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을 아무리 돌려 보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 생물학적 반응이 없으면 그다음은 어쩔 수 없다. 계속해서 시간을 들여 집중해서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그렇다고 현미경에 한쪽 눈을 감고 반대쪽 눈만 처박고 있는 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컴퓨터에 스캔 명령을 내려놓고 나가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돌아오면 자동으로 샘플을 조금씩 옆으로 옮겨 가며 스캔한 것이 컴퓨터 폴더 안에 대용량 이미지 파일로 가득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오늘 오후부터는 65인치 화면에 그 사진들을 확대해서 띄워 놓고 거기에 찍힌 것들을 하나씩 대조해서 뭐가 뭔지 찾아내야 한다. 문제는 그 그림이 65인치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약 135번은 펼쳐야 하는 양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135페이지짜리 그림책을 펴고 모든 그림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누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샘플이 한꺼번에 스물몇 개가 들어왔기 때문에 다섯 명이 모두 매달려서 쉬지 않고 차례대로 해내야 하는 일이다. 최악의 경우 그 모든 샘플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결과가 빨리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테두리가 연두색으로 밝게 불이 들어온 은색 스테인리스 버튼을 누르자 연두색 테두리가 빨간색으로 바뀌며 웅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잠시 후 초점을 맞추는 위윙 소리가 나고 나면 알아서 스캔을 시작할 것이다. 스캔이라고 해 보았자 몇 마이크로미터 이동한 후 사진을 찍고 다시 몇 마이크로미터 이동한 후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이다. 눈이 매우 빠르다면 스캔하고 있을 때도 화면을 보면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뭔가를 발견한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처음 보는 것 같이 생긴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아도 결국 다시 보면 이미 알려진 종인데 옆으로 비스듬히 찍혀 있어서 잘못 본 것이던가 실제로 학계에 보고된 것이지만 나만 관심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쳐다보고 있으면 그렇게도 가려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내가 이 샘플을 온전히 혼자서만 분석해야 한다면 그런 방식의 관찰로 실시간으로 뭔가를 건져내는 것은 거의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탕비실로 나와서 원두커피를 종이컵에 따랐다. 싱크대에 내 전용 커피잔이 있지만 씻고 싶지 않다. 유난히 설거지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싱크대에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오늘은 왠지 늘어지기만 하는 날이다. 끈질기게 매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된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겠지, 이것도 일종의 실패이니까.
커피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에는 하얀 원통 모양의 유리 테이블이 있다. 커피잔을 올려놓고 유리테이블 아래에 놓인 캔을 열어 담뱃잎을 꺼낸다. 캔 옆에 있는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낸 후 거기에 담뱃잎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살살 눌러 넣고 캔을 닫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담배 캔을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고 그 옆의 라이터를 주워 들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입 안을 채우다가 이윽고 따스한 담배 연기가 들어온다. 다시 한번 불을 붙이고 이제야 입 안의 연기를 내뱉는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이 며칠 째인지 세어 보았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오늘이 44일째이다. 중동에서 좀비들이 생겨나고 있다. 샘플을 구하러 가던 사람들도, 근처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대사관에 있던 사람들도 소식이 끊겼다. 아니, 아예 끊긴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지역은 발전소도 모두 멈추었기 때문에 헬기에서 내려준 박스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전기도 없이 살아야 한다. 헬기에서 내려주는 박스에는 식량과 식수도 있지만 태양광 발전기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소식은 끊겼지만 대사관에 모여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들도 대문이 따로 있는 곳으로 대피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무사한 것 같다고 한다. 그렇지만 헬기에서 내려다 촬영한 모습만 몇 번 보았을 뿐 실제로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나 그들이 쓴 글은 읽어 보지 못했다.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다. 모습은 희미하게 볼 수 있지만 직접 접촉할 수는 없는.
희생정신 투철한 사람들이 좀비들의 혈액 샘플을 채취하다가 함께 감염되는 일이 자주 있고 나니, 아예 감염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설득해 정신을 잃기 전에 자신의 혈액을 뽑아내어 그 혈액 샘플만 건물 옥상에 올려두고 내려가면 몇 시간이 지나서 헬기를 타고 가서 옥상에서 샘플만 들고 가는 작전이 실행되었다. 그리고 그 작전을 실행한 부대원들은 샘플만 보내고 중동 사막에 만든 기지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머물게 했다. 신기하게도 도시 쪽만 좀비가 창궐했고 사막에서는 감염자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독일행 비행기로 좀비들이 다수 탈출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폭발적으로 감염이 일어나서 결국 승무원과 승객 전원이 감염된 채로 그냥 공항 한쪽에 방치만 하게 되었다. 비행기는 무사히 독일에 착륙은 했지만 조종사들이 이상하다는 신고를 해서 군인들이 출동을 했는데 피가 덕지덕지 묻은 창문 사이로 내부를 조사한 결과 좀비들만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조종사들이 창문을 부수고 탈출을 했지만 비행기가 있는 곳 주변을 벗어날 수 없었고 비행기 아래에 임시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게 한 다음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 군인들이 문을 열자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시체 썩는 냄새만 가득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시체로 무언가를 테스트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기에 다시 문만 닫고 방치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중동 외에도 지구상의 모든 민간 항공기의 운행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미친 듯이 석유값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석유를 생산하겠다고 했지만, 몇몇 나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미국은 원유보다는 정유 제품만 수출하고 싶어 했고 우리나라 정유사들은 원유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국제 선박의 운행은 그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다행히 목숨을 걸고 돌아다니는 유조선과 혹시 좀비로 변했을지 모를 사람들을 미리 헬기로 스캔한 후 석유단지에 원유를 공급하는 과정들 덕분에 우리나라는 큰 피해는 없었다.
