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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상자

판교

by 루펠 Rup L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목적을 불문하고 하나의 설렘을 동반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원래 여행의 목적이기 때문에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제외하더라도 그 밖의 시간에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설렘의 정도를 결정할 큰 요인이 된다.
판교로 5일짜리 교육을 떠났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교육이기도 하고 실무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내용이었기에 교육 내용과 시간에 대해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육을 함께 듣는 일행 없이 혼자 떠나서 오전 9시에서 오후 18시까지 정해진 일정 외에는 갑자기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셈이었기에 그 시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선물이 되었다. 그렇다고 18시부터 23시까지, 그리고 아침에 6시부터 9시까지 세부적인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세운 것은 아니었다. 교육출장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휴가로 받아들였기에 조금이라도 여유 있게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사비를 들여 돈을 보태 교육 장소까지 걸어서 십 분 이내에 들어오면서도 지나치게 비싸지 않은 호텔을 잡고 그 근처 식당들도 조사해 두었다.
호텔 주변에는 삼성 SDS를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입주해 있었기 때문에 호텔과 연결된 쇼핑몰에도 식당들이 즐비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들답게 늦게 가면 문을 다 닫았기 때문에 시간 맞춰 가는 것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잘 지키면 식사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는 몇 끼 사 먹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 건물들은 달랐지만 새로 지은 쇼핑몰답게 모두 이어져 있어 폭우에도 비를 맞고 다닐 염려가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첫째 날 보낸 하루의 일과가 어쩌다 보니 남은 일주일의 루틴이 되었다. 교육에서 진이 빠져서 돌아올 일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매일같이 정적이고 조용한 하루가 이어졌다. 아침에는 일어나 글을 쓰면서 운동을 했다. 호텔에 투숙자만 사용 가능한 피트니스 센터가 있다고 해서 운동복도 가져왔는데 막상 가 보니 러닝머신 세 개와 덤벨이 전부인 데다가 그 정도도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기 때문에 한 15분만, 그러니까 세 세트 정도만 소화한 후 내려와 버렸다. 그러고 나서 운동을 해야겠다 싶으면 방에서 의자에 발을 올리고 하는 푸시업 정도만 하고 끝냈다. 50개씩 3분 간격으로 네 세트. 세트와 세트 사이에는 책을 읽었다. 세잔에 대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헤밍웨이의 책만 읽게 되었다. 한 번 더 읽고 두 번째 읽으면서부터는 왜인지 속도가 붙지 않았다. 읽으면서 가만히 광경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는 장면들이 많아졌기 때문인 것 같다. 일종의 추억팔이에 넘어간 셈인데, 작가가 담담하게 풀어내겠다고 의도한 것과 달리 그 추억이 너무 개인적이고 아련해서 몰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일이 되새기며 읽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그의 느낌을 생생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그렇게 생생한 경험을 그의 시간을 내 관점에서 들여다보다 보면 한 번씩 바쁘게 글자를 훑던 눈을 멈추고 상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네 세트가 다 끝나면 책을 덮고 글을 쓸 수도 있고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갈 수도 있다. 우선은 일곱 시가 될 때까지는 책을 읽었다.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집에서 9시에는 길을 나서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쪼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할 일을 위해 시간을 쪼개더라도 한 시간 단위로 쪼갠다는 것은 출근을 해야 하는 아침 시간에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치가 아닐 수 없다.
일곱 시가 되면 스타벅스 앱에서 주문을 할 수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을 하고 옷을 입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로비가 있는 호텔 3층까지밖에 엘리베이터가 가지 않는다. 더 내려가려면 로비에서 프런트가 보이는 곳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가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갈아탈 때쯤 되면 앱으로 준비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가 온다. 바로 1층으로 내려가 스타벅스에서 음식을 받아왔다. 그 시간에 나처럼 주문한 사람들이 줄줄이 있었다. 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 명씩 누가 보아도 스타벅스에 가는 것 같은 차림, 그러니까 막 자다 일어난 것 같은, 도저히 그 복장으로는 호텔 밖으로 나가려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복장으로 어딘가를 향해 흐느적거리며 걷는 것이었다. 띄엄띄엄한 줄로 어딘가를 향해 걷는데, 반대쪽에서는 스타벅스 로고가 있는 각종 컵이나 종이봉투 등을 든 사람들이 또 한 줄로 호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고 있었다.
