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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나다

by 루펠 Rup L

음식을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몸이 건강해질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고 같은 자극에 반응하는 경향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한 마디로 '내가 먹는 것이 나다'라고 한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참 날카롭다는 생각을 했다. 말하고자 하는 것과 내용이 일치하면서도 간단한 한 문장이라서. 내 몸을 뜯어보면 내가 먹는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육체가 있을 것이다. 그야 간단하다. 넣지 않은 재료가 들어간 그릇은 있을 수 없으니까. 내가 내 몸에 넣은 것만이 내 몸의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은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새로 만들어져 가고 있고 말이다. 내가 먹는 것이 나라는 말은 육체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내가 내 몸 이외의 구성 요소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정신'을 꼽을 것이다. 흔히 집중을 잘하지 못하거나 오래 지속하지 못하면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는데, 바로 그 '좋지 않은 정신 상태'야말로 솔직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먹는 것이 나라고 할 때, 내가 음식의 재료와 그 영양소와 비교하는 것이 내 달리기 실력이나 재빠르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동작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이 내 육체의 구성요소로 간다고 할 때, 내 물리적인 세포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좋아하는 음식을 보면 운동 신경을 알 수 있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가지는 정신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는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풀어져 있을 때, 좋아하는 것을 할 때 그것들이 어떤 분야인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내 육체가 내가 먹는 것들의 총합이라고 하면, 내 정신은 내가 읽은 것들과 내가 겪은 것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둘을 합하면 그것들은 바로 내가 배운 것들이다.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의 총합이다. 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배우고, 세상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향들을 가능성별로 스펙트럼으로 배우고 그것들을 통해 사실들과 그 뒤의 이치를 배운다. 이것들은 보통 책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다가오지만, 인터넷을 비롯해서 직접 경험하는 것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마치 소화를 하듯 애초에 내게 다가올 때의 모습을 이제는 각자 분리해서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통합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렇게 모든 화학반응을 거친 후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하고 반응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새로 개발한다. 책을 끊임없이 읽어 나가는 것은 흔히 이야기하듯 견문을 넓혀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있지만, 세상에 반응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개발해 나가는 과정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에 반응하는 방법은 사회성의 척도에서 내가 어느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외부에서의 관점으로는 '월든'을 읽음으로써 어떤 사람의 성격이 바뀌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이 반응하는 방식을 새로 배운 것에 불과하다.
대답할 때의 말투 정도만이 그 반응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실을 접했을 때 어디까지 사려 깊게 생각해 보고 시나리오를 쓸지, 그런 것 없이 순박하게 있는 그대로, 그리고 그 뒤에 있을 사실들을 모른 체할지 결정하는 것도 모두 반응에 속하는 일들이다. 책을 읽는 방식도 역시 반응이다. 우리 삶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에 외부의 정보나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우리가 독단적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름으로써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한 반응을 만드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우리가 반응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넓혀 가면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극이 어디까지가 개인적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적인 것인지를 배우면서 계속해서 바뀌게 된다. 그러니 반응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배운 것들인 셈이다.
우리가 배운 것들의 총합과 그로 인해 조합한 반응들을 모두 합치면 우리 자신이 된다. 사회라는 것이 반드시 사람 사이일 필요도 없다. 낚싯대를 잡고 있을 때 줄의 당겨지는 압력에 따라 반응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외부의 자극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세상의 자극을 바라보고 그 자극에 대응을 하고 그런 과정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간다. 그렇게 세상과 자극과 대응을 주고받는 것은 얼핏 보면 우리가 세상과 1:1로 대등하게 마주 보고 뭔가를 거래하는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자극과 대응은 결국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자극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해서 반응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고 우리의 반응 또한 세상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권력이나 돈으로 다른 사람의 생에 간섭하여 자신이 미미하지 않다는 확신을 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더라도 그 대가로 자신의 삶이 미미하지 않게 된다는 확신은 얻지 못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비교한 것이기 때문에 원래 미미하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생을 다해 세상에 대응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과 별다른 결과는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선택하고 반응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는 그저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저 바라보는 존재일 뿐이고, 세상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우리의 반응이 미치는 영향이 무한대로 작게 수렴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불과하지 않게 된다.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곧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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