이런 뉴스만 매일같이 시끄러웠는데 갑자기 연구소에서 비밀유지 각서가 내려왔다.
"무슨 새로운 연구를 하는 건가요? 공문은 보지 못했는데요?"
말싸움을 하다가도 자기가 틀렸다는 증거만 나오면 바로 사과하는 보현이 입을 열었다. 원래의 업무 범위에 있지 않은 일이라면 자신은 빠지겠다는 뜻이었다.
"나라를 구해야지. 여기에 서명을 한 사람들은 남아 있고 서명할 수 없다는 사람들은 당분간 집에서 쉬어야 해. 이건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챙겨주는 거야. 잘 읽어보면 알게 될 거야. 서명을 하게 되면 오늘 오후 세 시까지는 전달해야 하니까 점심때까지는 내 사무실로 가져오도록 해."
부장은 일방적으로 통보만 하고 자리를 떴다. 근무 조건은 연구실 안에서 숙식 해결. 잘 되면 후에 연봉의 500% 추가 지급, 사망 시 가족에게 연봉의 200% 추가 지급, 이런 내용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보라고 QR코드가 있었다. 아래에 깨알 같은 글씨로 오늘 오전 여섯 시부터 오후 열여섯 시까지 열 시간 동안 유효한 URL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럼 좀비라는 게 사실인 거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미현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반말로 말을 한다면 그건 나에게 한 말이다. 그녀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직급도 낮은 사람은 나뿐이니까.
"생각보다 많이 심각한 상황인가 봐요. 한 달이나 지나도 실제 감염된 건 못 봐서 긴가민가 하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링크에 있는 화면에는 뉴스에서 보여주지 않는, 실제 중동에서 찍은 좀비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좀비들은 옛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마구 달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 무척 어색하고 꼭두각시인형처럼 억지로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샘플은 그런 좀비들에게 주삿바늘을 꽂아서 피를 채취하는데 오래된 좀비에게서는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감염된 것이 확실한 사람에게서 뽑은 것이었다.
"그런데 좀비 감염되면 다들 눈물 콧물이 나나 봐."
미현이 또 한 마디를 했다.
"증상 같은 건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가 없으니 특정할 수 없어. 눈물 콧물이 많이 흐르는 것처럼 보여도 저걸 촬영하느라 가까이 내려간 헬기의 바람 때문인지 원래 그런지 알 수 없으니까. 나도 너희하고 아는 건 똑같은 상황이야. 아마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제일 많이 아는 걸지도 몰라.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승현이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혈액을 채취할 거면 저 눈물을 채취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니까."
"일단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가까이 갔다면 조금이라도 확실한 샘플을 채취하는 게 낫지 않을까? 눈물보다야 혈액이 낫겠지, 균을 채취하는 데에는."
나는 그대로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렸다. 중요한 건 이 샘플들을 분석하고 분석이 끝나도 혹시 모르니까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다. 그동안에도 월급은 꼬박꼬박 입금되고 있을 테니 크게 문제는 없지만 가족들을 보지 못한다는 건... 하지만 혹시 모를 위험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저는 일단 하겠다고 할게요. 딸 못 보는 건 아쉽긴 하지만 조금 더 노력해서 빨리 이런 게 끝나야 안심하고 키울 테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야. 안 그래도 고등학교 가고 나서는 대답도 제대로 안 하는 놈 이번 기회에 아빠 보고 싶은 게 뭔지 제대로 깨우치게 해 줘야겠다."
승현이 말했다. 승현은 선임연구원이다. 승진을 할 수도 있었지만 기술을 새로운 기계에 접목시키는 데에 실력도 있고 무엇보다 재미를 느껴서 남아 있는 사람이라 가장 든든하다. 승현은 남에게 나쁜 소리는 하지 않는다. 미현에게만 빼고.
"이런 건 고민할 생각을 충분히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갑자기 들이밀고 '하기 싫으면 나가 있어라'라고 하면 이건 누가 봐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특혜를 받는다는 거잖아요. 좋고 안 좋고를 판단할 근거도 부족한데 시간도 없으면..."
"넌 그냥 하지 마라. 그런 소리 듣는 것도 지겹다."
