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건 들이기 쉬운 습관이다. 사라졌다가도 어느새 다시 생기기도 하고 어느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닫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일을 하면서 순서를 다시 잡는다거나 암산을 하려고 숫자를 임시로 외운다거나 할 때는 혼잣말이 습관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중얼거리기 쉽다. 중얼거리는 것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내가 말하는 혼잣말은 중얼거리는 것 전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는 대화이다.
유독 그런 대화를 익숙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는 너무 익숙해서 옆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을 하는데 이건 나도 옆에 있으면 싫어하는 타입이지만 그렇다고 혼잣말 자체를 좋지 않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수정하거나 할 때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짤 때는 혼잣말이 꽤 도움이 된다. 내가 한 마디 하고, 다시 대답 삼아 아이디어를 덧붙이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의외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보다 더 나은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떤 땐 그렇지 않고 어떤 때는 소득이 있는지라 차이가 뭔지 고민을 해 보았는데, 결론은 '대화'였다. 결국, 혼잣말도 대화형으로 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닌, 아는 것을 되새기는 것으로 머물고 말았다.
'ㅇㅇ 해야지. 그리고 ㅇㅇ도 해야 돼. ㅇㅇ도 해야 하고.'
라고 하면 단순히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반면
'ㅇㅇ를 해야 하는데, 그것만 하면 될까? ㅇㅇ도 해야 하는데 그 둘을 빨리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순서를 바꾸면 되나? 생각해 보니 ㅇㅇ도 해야 돼. 하나씩 하는 건 좀 비효율적이지 않나?
같은 식이다.
대화형이 되면 보통 대화를 할 때처럼 새로운 것이 저절로 하나씩 끼어든다는 것이 장점이다. 사실의 나열은 상명하복의 지시나 마찬가지이다. 해야 할 일, 기억해야 할 것을 스스로에게 불러주는 식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 몸은 내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가 '마음을 먹고' 뭔가를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아랫사람으로 본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책을 검색하다가 왜 나 자신에게 함부로 하느냐는 식의 제목으로 된 책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제목에 백 번 동감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하기를 원한다면 나 또한 나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사당오락이라는 말처럼 스스로에게 잠을 재우지 않는 처벌을 내리면서 그걸 또 정신력이라고 포장까지 한다. 사실 지구력, 정신력, 뇌력 이런 식으로 힘 력을 붙인 이상한 일본식 한자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중에서도 정신력이라는 말은 있어서는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력은 그 자체로는 매우 좋은 말이다. 육체력과 정신력으로 내 몸을 둘로 나누어 정신이 육체를 누르는 것을 정신력이 더 좋다고 표현하는, 표현을 잘해 낸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표현에 있어서 좋은 말이지 육체를 그렇게 억누르면 병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정신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생성되어 있지만 내가 내 육체에 스트레스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네 몸이니 마음대로 해'같은 상황이라 안타깝다.
반면 대화형으로 하는 혼잣말은 실제로 정신 역시 둘로 나뉘어 공정한 상태에서 의견을 쌓아갈 수 있다. 당연히 몸이 힘든 것, 피곤한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마치 내 머릿속에 내 권한을 위임받은 두 명의 총리가 있어서 한 명은 몸과 내 내면에 대해서, 한 명은 내 외부에 대해 성취하고 보호해야 할 것들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과 같다. 스트레스가 아주 없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자극을 남기고는 최소화하려는 마음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취를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무언가 어려운 일을 할 때, 웬만하면 원칙만 세워 놓고 이삼일은 생각하지 않고 놔두면 실제로 착수하려고 할 때 좋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르는데, 이렇게 하기로 한 것도 그렇게 혼자서 한 토론 덕분이었다. 판을 깔아주지 않으면 그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만 쳐다보고 있다.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데, 그것도 힘들게 질질 끌고 가야 한다. 내면에서 토론을 하도록 하면 생각도 자유롭게 흘러가면서 어디서 온 건지 모르는, 어딘가 책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생판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한 아이디어들이 끼어든다.
글을 쓰는 것은 그 대화와 비슷하다. 내가 말을 하지 않고, 떠오르는 말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내가 말을 하려고 하면 항상 같은 이야기만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서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느껴지면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생각이 너무 고리타분하다거나, 심지어 신선해서 좋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저 떠오르는 말만 받아 적으려고 한다. 그러면 생각은 둘이 서로 꼬여가면서 올라가는 덩굴처럼 계속해서 위로 자라 나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따라 그리기만 하는 것이다.
혼잣말은, 특히 대화하듯 하는 혼잣말은 곧 혼자서 쓰는 글이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나올지, 어떤 경로를 통해서 갈지 글을 쓰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글을 쓰는 목적도, 대화하듯 하는 혼잣말도 그 결론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나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한 적 있다'라고 쓸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주 큰 차이이다. 어쩌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일 수도 있다. 다르지만 비슷한 것뿐일 수도 있다. 바로 내가 그 과정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대화는 내가 그 모든 과정을 거쳐간다고 하더라도 결국 남는 것은 결론뿐이다.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잊어버린다. 글을 쓰면서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록하지 못하는 부분은 잊어버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생각을 따라가면서 글을 쓰면 그 과정이 그대로 글로 남는다. 영상을 기록하듯이. 다른 말로는 내가 아니면 그 생각들은 존재한 적이 없는 것과 같아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대화가 없다면, 글을 쓸 일도 없고 책을 읽는 보람도 없을 것이다. 가끔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도 계속 쓰는 이유는 내가 쓰는 글은 그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글을 그리 치열하게 쓰지도 않는다. 글을 쓰지 않으면 운동을 빼먹은 것처럼 찌뿌둥하기는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뭔가를 희생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단지 매일매일 1mm만큼 발전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계속 나를 나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