올라오자마자 커피를 마시며 샌드위치를 먹어 치운다. 샌드위치를 빨리 먹고 나서야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면서도 바닥을 짚었기 때문에 세트마다 손을 씻었는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그 손으로 책이나 키보드를 만지기는 싫어서 어쩔 수 없다. 청결의 문제라기보다는 취향의 문제이다. 그렇게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고 커피만 남은 상태에서 그때부터는 글이든 책이든 집중할 시간이었다. 창문의 커튼을 열면 판교 저 위에서 내려오는 길이 보인다. 판교역과 반대쪽이지만 이쪽도 새로 지은 건물들로 된 기업단지라 초록색이라고는 건물에 일부러 만들어 둔 작은 녹지들뿐이다. 삭막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출근을 하지 않아서인가 천천히 다니는 차들이 여유가 있어 보여서 좋았다.
9시가 다 되어 가면 방을 정리했다. 호텔에서도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면 책상이 정돈되어 있어야 하기에 웬만하면 깨끗하게 정리한 상태로 있게 된다. 외출할 때에는 쓰레기와 물건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내 물건들만 모두 가방에 담아 옷장에 넣거나 금고에 넣는다. 책상 위에 있던 컴퓨터와 키보드 등은 모두 금고로 들어간다. 책은 책상에 그대로 두어도 된다. 옷은 옷 서랍에 정리를 해 두면 청소할 때 건드리지 않는다. 속옷과 양말은 옷장 안 선반이 있으면 그곳에 정리한다. 그렇지만 외출 전에 이렇게 한 바탕하면서 정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호텔에 체크인하고 나서 곧바로 양말, 속옷, 가방 등의 배치를 해 두면 투숙 기간 내내 그 자리에 있는 물건들을 사용하기 되기 때문에 체크아웃할 때 빼먹지 않고 나갈 수 있다. 결국 외출할 때 치우는 것은 책상뿐이다. 절대 결벽증이 아니다.
그러면 옷장 안의 가방과 옷들 외에는 호텔방은 내가 들어왔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 침대 시트가 엉망이고 욕실 바닥에는 수건이 깔려 있는 정도이다. 외출을 하면서 깔끔한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출입카드를 챙겼는지만 확인하고 문을 닫고 나간다.
호텔에서 교육하는 건물까지는 걸어서 약 10분 정도 걸렸다. 버스를 타도 비슷하게 걸렸다. 호텔이나 교육장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멀었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그냥 걷는 것이 나았다. 비가 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호텔 바로 앞으로 나오면 호텔 옆건물 주차장 출입구가 있고 그 출입구를 지나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신호등이 있지만 차선이 좁아서 차가 아예 없으면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고는 했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차가 수시로 드나들어서 신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신호를 기다렸다가 파란 불이 되면 서둘러 걸어야 한다. 더 걸어 내려가면 10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그곳의 차량용 신호가 파란불에서 좌회전으로 바뀔 때가 보행자 신호가 파란 불이 될 때이기 때문이다. 삼거리여서 좌회전일 때 반대쪽 차선에서는 좌회전을 하지만 내가 건너는 신호등 쪽에서는 유턴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신호가 그렇게 된 것 같았다. 희한하게 5일 동안 주차장 앞에서 파란 불로 바뀌어 건널 때 10차선 신호도 파란불로 바뀌었기 때문에 조금만 서두르면 우회전을 하려는 차들을 여유 있게 모두 지나가게 놔두고 나서도 천천히 건널 수 있었다.
그 길을 건너고 나면 조금 전까지의 도시 같던 판교와 다른 모습을 만난다. 자갈 바닥, 풀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미는 보도블록 등이 이어지는 것이다. 마치 분당, 판교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 것 같은 인도이다. 심지어 인도에서 차도 반대쪽으로는 언덕이 이어지는데, 바닥이 시멘트로 되어 있는 길을 건너고 나면 그냥 풀밭 언덕이 나온다. 조금 더 가면 고가가 있기 때문에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출발하자마자 맞이하는 색다른 모습에 처음에는 당황했던 것 같다. 그렇게도 길이 길어 보일 수 없었다. 걷다가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계를 보면 5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서 안도했던 첫날이었다.