승현이 유일하게 신경질 부리고 짜증 부리고 잔소리하는 건 미현에게뿐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주까지 샘플이라는 것들을 조사해 왔다. 엄밀히 말하면 샘플이라기보다 샘플일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담배연기를 후욱 내쉬면서 첫 번째 샘플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핏자국이었지만 결국 샘플을 몇 번을 떠도 별다른 나오는 게 없었다. 그렇게 이 주를 허비하고 나서 드디어 제대로 된 혈액 샘플이 도착했다. 분류를 하고 몇 등분해서 나눈 후 드디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샘플이 되었다. 이런 샘플을 몇 개를 만들어서 시간이 허락한다면 연구원 스무 명이 모두 돌아가면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열다섯 명은 중동 외에서 오는, 아직 좀비 걱정이 없는 듯한 지역에서 들어온 비행기에서 무작위로 채취한 샘플을 매일같이 조사하고 있고, 다섯 명만 실제 중동의 샘플을 조사하는 중이다. 집에 가지 못하는 건 나머지 열다섯 명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뉴스는 내부망에 올라오는 내용만 읽을 수 있다. 외부와 통신은 불가능하다. 미현은 아마 뭔가 발견하게 되었을 때 먼저 알려져서 혼란을 야기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결국 우리를 믿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며 마구 화를 냈다. 그 와중에도 나머지 네 명은 뭔가 발견해 내는 것만이 여기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운다. 손에 든 커피는 다 마셨고, 담배는 어느새 불이 꺼졌다. 다시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파이프를 물고 숨을 크게 들이셔서 불을 켰다. 빈 속에 커피를 마셔서인가 약간 속이 쓰렸다. 마지막 한 모금을 피우고 재를 버린 다음 식사를 하러 일어났다. 기계 앞을 지나 문을 열고 나오면서 보니 이제 5% 정도 스캔이 끝났다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날 하루는 스캔만 하는 걸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스캔하는 동안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스캔 가능하다는 전체 크기로 통째로 스캔한 것이 처음이라 계속해서 뜨는 알람 메시지에 짜증이 솟구쳤다. 가로로 이미지가 스캔 사이즈를 조금 넘는 것 같은데 그대로 진행시키시겠습니까, 배율을 낮추시겠습니까, 초점이 맞지 않는데 스캔 포인트마다 초점을 다시 맞출까요, 같은 메시지가 거의 스캔마다 나타났다. 그냥 확인 버튼만 누르면 되는 것인데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굳이 그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샘플 상태도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스캔이라도 빨리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이상 내가 약자라서 결국 일일이 지켜보며 스캔을 끝냈다. 연구실에는 커피를 들고 들어오지 않는 것을 나름 원칙이라고 세워 놓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다음 주면 연구실에서 담배도 피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샘플 스캔을 마치고 샘플을 채취한 과정과, 해당 샘플을 채취하기로 결정한 이유, 그 전의 샘플들에 대한 비판 등이 적힌 보고서를 출력해서 방으로 가져왔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건물을 폐쇄하려는 듯, 숙소 건물은 원래 없었지만 정부에서 연구실 건물 1층에 칸막이를 새로 세워서 숙소를 만들었다. 그래도 나름 방마다 샤워실과 베란다, 커피포트는 갖추어져 있어서 장비를 쓸 일이 없다면 방에만 있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칸막이가 가건물용이어서 그런지 한쪽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다른 한쪽에서는 미현이 자위를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경험을 하고 나서는 웬만하면 열 시가 넘어서 들어가는 습관을 들였다. 오늘처럼 일찍 들어가는 일은 웬만큼 지쳐서는 잘 없는 일이었다.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커피포트를 들고 나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다시 들어가려다 손목이 뜨끔한 느낌이 들어 잠시 멈칫, 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미현이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 지훈 씨, 물 받아 가? 라면은 아닐 것 같은데, 지훈 씨 밤에 커피 마셔?"
"커피는 아니고 혹시 뭔가 읽어볼 게 많으면 홍차나 녹차는 마셔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잘 것 같네요."
"스캔 안 힘들었어? 오랜만에 눈으로 일할 생각 하니까 너무 괴롭다. 나는 머리로 일하는 스타일인데."
"네."
"아니, 그렇게 쌩한 반응 말고. 가족 보고 싶어서 그래?"
"아니요, 정말 스킨 때문에 사람 다 지쳐서요."
"그렇지. 그래서 나도 나가서 좀 걸으려고. 들어가."
"네, 쉬세요."
방에 들어와서 글을 읽어 보니 뭔가 하려고 하기는 했는데 결과는 나오지 않는, 무력한 게 뭔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의별 작전을 다 세웠지만 그렇게 채취한 샘플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시체를 통째로 샘플로 가져오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작전에 동원된 다섯 명이 모두 좀비가 되었다. 마지막 부분에 해당 헬기에서 모두 감염될 당시 찍힌 영상을 분석한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보고서 내용은 전에 알고 있던 부분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시작했다. 약 2개월 전, 처음으로 중동의 한 빈민가에서 보인 이상한 증상이 지역 병원으로 옮겨가면서 병원에서 관할하는 지역 전역으로 급속도로 퍼지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해당 병원이 관할하던 지역이 우리나라의 시 두세 개 정도의 크기여서 해당 지역들을 모두 출입금지 조치하고 도로를 모두 폐쇄했지만 뒷돈을 주고 탈출한 사람들이 좀비균을 옮기는 경우가 생기면서 그 나라는 수도부터 원유 생산지까지 모두 좀비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의사들이 철저하게 남긴 일지들이 온라인으로 접속이 되어 있는 덕분에 원격으로 열람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전기가 끊기기 전에 외국에서는 그 자료들을 모두 백업을 했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들로 방역 대책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지침에 따라 대대적인 방역 예방 대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우선, 도와 도 사이의 이동이 금지되었다. 서울은 구와 구 사이의 이동이 통제되었다. 시내버스는 모두 멈추었고, 지하철은 구간별로 몇 대씩을 두어 그 구간만 왔다 갔다 하도록 했다. 열차가 고장 나면 정비소로 가야 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장이 나면 한쪽 끝으로 치워두고 우선 남은 열차만 운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도 크게 필요가 없었던 것이, 사실 사람들은 지하철이고 버스고 공포감에 거의 이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자전거를 이용했다. 기름값이 폭등해서 자동차를 이용하지도 않았다. 지방 공기업에 있는 사람들은 이동금지 조치가 발효되기 전에 가족들을 모두 연고지나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샘플을 공유하며 원인을 밝히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지방에 있는 공기업이나 일반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 가족들을 이사 가도 록 했다는 점을 보고는 나는 내 경우에도 내가 관련된 일을 직접 맡아서 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져 따로 살게 되었다는 건 일반 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이나 나나 마찬가지라고 혼자 생각했다. 벌써 세 살이 된 딸은 카메라에 대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연구실 쪽에서 가족에 보내는 메시지는 뭔가를 숨기는 것을 막기 위해 텍스트로 된 메시지만 작성할 수 있었다. 영상을 가족들이 보내올 수는 있었지만 우리는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딸이 하는 말을 듣고 귀엽다고, 꼭 보고 싶다고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얼마나 진심이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보통 30cm 이상의 거리만 확보되면 전염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경우 호흡에 의한 전염은 없는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일부 보고에 따르면 숙주의 몸을 떠난 지 3시간 이내인 경우 숙주가 만지던 물건을 만져서 전염되는 경우는 매우 많으나 3시간이 지나면 그 물건을 만져도 전염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3시간은 절대시간이라기보다 숙주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상대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습도 등에 의해서도 많은 것이 결정될 것이다."
