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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l 11. 2024

어느 여름날 아침

더운 것 같은데 덥지 않은 느낌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덥지 않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느낌은 잠결에 덥다고 느껴졌지만 사실 따뜻하지도 않다. 보통 그럴 때는 에어컨을 틀기도 했는데 오늘은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끈적끈적한 바닥의 느낌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오자마자 제습기를 틀었다.
습도가 높으면 몸이 끈적끈적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는 피부가 이불에 닿는 곳이 더운 것처럼 착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더워서 땀이 나는 것과 습기가 많아서 끈적한 것을 잠결에는 구분할 방법이 없다. 그저 답답하다는 느낌만 머릿속에 건성으로 전달하고 말 테니까. 잠이 어느 정도 깨고 나면 그제야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고 제습기를 틀어서 습도를 내리게 된다.
제습기를 틀자 습도가 85%를 지시한다. 장마철이 아니고는 그보다 높은 숫자는 본 적이 없다. 분명 어제 잘 때는 날이 좋았던 것 같은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장마라고 하면 장마전선이 위로 올라오면서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장마전선이 몇 시간만에 오르내리니 날씨에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제습기를 틀었던 게 효과가 있었는지 삼십 분이 지나자 69%까지 떨어졌고, 그럼에도 공기 온도가 올라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름에는 장마철이 아니고서는 제습기를 잘 틀지 않는다. 제습기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 습도가 내려가더라도 공기가 너무 데워져서 답답하게 느껴질 염려가 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에어컨의 제습 기능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요즘 며칠은 에어컨 제습으로는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잠결에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데 바빠서 에어컨 제습 기능을 켜는 것도 제대로 된 결정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막상 제습기를 틀고 보니 올해는 혹시 열대야라고 느낄 때도 작년과는 다르게 제습기를 틀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해 보아야 다. 이론상 어떻다고 미리 알 수 있는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변수들을 지정하고 변수별 경험들을 이어 붙여 정확한 예측을 하려고 하는 것보다 직접 해보는 편이 쓸데없는 것을 계산하느라 버리는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 된다.
제습기가 웅웅 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어제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옛날,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문을 다시 열고 영업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헤밍웨이는 다른 사람이 인수해서 다시 열기 전의 그 가게를 다녔었나 보다. 파리시 위성사진을 출력해서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주말이면 내 머릿속에 있는 일정은 버스를 타고 서울역을 지나 시청 정류장에 내리는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하고 나면 뿌듯한, 약간 사치재 같은 느낌의 일정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여유 있게 걸어 시청역 1번 출구 앞 길을 건너 덕수궁에 간다. 덕수궁 대한문에서는 하루 두 번씩 수문장교대식을 하는데, 수문장교대식 자체는 오래된 행사이기 때문에 익숙해서 꼭 끝까지 봐야겠다거나 복식이 신기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각 단계를 나타내기 위해 힘껏 치는 큰 북소리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나서 세 번씩, 다섯 번씩 치는 그 소리를 듣고 나면 마치 그다음 주는 안 좋은 일이 전혀 없을 거라는 예언이라도 들은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것들을 보면서 마실 만한 커피를 파는 곳이 근처에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지 어울리는 커피찾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 더운 여름날이 아니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잘 마시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같은 날씨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행사를 끝까지 볼 필요는 없고 북소리만 한두 번 듣고 나면 바로 걸음을 옮겨서 서울시의회 건물을 지나 광화문 사거리, 교보문고를 향한다. 음료는 한두 모금 마시면서 수문장교대식 행사를 보다가 곧장 길을 걸으면서 마셔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보다는 스트로가 있는 시원한 음료가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마도 그 차이 때문에 시청에 갈 때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가 보다.
사실 그쪽으로 가면 정동극장을 지나 구세군교회가 있는 큰길로 가는 길에 있는 '일레그리아'가 커피를 마시기 좋은 곳이다. 여유로운 바깥 풍경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막상 다 마시고 나오면 어떤 목적지라도 멀어져 있어서 절망하게 되지만 입속에 남아있는 커피 향이 걷는 내내 그래도 잘 왔다고 격려하는 듯하다. 검은 팅커벨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보통은 해가 쨍쨍한 여름이나 습기 가득한 여름이나 비가 억수로 내리는 장마철의 여름은 그 긴 길을 걸어가는 것은 꺼리는 편이다. 봄이나 가을, 겨울에는 즐거운 발걸음이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어딜 가도 실내 공간만 찾는 법이다.
시청 앞에서 시작된 발걸음도 역시 실내를 향해 확실한 목적지를 두고 있다. 광화문 역 지하도 입구로 들어가면 몇 걸음 가지 않아 교보문고 향수 냄새가 난다. 그 향기를 따라가면 교보문고 입구가 있다. 들어가서 책을 구입할 때도 있지만 그대로 두어 바퀴 구경을 하고 그대로 나올 때도 있다. 북소리를 듣고 교보문고에 방문하는 것까지는 하나의 루틴이다. 책도 커피도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책을 손에 들어도, 빈손으로 나와도 하나의 루틴을 끝낸 발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길을 건너서 광화문 쪽으로 한참 걸어가면 버스 정류장들이 있다. 아까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다시 몸을 싣고 이제 나머지 오후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에 빠져 본다.
아직 주말이 되려면 이틀이나 남았다. 하지만 이미 생각만으로도 하나의 루틴을 끝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작하는 하루는 그 자체로도 삶을 풍요롭게 한다. 습기로 바닥이 끈적끈적하면서도 공기는 차가울 때, 제습기는 아침 여섯 시의 삭막한 도시 안의 집안을 마치 봄날 알프스에 있는 통나무집처럼, 실제 통나무집이라기보다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그런 통나무집처럼 쾌적하기 그지없는 여유를 준다. 그 안에서 내 머릿속은 눈으로 들어오는 문장들을 따라 파리 시내를, 혹은 한 번씩 멍하게 상념에 잠길 때는 서울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축지법을 쓴 듯, 확실히 걸어 다녔지만 목적지와 목적지 사이는 순식간에 바뀌는 것 같은 마법, 그것이 내 머릿속이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즐거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멜로디를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즐거운 아침이다. 오늘 하루 당연히 출근과 함께 판에 박힌 듯한 시간들이 이어지겠지만, 적어도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주말의 루틴을 무사히 완료하였으니, 이제는 다 맨손으로 맞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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