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이야기이다. 말과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내용이 있는 이야기이고, 이야기이므로 들어야 할 사람, 듣고 싶어 할 사람, 내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실제로 그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 주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직접 대화를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단지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읽을지 말지도 결정할 수 있을 테다.
글을 쓰면서 내 글의 목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다. 나는 글을 써야 하고, 그 글은 이 세상 어디엔가 이미 있고, 내가 내 삶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그것을 이 생에서 내 경험으로만 할 수 있는 말로 풀어서 기록하는 것이다. 어쩌면 환생이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계속해서 다른 경험을 하며 살면서 각 생에서의 경험을 통해 같은 글을 반복해서 써 내려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떤 삶에서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잔소리만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나는 새로 쓰는 글은 없다고 생각한다. 머리를 크게 짜내서 쓰는 글들이 아니니 내가 만든 글이라는, 혹은 내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라는 주장을 강하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내 글이라는 것의 본체는 어떤 차원에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내 삶 속에서 그 본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 본체는 언어의 형태로 쓰여 있지 않으니까. 그 언어조차 내가 한국어를 사용하느냐, 영어를 사용하느냐, 돌고래의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니 본체가 그런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내 언어로, 내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번역해 내놓는 것이다. 그러니 내 글은 아무리 본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내 생과 경험에서 동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독자는 누구인가? 내 글의 독자를 찾아야 하는가, 내 글의 본체의 독자를 찾아야 하는가? 나는 내 글의 독자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글의 본체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욕을 하며 쫓아 버릴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진리를 찾는 일이면서 도둑질 같은 일이다. 나조차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내 인생을 거쳐서 바라보는데 그것을 다시 정제해서 달라는 말이 아닌가. 그건 농사는 하나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쌀만 가져가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내 글의 독자를 찾아 내 글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내 글의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만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글은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800편이 넘는 글을 쓰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써지는 대로 쓰는 글이고, 내가 독자라고 설정할 수 있는 범위는 단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뿐이다. 어떤 동지인가? 막연히 떠오르는 이야기를 쓰지만, 그렇다고 해서 쓰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딱 나와 똑같은 상황의 사람들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는다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쨌거나 이런 상황은 언젠가 벗어나게 될 거라는 확신도 똑같이 있을 것이다. 내가 무슨 글을 쓸지 글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모르는 그런 상황 말이다. 쓰고 싶은 내용으로 말을 마음대로 조종하듯이 자유자재로 빨리 달리게 했다가 오른쪽으로 가게 했다가 속도를 줄이게 하는 것들을 글에서도 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건 경험도 중요하겠지만 써야 하는 글이 끝나고 더 이상 본체에 대한 욕구 대신 이야기 자체가 새롭게 부상하는 시기, 온전히 이 생에서 만들어진 글이 생겨서 그것을 쓰게 되는 그때에야 제대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써야 하는 글, 그러니까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쓰는 글을 쓰면서 쓰고 싶은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지금은 가슴이 뛰면서 '이건 꼭 써야 해!' 하는 것은 없고 막연히 뭔가를 써야 하고 쏟아내고 싶은 그런 상태인데, 꼭 쓰고 싶은 것도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뭔가를 쏟아내고 싶은 것도 있는 그런 상태는 불가능한 건가 싶은 것이다. 언젠가 쓰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쓰는 날이 온다면 반드시 그 둘이 교차하는 지점은 생기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기계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도 아닌데 그런 것이 칼로 자르듯 또렷하게 '오늘부터는 떠오르는 게 없을 거야. 쓰고 싶은 것만 쓰자'라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어차피 기다릴 것이고, 기다리다 보면 해결되는 일은 많이 있다. 그런 욕심이 생기지 않게 될 수도 있고 쓰고 싶은 것과 써야 하는 것이 겹치는 기간이 생각보다 오래갈 수도 있지만 모두 시간이 가고 어쨌거나 계속 써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써 내려가고 나는 나처럼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동지들이 있으리라 믿고, 그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해 글을 쓰듯 나도 그들을 위해 글을 포기하지 않고 쓰겠다고 생각한다. 다짐까지도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렇게 힘겹게 글을 쓰지는 않는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나아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모두 작가가 되어 만나겠지. 그때 가면 그들을 위해 쓴 글들이었다고 말해주어야겠다. 그중에 내 글을 읽은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지는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