가면 갈수록 일반적인 전염병과 매우 달랐다. 열이 나는 건 맞지만 전염된다고 해서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바로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그랬다. 전염병이라기에는 너무 일찍 '정신이 죽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헬기에서 찍어서 보여주었던 영상이 생각났다. 보통 영화에서 보던 그런 좀비들, 하지만 다른 점이라고는 피 대신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시신경 쪽에 뭔가 남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침대에 누워서 뒤로 대충 넘기면서 읽던 자료를 다시 챙기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문서를 앞에서 뒤까지 샅샅이 뒤져서 원하는 부분을 찾아내었다.
똑똑. 응답이 없다. 하지만 뭔가 움직임이 느껴진다. 다시 똑똑. 똑똑. 이번에는 응답이 왔다. 자고 있지 않는구나. 나는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옆방에 '전미현'이라는 이름이 또렷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미현이 문을 열었다. 맨날 노처녀라고 놀려도 굽히지 않고 오늘도 헬로키티 잠옷을 입고 있다.
"선배, 이것 한번 봐줄래요? 승현 선배한테 가져갈 건데 먼저 한번 보시라고요."
"아니, 내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밤에 잠을 안 자고 조사를 해?"
"미현 선배가 먼저 봐주면 가져가려고요."
"샘플은 다 봤어?"
미현이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미현도 내일 하루 종일 스캔한 샘플을 들여다볼 생각에 답답한 것이 틀림없다.
"내일 봐야죠. 그런데 거기서 아무것도 안 나올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야?"
"잠깐 휴게실로 와주세요. 저도 볼펜하고 이것저것 들고 갈게요."
미현은 한숨을 푹 쉬더니
"알았어"
라고만 말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문서에서 스테이플러를 떼어 버리고 종이를 내가 찾은 부분만 가지고 중요한 순서대로 다시 정리했다. 이제 보고서 순서와는 관계없는 일이 되었다. 내가 발견한 것이 얼마나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맞는 이야기라면 우리가 하는 혈액 샘플 확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제대로 우리가 대비할 수 있는 해답이 될 샘플을 찾는 일은 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의외로 미현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공부를 하듯이 메모를 해 가면서 노트에 필기를 했다. 내가 밑줄 그은 부분에 번호까지 매겨 가며 설명하고 나자 미현이 말했다.
"세균이 아닐 수 있다, 세균도 영향이 있겠지만 좀비를 조종하는 건 세균이 아닐 거다, 이거지?"
"네. 그럼 이제까지 샘플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게 설명이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왜 아직도 아무도 몰랐을까? 이게 사실이라면 이미 다들 알고 있지 않을까?"
"좀비물이 너무 많았으니까 고정관념이 생겨서일 수도 있죠. 이제까지 실패한 실험은 모두 공유가 되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실험 자체가 없었잖아요."
"알았어. 얘기해 보자. 하지만 샘플 분석을 하면서 해야 하니까 점심을 먹고 나서 얘기해 볼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잘 자."
"네, 들어가세요."
미현은 방에 들어가면서도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렇지, 뭔가 이상하긴 하잖아. 좀비가 되는 벌레들을 보면 다른 벌레가 몸을 차지하고 들어가는데, 고작 세균이 사람의 뇌를 조종할 정도가 된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 작은 동물이라면 모를까.
다음 날은 하루 종일 샘플 분석만 했다. 어제 예상했듯이, 오후 세 시가 되자 결국 연구실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일종의 편의 시설로, 담배를 피우면 어느 정도 수준 이하의 연기인 경우 소방 경보가 울리는 대신 책상 위의 환풍기가 세게 돌았다. 물론, 실내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단지 책상의 '환풍기 아래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거의 벽만 한 스캔 그림을 40장 넘게 확인을 했으니 제법 소득은 있는 셈이었다. 3일 안에 끝내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점심도 15분 만에 다 먹어 버리고 바로 올라와서 계속 일을 했다. 담배를 책상에서 피우더라도 담뱃잎을 모두 실내로 가지고 들어오는 건 조금 께름칙했기 때문에 담배 캔은 아직 베란다에 있는 상태였다. 잠깐 나가서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다시 들어오는데 미현이 가운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대형 모니터 앞에 서 있었다.
