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보면 요리사들이 뛰어다니며 재료를 손질을 한다. 쉬지 않고 손질하고 끓이고 자르고 튀기고 굽는다. 손으로 반죽하듯 주무르기도 하고 실제로 온몸의 체중을 실어 산산이 짓이겨 반죽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음식을 마지막에는 널찍한 접시 위에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놓고 그 옆에 소스를 약간 얹는다. 그리고 플레이팅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한편, 개인 빵집에 가도 강아지 모양으로 만든 빵이 있을 때가 있다. 귀여운 강아지가 바닥에 턱을 놓고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다. 캐릭터 모양의 케이크도 마찬가지로 피규어처럼 완성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고급 요리의 플레이팅과 귀여운 동물 모양의 디저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가격이나 종류, 먹는 시기 등 도무지 같은 것이 없지만 의외로 공통점은 음식이라는 점이다. 잘라서 입에 넣고 씹어서 산산조각 낸 후 삼키는 음식이다. 맛이 좋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접시에 내어 나오는 그때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우선이다. 우리말에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도 있지만, 플레이팅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단순히 '먹음직스럽다'라는 차원이 아니라는 소리다.
아름다움이란, 아름답지 못한 상태로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는 상태라는 글을 읽었다. 높다는 것은 올라가기 힘들다는 뜻도 되지만 떨어질 여지가 있는 상태라는 뜻도 된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질 때 받을 충격을 계산할 수 있는 '위치 에너지'라는 개념도 존재한다. 높은 것은 언제나 낮은 위치에 있는 것과 비교해야 높은 것인지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것 역시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어야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다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 미인도 나이가 들면 그 아름다움이 나이와 함께 시들어가리라는 것을 안다. 아름다운 패션으로 인정받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그 인기는 가라앉게 되어 있다. 아름다운 사랑 역시 감정이 영원히 유지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기 때문에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기에 영원히 기억된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의 문제는 아니다. 아름다움이 위치에너지처럼 하나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언젠가 그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 때가 오기 때문에 아름다운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 섹시함이 인정받는 것도 성적인 그 유혹이 언젠가 수그러들 것이기 때문에 그 섹시함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게 인정되는 것이고, 열심히 관리한 이삼십 대 여성의 몸의 곡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관리를 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지, 열심히 관리하더라도 시간의 힘에 어떻게 사그라드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플레이팅으로 돌아가자. 음식이지만 아름답게 플레이팅 된 요리는 음식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재료와 요리의 상태를 뜯어보았을 때, 향기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 먹어도 되는 것인지 처음 보는 사람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요리의 정점이다. 주방에서 완성되어 테이블 위에 올라왔을 때, 그때가 그 요리로서는 최고의 상태이며 가장 먹기 좋은 상태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마구 헤집어지고 입 안에서 산산조각이 나서 음식물 쓰레기 같은 모양으로 위장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요리 역시 그 상태가 엄청나게 짧은 상태만 유지할 수 있기에 그만큼 아름다운 상태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지 못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에서도 길지 않은 그 순간순간들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는 게 더 낫다. 이것은 누군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다. 인체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본능적으로도 인정하지만 문화의 요소가 입혀지면 더욱 강화된다. 아마 문화적인 측면이 강할수록 짧은 시간만 유지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리 역시 그 많은 노력을 들이더라도 본능적인 차원에서는 보기 좋은 것에 칭찬을 하는 데에도 배고픈 것과 보기 좋은 것과 먹었을 때 배가 부른 정도와 실제 맛이 좋은 정도 등에 있어서 복합적으로 판단하게 되겠지만 문화적인 차원에서는 순수하게 고의적으로 문화적인 측면에 들인 노력에 집중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맛과 배가 부른 정도, 즉 본능적인 영역을 벗겨내고 나서 제3의 관점까지 통과하고 나서야 아름답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 같다.
순결이 아름다운 이유는 언젠가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글은 하나의 충격이었지만 하나의 진실이기도 하다. 세상에서는 영웅으로 떠받들면서도 동시에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인간 예수', '인간 이순신' 등의 말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은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져 볼 시간이 없어야 정상이다. 현대인은 항상 바쁘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런 심리가 문화적인 본능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뿌리 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듯 플레이팅 한 요리, 청초한 얼굴과 피부, 탱탱한 허리와 엉덩이. 오래가지 않는다고 알기 때문에 소중하고, 소중한 만큼 질투가 나고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소비한다. 내가 그런 요리를 받게 되면 먹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런 얼굴과 몸을 가지게 되면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상하고 쉬고 처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점으로 올라가면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 게다가 내려올 때는 올라간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내려오게 될 수도 있다. 한 번 거친 모든 과정을 정확하게 반대로 진행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자라나고 나면 부패를 향해 진행한다. 우리는 일회성의 인생을 살지만 우리 경험 안에 있는 수많은 똑같은 작은 경우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엄청나게 많은 조그마한 일회성이 모여 커다란 일회성 인생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순간이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건 우리는 정점을 살아간다. 그러니 그 순간이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다. 요리는 매 순간 정점이 아니라 정점인 순간이 단 한 번 온다. 아름다운 외모 역시 순간은 아니지만 한 때만 지나간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 인생에서는 정점이다. 우리는 요리나 피부보다 소중한 존재이다. 우리의 인생이 더 이상 우리의 몸을 가지지 못하게 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정점에서 무생물로 한순간에 추락해 버리고 만다. 정점이 한순간인 우리 인생의 수많은 것들과 달리 우리는 수많은 정점을 누리고 한순간 그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아름다움을 우리 평생 누릴 수 있다. 누릴 수 있는데 누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인생에 대한 배신인가. 인생이 축복인 이유는 우리가 평생 정점을 지나는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떤 핑계로든 피해 가지 말자. 직장이든 자녀 문제든 인생에서 우리를 스쳐가는 수만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한 것들 중 인생을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