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시간을 나타내는 개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을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아야기를 생생하게 하기 위해 정확히 앞으로 있을 일인지 과거에 있던 일인지 과거 중 현재에 가까운 시기에 일어나는 일인지 표시하는 기능이라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라는 과거가 실제로 필요하다. 그러나 용도가 단순히 설명이 아니라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면 과거는 전혀 기능이 없다. 그러므로 아주 가까운 과거를 뜻하는 현재도 쓸모없는 개념이다. 우리에게는 본질과 미래만 있을 뿐이다. 과거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가까운 것들의 과거이지 우리의 과거가 아니다. 우리의 과거는 우리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단지 우리 주변의 과거를 통해 비추어 볼 뿐이다. 또한 그것은 기능상으로는 단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할 뿐, 우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나무와 같고,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들은 우리가 서 있는 토양과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과 태양에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설명은 우리 삶인 나무 자체의 성장은 설명하지 못한다. 성장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지금의 형태가 되어 있을 뿐이다. 묘목일 때 아무도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다. 지금 또한 묘목일 때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한다. 나무는 그 자체로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점차 굵어지고 든든하고 단단해지면서 뿌리를 굳게 내린다. 그 모든 과정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지만 나무에게 있어서의 과거가 아니라 토양에게 있어서의 과거일 뿐이다. 토양에게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뿌리가 토양을 뚫고 들어가며 단단하게 붙드는 그 과정은 토양에게 있어서만 과거일 뿐이다. 붙들린 것은 현재이고 계속해서 붙들려 있을 것이라는 것은 미래이다. 나무에게는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무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단단히 서 있기 위해 토양이라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지금처럼 붙들지 못했을 시절에도 그 힘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무로서는 최대의 힘으로 붙들고 있었다. 과거는 없다. 그저 항상 죽을힘을 다해 토양을 붙들고 있다. 그것이 나무의 본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생에서는 본질이 과거와 현재를 꿰뚫는 상태를 나타내고, 그 상태를 통해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무생물의 과거와 다르다. 과거라는 것, 미래와 떨어뜨려 현재와 과거를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결정할 힘이 없는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무언가를 결정할 의지가 있는 것들은 그 의지가 일관성 있게 발휘되는 방향을 통해 본질을 알 수 있다. 단순히 객관적인 과거와 현재는 필요 없다. 그들의 미래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통해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의지가 있는 것들이 과거와는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급격한 계기가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이다. 급격한 계기라는 것은 간단하다. 무생물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단지 주위 환경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무생물과 같은 상태가 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생을 제대로 나눌 수 있게 될 때에야 본질에서 벗어나 과거와 다른 현재, 현재와 다른 미래로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럴 만한 사건은 누구에게나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본질에 따라서 무생물의 객관적인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고 느끼는 한계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상할수록 그런 상태에는 빨리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를 무생물처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스스로 언제든지 본질에서 벗어나 분리된 상태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본질의 덩어리로만 본다면, 한 가지 조건, 예를 들면 바람의 방향 등에 따라서만 자라는 방향을 바꾸던 나무가 갑자기 곧게 자라겠다고 하는 것처럼,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된다.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가 된다. 스스로 너무 단단하게 생각하고 한 그루의 나무라고, 역지사지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내가 그저 다른 나무 옆에 있는 제3의 존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은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와 본질을 분리해 내지 못한다. 변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자기 계발서들은 관성이니 신경 프로그래밍이니 하는 말들로 화려하게 포장을 하지만, 스스로 바꾸려는 의지가 없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는 상태에서는 중세 시대 마녀의 주문을 외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과거와 현재 대신 본질을 알아보고, 변하고 싶을 때는 그 본질을 다시 과거와 현재로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본질을 과거와 현재라고 착각한다면 결국 의지는 흙을 움켜쥐는 나무의 뿌리처럼 본질에 꺾여 버리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