"벌써 135매 중 34매? 제법 빠른데? 제대로 보고 있는 것 맞아? 그냥 막 넘기는데 컴퓨터가 버벅거려서 멈춰 있는 거 아니야?"
미현이 하나도 웃기지 않은 농담을 했다. 웃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안 웃겨요."
"알아. 안 웃긴데 웃으라고 괴롭히려고 말한 거야. 근데 이것도 재미없다."
오히려 재미없다고 인정해 버리니 웃겼다.
"왜 오셨어요? 다 끝냈어요?"
"아니."
"근데 이러고 있어도 돼요?"
"아마 우리 이거 그만하게 될 것 같아."
"네?"
내가 놀라며 묻자 미현이 갑자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요?"
"그렇게 똑똑해 보이지 않는데 이게 가장의 힘인가?"
"뭐가요?"
미현이 뭔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승현 선임 연구원께서 보고하러 들어가셨어."
"뭘요?"
"좀비균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
"혹시 제가 어제 말한 그거요?"
"맞아. 너무 그럴듯해서 만약에 네 말이 맞다면 어째서 전 세계 석학들이 아무도 몰랐는지에 대해서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다는데?"
"그래도 우리는 어차피 그쪽으로 맞는 샘플을 받게 될 거잖아요."
"그렇지. 우리는 더욱더 죽음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는 거야. 진짜 원인일 수 있는 것이 들어 있는 샘플이 오겠지."
"선배는 안 무서워요?"
"내가 뭐가 무서워? 야, 회사에서 비상사태라고 퇴근도 못하게 하는 와중에 다른 유부남 직원한테 숙소에서 자위하는 것도 걸렸는데 내가 더 무서울 게 뭐가 있냐?"
"아뇨, 그 얘기가 아니라... 저는 제가 못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그렇게 있다가 다 죽어 버리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요."
"야, 그냥 일이야, 일.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이니까 하는 거라고. 너무 그렇게 '나라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온몸을 던져~'이러는 것도 웃기지만, 공포를 이겨내고 어쩌고 하는 것도 웃긴 거야. 생각해 봐, 사람들은 안 무섭겠어? 나라에서 뭔가 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연구원들은 연락도 안 돼, 전 세계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는데 나오는 것도 없어. 어차피 다 죽을 수도 있는데 그냥 강도짓하고 그때까지만이라도 편하게 살자, 이러는 사람이 없겠어?"
"그건 그런데..."
"야, 잘 되면 돈 많이 준다잖아. 야, 나는 내가 잘못되면 '내가 받아야 했던 돈, 지훈 연구원에게 주겠습니다. 가족들에게 주는 2억 주지 말고 그냥 살아남은 연구원에게 5억 통으로 주세요."라고 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냥 할 일이니까 하다가 순직하는 거라고."
"대리님"
"왜? 갑자기 왜 그래?"
"술 드셨어요?"
"왜? 티나?"
"네... 그럼 오늘은 샘플 확인 그만하시는 거예요?"
"그래야지 뭐. 아까 승현 선배 만나서 얘기하는데 승현 선배 반응이 너무 극적이어서 사실 오늘 열두 페이지밖에 못했어. 그리고 승현 선배가 보고하러 갈 때 자료도 좀 수정해 줬고. 지훈 씨가 정리 잘해줘서 그래도 내일은 샘플 확인 계속할 수 있겠네. 아무것도 안 나올 거라는 건 알지만."
"근데, 벌레라고 해도 피에서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 승현 선배 얘기로는 아닐 것 같대. 승현 선배 말로는 좀비가 되면서 죽는 게 아닌 것 같다는 거야. 우리 생각대로 벌레라고 하면, 근육을 움직이는 건 뇌의 신호일 텐데, 그걸 정상적으로 하려면 피는 돌아야 할 것 같다는 거지. 근데 뇌를 벌레가 차지하고 있으니까 심장 박동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피부 쪽에서부터 썩는 곳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장이 멈추었다고 하면 수수께끼가 더 늘어날 테니까."
"근데 저는 눈물 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아마 눈 쪽으로 벌레가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거였거든요. 근데 눈물이 다들 그렇게 나는 건 이유가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대. 눈 쪽을 보면 눈물이 나는 개체도 있고 없는 개체도 있어서. 그런데 피부 쪽에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개체도 있는 걸로 봐서는 그냥 피부 반응일 수도 있대. 그러니까, 눈에서 나지만 눈물은 아닐 수 있다는 거지."
"일단 보고하러 들어가셨다고 하니까 이제 세계적으로 어떻게 공유되는가가 문제겠네요."
"응. 그건 기다려 봐야지. 우린 우리 할 일이나 열심히 하자."
"네..."
"그럼 갈게. 저녁 맛있게 먹고, 이번 샘플 확인 끝나면 너네 가족사진이나 같이 보자."
"그러게요. 이제 말을 할 줄 아니까 곧 이모 찾을지도 모르는데."
"어휴... 귀엽겠다..."
미현은 눈을 찡그리며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지은 후 문을 닫고 나갔다. 아마 미현도 담배를 피우겠지. 미현은 내가 알고 있는 못된 버릇이라고는 죄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를 떠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주 로또를 만 원씩 사야 하는 것, 보고서를 쓸 때는 펜 세 자루를 책상 끝에 나란히 두어야 하는 강박증, 술 마실 때 폭음을 하고 다음날 오전에 쉬어야 하는 것 등. 그렇지만 회식도 없고 야유회도 없는 지금의 연구실에서는 의외로 윤활유의 역할을 잘해주는 것 같아서 든든했다.