지붕처럼 고가차도가 지나가기 조금 전, 인도에 주차되어 있는 탑차가 있었다.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침에도, 저녁에 호텔로 돌아갈 때도 세워져 있었다. 주차된 차들이 한두 대는 아니지만 그 차가 기억이 나는 이유는 그 차의 운전자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언제나 조수석 문을 열고(운전석 쪽은 거의 연석에 있어서 문을 열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창문을 활짝 연 후 조수석 문의 창문 자리에 두 팔을 괴고 서서 책을 읽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헤밍웨이가 말년에 책을 읽고 있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물론 몸집도 작았고, 책도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적어도 서너 번째 읽는 책인 것 같은, 스스로 특별하지 않게 행하는 일과 중의 하루일 뿐이라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장마철이고 남부지방에는 비가 많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이곳에는 비는 오지 않고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아침부터 더워서 고가차도 아래의 그늘을 기대하고 걸었지만 정작 그늘 아래로 들어가니 시원하다기보다 습기가 더 올라간 것 같은 축축함 때문에 더 빨리 걸어서 그곳을 벗어났다. 다행히 교육하는 곳은 그 고가를 지나 첫 번째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정문밖에 찾지 못했는데 첫째 날 끝나고 나오는 길에 건물 안을 돌아다니면서 고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쪽문을 발견해서 그곳으로 다녔다. 건물의 끝이지만 그럼에도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습도가 달라지는 것이 생생하게 온 피부로 느껴졌다.
교육이 끝나면 다시 고가 쪽 문을 찾아 나왔다. 아침보다 더 더워진 햇빛과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문을 열자마자 훅 하고 폐를 가득 채웠다. 인도 옆에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었는데, 쪽문으로 나오면 그 나무들 사이를 지나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로 나와야 하기 때문에 습기가 많은 날에는 기분도 좋지 않아 진다. 나는 단순히 교육이 끝나고 나오는 것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과가 끝나면 퇴근을 할 텐데 퇴근할 때도 기운이 빠지면 정말 좋지 않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퇴근하는 길도 지하철 역에 갈 때까지 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어서 전혀 다를 게 없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이다.
숙소에서 교육장으로 가는 길에, 그러니까 횡단보도에서 책 읽는 할아버지 있는 곳 중간쯤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그곳에서 내려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교육이 끝나고 돌아갈 때는 반대로 그곳에서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정류소 안에 가득했다. 내가 지리를 모르니 어디로 가려고 버스를 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퇴근하려는 길이라면 호텔 근처의 기업단지에서 일을 하고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10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거나 도로를 따라 어딘가 있는 아파트 단지로 가려는 것이겠지, 하는 상상만 했다. 휴대폰만 열면 지도를 볼 수 있지만 남들의 일상을 보겠다고 찾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욱이 입사하고 나서 회사에서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참견하는 것을 호기심이니 창의력이니 하고 포장하는 것을 보고는 아예 호기심이라는 것에는 질색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엇이든'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모두 호기심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선택과 집중은 내 삶의 모토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드디어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내 시간이 시작되는 호텔방에 들어왔다. 짐을 내려놓고 다시 옷장과 금고에 넣었던 짐들을 꺼내온다. 책상에 노트북과 키보드, 책을 배치한다. 그냥 텅 빈 마음으로 책을 다시 편다. 이 때는 글을 쓸 수도 있다. 커튼을 활짝 열고 해가 지는 도로를 내려다보면서 글을 쓰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얼른 나가서 순대국밥을 먹기도 한다. 글을 쓴다면 맥주 한 캔을 딴다. 더운 길을 돌아온 나에 대한 보상이다.
