 필요가 있어서 읽는다고 하지 않듯이 그런 것을 만들어서 나중에 다시 읽을 때 참고하려고 하는 것도 통상적으로 말하는 필요와는 거리가 멀다.
파리 위성사진에 책 앞부분에 있는 약도에 표시된 장소들을 표시하면 다음에 읽을 때뿐 아니라 당장 내일 읽을 때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걸 다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이 책은 다시 읽지 않을 것이다. 그 지도를 참고하면서 읽을 때 기분이 좋을 것이 상상이 벌써 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이에 또 다른 책을 읽고 있게 될 것이다. 또 다른 페소아의 책이거나 얼마 전에 집에 들어온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사진이 충분한 책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내가 사랑한 파리'에서 실린 사진들도 혹시 컬러 사진이 있는지 찾아서 있다면 지도와 함께 소책자를 만들어 책 옆에 함께 꽂아둘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항상 환영이지만 잘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자료가 늘어나는 것이 단순히 책에 내 책이라는 도장만 찍어 놓고 뿌듯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내가 사랑한 파리'는 읽으면 읽을수록 정감이 가는 책이다. 언젠가 위아래 여백에도 많은 메모가 들어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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