다음날은, 조금 더 많은 샘플 그림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부장의 호출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실, 호출이 와도 특별한 것을 하는 건 아니었다. 가 보면 승현이 설명을 다 끝낸 상태였고, 나는 단지 '이 친구가 발견한 겁니다'의 자료사진 같은 존재였다. 승현은 별다른 표정 변화도,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없었다. 그냥 피로에 지친 연구원일 뿐이었다. 우리에게는 지금의 질병이 사라질 때까지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주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솔직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연구원이 없었기에 평일에도 뭔가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실적이라는 건 연구소에 처박아 두면 뭔가 나오게 되어 있는, 일종의 기계의 출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말에도 날짜 개념이 없는 요즘 같은 때에는 그냥 하던 대로 샘플을 분석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주말이라도 나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나 워라밸이 중요하지, 쉬어도 평일 저녁이나 마찬가지라면,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좀비가 양산되는데 우리나라도 언제 하나가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주말은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이번 주말에는 샘플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내가 맡았던 샘플은 다 끝냈다. 다만, 그 뒤로도 샘플들이 계속 이어져 있기 때문에 스캔이라도 미리 하면 좋겠지만, 정말로 시간이 없어서 스캔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전 일곱 시부터 승연의 연구실로 불려 가서 새로운 보고서들을 분석했다.
"이게 다 뭐예요?"
처음 보는 보고서인데 날짜가 한두 달도 더 된 것들이라 이걸 왜 나는 못 봤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승현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건 선임 연구원까지만 읽을 수 있는 보고서야."
"아니, 정치권은 이해가 가는데 연구소 안에서도 그런 게 분류가 되어 있어요?"
내가 짜증을 내면서 묻자 승현 선배가 말했다.
"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너도 이런 자료 없어도 다 아이디어 냈잖아. 이건, 그전에 우리가 출퇴근할 수 있었을 때의 기준으로 분류된 거야. 지금은 의미가 없지만. 그런데 내가 봐도 딱히 읽는다고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안 보여준 거야."
"그런데 지금은 왜 보여주세요?"
갑자기 승현이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지훈아. 잘 들어."
"네...."
"이제부터 우리는 처음 샘플 분석을 시작했을 때처럼 진지해야 돼. 정말 여기서 우리가 인류를 구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그 방법을 찾았어."
"뭔데요..."
"지시 내려왔다."
"지시요?"
"대통령실. 그리고 이게 유엔에도 공유한 거래."
"네."
"근데 네가 하겠다고 하면 알려줄게. 하기 싫다고 하면 발 뺄 수 있어. 대신한다고 하면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니 이름이 올라가느냐 마느냐라서 그래. 열람권도 그래서 공유하는 거고."
"어차피 안 한다고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러면 여기 서명해."
승현이 가리킨 곳에는 비밀유지각서가 펼쳐져 있었다. 애초에 한 번 쓴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쪽에 그전에 썼던 것과 다른 부분이 눈에 띄었다. 단지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로 추진하는 것이 틀린 것으로 판명된 때에는 샘플을 확보하지 않고 포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부분이 생겼네요."
"그 부분은 내가 추가했어. 우리 일이 훨씬 어려워질 거라서."
나는 가볍게 서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설명해 주세요. 지시 사항이 뭐예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샘플이 뭔지 알아내야 돼. 그래야 확보하지."
그날부터 우리는 일주일 동안 격한 토론을 이어갔다. 어떤 샘플을 얻어야 벌레가 붙어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샘플은 확보하면서도 그 벌레에 감염되지 않을 것인가.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은 줄 알았던 벌레가 사실은 살아 있는 경우일 것이다. 물이 없어서 죽은 것처럼 보이던 것이 물에 넣자 달아난 이야기는 한두 번 들어본 것이 아니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걸로 봐서 눈물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눈물샘을 자극하는 놈이 눈물샘 안에 있다가 눈물과 함께 배출된다는 보장이 있어? 벌레라면 눈물샘 밖에서 자극할 가능성이 더 크지."
"그냥 시체를 다 가져오라고 할까요?"
"그럴 거면 샘플을 가지고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는 게 인류 차원에서는 덜 위험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벌레라고 가정을 하더라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숙주 없이 얼마나 사는지도 모르고 숙주를 어떻게 조종하는지도 모르며 어떻게 전염되는지도 솔직히 모른다. 그렇지만 해당 개체만 있다면 실험을 통해 성질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3일이 지나면 살아 있는 건 없다고 했죠?"
"살아 있는 게 없는 게 아니고, 전염이 안 된다는 거지."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아요. 좀비 중에 움직이지 않는 것의 샘플을 채취하는 건 어떨까요?"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신체의 근육이나 심장이 기능하지 않는다는 거지 벌레들이 죽었다는 뜻이 아니야."
"우선 로봇을 보내 보죠."
"로봇?"
"사람처럼 움직이면 달려들 텐데 먼저 그렇게 해서 샘플을 확보한 다음 분석하는 거죠. 실험을 모두 그 로봇을 통해 원격으로 진행하면 우리가 가는 것과 똑같지 않겠어요?"
"잘 들어. 우리는 우리가 확보해야 할 샘플의 정보를 먼저 줘야 돼. 그러고 나서 그 샘플을 어떻게 확보할 거냐고 하면 그때는 로봇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말할 수 있어. 정확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석을 해야 하는 샘플이 뭔지를 생각해야 돼."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로봇으로 들여다보아야 어떻게 생긴 것인지부터 알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말했다.