끈적이는 것이 많이 줄어들면 욕조에 물을 받는다. 욕조가 있는 호텔이라면 반드시 욕조에 하루에 한 번 이상 들어간다. 마지막 날에는 새벽에 일어나서라도 꼭 욕조에 들어가서 몸을 푼다. 수영장은 가지 않아도 욕조는 꼭 들어간다. 욕조가 없는 호텔에 가게 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지막에는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본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보다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글감노트에 기록을 하는 대신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다음 날에 대한 걱정이 없는 일정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글을 쓰느라 조금 늦게 자도 되는 것. 글을 쓰겠다고 밤을 새우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셋째 날에는 아내가 찾아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머물렀다. 호텔 1층에 있는 닭갈비 집이 맛있다길래 먹고 와서 또다시 일정을 반복했다. 누워 있다가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욕조에 들어가서 놀다가 다시 들어와 책을 읽다가 누워서 핸드폰을 보았다. 그러다가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커튼을 걷어 보니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건물의 마감이 창문이 푹 들어간 형태여서 별로 소리가 크게 나지 않은 것뿐이었다. 다음 날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인도가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 비가 오면 물이 고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넷째 날 아침이 되니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 심해졌다. 오전에 스타벅스에 다녀올 때는 어차피 호텔 안쪽에 있는 통로를 통해 드나들었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했지만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가니 빗물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가 별로 듣기에 좋지 않았다. 다행히 바람이 전혀 불지 않고 비만 내렸기 때문에 길을 건너는 데에도 바지 밑단 말고는 젖는 곳은 없었다.
지형에 제법 경사가 있기에 걱정했지만 다행히 미끄럽거나 한 곳은 없었다. 겨울이 되면 돈이 많은 곳이니 인도에도 염화칼륨을 뿌려 주겠지 싶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쇠락하게 되면 걸어 다니기 힘든 곳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건너편에 버스에서 내린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인파에 합류하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오면 버스를 타고 다녀도 불편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 것은 몸을 이끌고 하는 것이니까. 서로 우산이 닫지 않게 조심해서 건너서 바로 보도블록을 보았다. 다행히 물이 고인 곳은 없었지만 차도를 향해 경사가 나 있었는데 그곳으로 물이 세차게 흐르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신발로 물을 막아 신발 안쪽으로 물이 넘치듯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이라도 물이 보이지 않는 곳을 디디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책 읽는 할아버지의 트럭이 나왔는데 오늘은 조수석 문이 닫혀 있어 실망했었지만 곧 운전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단, 비가 오는 날은 하늘이 흐려서 어두운데 책이 잘 읽힐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것도 여유가 있다면 무척 감상적인 일이다.
고가차도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는 몰라도 계속 어디선가 물이 튀어서 우산을 쓰고 걸었다. 반대로 교육이 끝나고 돌아올 때는 비가 약간 덜 내렸는데, 이 때는 우산을 쓰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뭔가 물이 넘쳐서 떨어지거나 하면서 튀는 곳이 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빗방울의 굵기는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양의 비가 와서 어떻게 돌아온 건지도 모르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간 가는 줄 모르듯이 얼마나 걸어온 줄도 모르는 상태로 어느새 숙소 앞이었다. 걸어 다니면 정신이 없다. 가방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똑같다.
오늘은 교육의 마지막 날 새벽이다. 잠이 오지 않아서 생각해 둔 것, 특히 왼쪽을 뒤로 접어(내가 책을 빌려주었다가 그런 모습을 보면 그냥 그 책 가지라고 해 버리는, 그리고 절대 그 사람과는 다시는 책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는 모습이다.) 집중해서 책을 읽던 할아버지가 인상 깊어서 꼭 쓰고 싶었기에 글을 써 보기로 했다.
모든 인상적인 것들은 기억 속에 쌓인다. 글로 쓰기도 하지만 기억처럼 생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중에 다시 기억이 나려면 글이 있어야 할 수도 있다. 아련하고 아름다운 것이 그것에 대한 글을 읽기 전에는 머릿속 어딘가 진흙 속에 묻혀서 죽을 때까지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글을 쓰는 것은 특권도 아니고 단순한 취미도 아닌, 내 기억들이 살아 숨쉬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기억뿐만 아니라 생각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까지 포함해 모든 생각들이 글로 남아있고 싶어 한다. 그것이 한 번이라도 다시 생기를 찾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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