"세균이라면 그게 가능하겠지만, 벌레라면 실제로 로봇으로 분석해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보는 것 자체가 혈액 같은 것으로 불가능하다면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을 또렷한 목적도 없이 할 수는 없어."
"목표가 그거죠. 벌레를, 우리의 적을 실제로 두 눈으로 보는 것."
"그러니까 네 생각은 그렇다는 거지?"
"그렇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들은 위험을 피해서 돌아가려는 것밖에는 안 될 거예요."
"알겠어. 내일 그렇게 보고할게. 나도 동의한다."
그러고 나서 3개월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위험한 샘플이 더 이상 우리나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시로 정부 인사들이 연구소에 방문했고, 우리도 한두 번은 집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전망도 해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3개월 동안 로봇을 이용한 실험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뭔가 성과가 있었던 날은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했고 그럴 때면 나는 구석에서 '발견한 자'의 여유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입에 털어 넣곤 했다.
로봇은 기능에 따라 여러 종류가 투입되었다. 먼저 좀비의 팔을 잘라 내는 로봇이 있었다. 이 로봇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드론이 좀비 구역에 내려주면 줄에 매단 채로 좀비 하나의 팔을 자르고 그 팔을 잡은 채로 줄이 당겨져 하늘을 날아 기지로 이동했다. 그 기지는 사람은 출입하지 않는, 온전히 드론으로만 출입 가능한 로봇의 기지로, 사람이 상주하지 않아서 좀비 팔로 인해 감염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기지라고는 하지만 따로 건물을 만든 건 아니고 단순히 좀비 구역의 한 빌딩의 옥상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쪽에서 필요한 기계 등을 드론으로 옮기는 편리성만 고려한 곳이어서 그곳까지 좀비의 팔을 가져다 놓는 문제만 해결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화상 신호를 통신으로 전송하는 확대경이 설치되어 있어서 그 위에 팔을 올려놓으면 연구실에서 얼마든지 확대해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포인트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일이 직접 초점을 이동시키며 확인해야 했다. 조이스틱으로 방향을 조절하고 멈추면 그 지점에 맞추어 자동으로 초점이 맞는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서 이틀 후 프로그램이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서 수동으로 신호를 주면 그곳에서 움직여 초점이 맞는 과정이 반복되는데, 우리가 신호를 주는 과정을 약 5초 간격으로 진행하면서 초점이 맞으면 그 화면을 자동으로 캡처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스캔을 하는 데에도 6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직접 실시간으로 확대경을 움직이면서 확인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스캔한 것을 초점이 맞는 부분끼리만 이어 붙인 사진을 확대해서 이동하면서 확인하는 방식이 우리에게는 익숙한 작업이어서 훨씬 유리했다.
우리는 그림을 다섯 등분하고 또다시 분석에 들어갔다. 혈액이 아니라 피부에 있는, 혹은 로봇 팔에서도 처음 보는 게 있으면 찾아내는 게 임무였다. 예상 시간은 약 48시간, 하루종일 붙어도 3일은 걸리는 양이었다. 다섯 명이 다시 파이팅을 외치고 나서 승현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야, 이거 찾으면 노벨상이다. 물론 그 벌레일지도 모르는 걸 찾는 게 아니라 그걸 찾아서 박멸하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까지 가야겠지만. 그래도 실체만 확인이 되면 박멸은 전 세계적으로 달려들 수 있을 거니까 최대한 빨리 해보자."
"지금은 이걸 우리만 하는 건가요?"
"맞아. 미국에서 장비를 빌려주기는 했지만 아직 확인이 안 된 거기 때문에 우리 쪽 인력을 투입해 달라고 했어. 물론 장비를 빌려주는 것조차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하는 거지. 우리가 보기에는 확실하지만 우리 쪽 나머지 세 조처럼 현장 방역에 시달리는 걸 함께 봐야 하는 방역당국 입장에서 이제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기는 부담스럽겠지."
"사진 파일 다 받았어요?"
미현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파일은 공유 폴더에 그냥 올라가 있다. 딱히 작업을 시작할 때 본다고 해서 안된다는 법은 없는데 갑자기 미현이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현우 씨는 남들 다 착수하고 저녁 시간 돼서 가져갔던데, 남들 일할 때 노는 거예요?"
"아니요... 그때는 따로 봐야 할 게 있어서..."
"이걸 보려고 우리가 못 나가고 있는 거잖아요. 다른 걸 볼 거면 이 팀에 들어오질 말았어야죠. 한 팀이라고 해 놓고 혼자 놀고 있으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아까 파일 올라간 거 받았어요?"
"아니요, 이제 가면 받으려고요."
"이게 한두 번이야?"
갑자기 미현이 소리를 빽 질렀다.
"너, 내가 그렇게 얍삽하게 살다가 한 번만 걸려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러고 있어? 너 어제 밖에서 영화 틀어놓은 소리 다 들린 거 모르지? 저 새끼가 죽으려고!"
"미현 대리, 잠깐 있어봐. 그래도 연구원이잖아."
승현이 당황해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현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현의 고함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걸리니까 죄송하냐? 지난 분기 보고서에 니 이름 나중에 얍삽하게 넣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지? 작업만 있으면 무슨 일 생겼다고 빠져나가고 다음날 와서 편하게 들여다보기만 하던 새끼가, 누굴 바보로 알아?"
"죄송합니다."
"저 새끼가 관찰한 거 전 못 믿어요. 틀림없이 아무것도 안 나왔다고 할 거예요. 어차피 발견할 게 있으면 나머지 네 명이 발견해 낼 거니까."
"정말 그래?"
승현이 현우에게 물었다. 현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니 이름 다 빼버리고 나중에도 여기서 희생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세금만 축내고 있었다고 해도 할 말 없어?"
현우가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는 위험한 세균을 다루게 되어 있던 시설이라서 카메라에 녹음도 모두 되고 있어. 나중에 그런 얘기 없었는데 해결되니까 몰아세우는 거다, 이런 소리 하지 말고 지금 얘기해. 정말 그렇게 빠져나간 게 고의였어? 그리고 중요한 게, 미현 대리가 말한 게 사실이야? 그때 보고서는 네가 막판에 빠지는 바람에 미현 대리가 억지로 정식이 데리고 가서 급하게 마무리한 거잖아. 근데도 이름을 올렸어?"
"죄송합니다."
"변수가 생겼네."
승현은 잠시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 우리 네 명이 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최현우 씨는 여기서 접근 금지 처분이 내려질 거야. 숙소는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연구실은 출입할 수 없어. 그리고 일체 어떤 공도 인정되지 않고, 연구실 시설에서 숙식을 해결한 데 대해 금액이 청구될 수도 있어. 동의해?"
"..."
"일단, 지난번에 혈액 샘플 분석할 때 남들보다 하루 늦게 시작한 거 사실이야?"
"네."
"됐어, 나도 지친다. 이따가 부장님이 부르면 가서 얘기해. 여기선 죄송하다는 말 말고는 한 마디도 안 해 놓고 거기 가서 진실게임 만들려고 하면 넌 나한테도 죽을 줄 알아."
"네..."
"그럼 그림은 다시 네 개로 나눈다. 그러면, 4일은 걸리겠네. 그래도 뭔가 빨리 발견하면 빨리 끝날 거니까 시작하자."
그렇게 해서 3일에 걸쳐서 미생물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벌레가 피부에 붙어 있는 것을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원래 4일이나 5일이나 걸릴 줄 알았지만 3일 만에 끝났기에 3일 후에는 잠시 쉴 수 있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정식이 들어왔다. 정식도 직급은 대리이지만 나이가 미현보다도 많았다. 다른 곳에 있다가 왔다고 하는데, 본인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연봉이 줄어도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해서 먹여 살릴 사람이 있는, 그래서 보람이나 인류애보다 돈이 먼저인 건 승현과 나뿐이다.
"선배는 즐거워요?"
보람 있는 일이니까 즐겁지 않을까 싶어서, 비꼬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 없이 물었다.
"뭐가? 뭐가 갑자기 즐거워? 나 히키코모리냐고? 갇혀 있으니까 좋냐는 거냐?"
정식이 담뱃잎을 집어 들고 다 흘리면서 물었다. 정식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것은 좋아하게 되었다. 다 내 탓이다. 내가 피우는 걸 보여주는 바람에. 그래도 내가 베란다에 있는데 마침 본인도 한가한 그런 드문 기회가 아니면 피우지 않아서인가 아직 중독 증세는 없다. 내가 연구실 안에서 피울 때는 옆에 오지 않는 걸 보면. 하긴, 아직 본인 돈으로 담배를 피우기엔 아까울 때긴 하지.
"그게 아니라, 저는 애 걱정도 있고 와이프 걱정도 있어서 일도 일이지만 끝나고 받을 돈 때문에 하겠다고 한 것도 크거든요. 근데 결혼 안 한 사람들은 그래도 보람 같은 것으로도 위로할 수 있잖아요."
"웃기시네. 딸린 가족이 없으면 고아냐? 나도 부모님 있고 다 있어. 보람이 있는 건 그래도 맞지만 그렇다고 돈이 필요 없는 건 아니잖아. 난 여기 그만둘 거야."
"네?"
"5억 벌고 퇴직금 받고, 그동안 모아놓은 거 있고 하니까 시골 부모님 집에 가서 그냥 재산이나 축내면서 살려고."
"안될 텐데..."
"뭐가? 나 못 그만둔다고?"
"아니요, 부모님 집에서 재산 축내고 사는 거요."
"뭐가? 또 뭐가 문제야?"
"하루에 세 번씩 결혼하라고 하실 텐데..."
"... 그렇네..."
"그리고 시골 내려가면 매일 담배 피우는 거 아니에요? 서울 가서 색시는 안 만들고 담배만 달고 왔다고 잔소리하시겠네요."
"야, 그만해."
"불 꺼졌어요."
"그래."
정식이 다시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고 쏘시개를 건넸다. 공기가 잘 안 통하는 것 같아서. 잠시 후 정식이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야, 이거 끝나면 파이프도 돌려줄게."
"지금 불 피운 거요?"
"아니 좀비사태. 이번 좀비 사태 끝나면 담배 파이프 돌려준다고."
"아니 남이 피던 파이프를 내가 왜 받아요? 새로 사서 줘요. 퇴직금도 받는다면서."
"알았다, 알았어. 쉬는 시간에만 깎아도 끝날 때쯤 새 걸로 만들어서 줄 수 있겠다."
"오, 직접 만들어 주시게요? 일회용이나 되면 다행일 것 같은데. 어쨌든 멋있네요, 파이프 깎는 노인."
"응, 그래서 옻나무 찾아보려고."
"우웩!"
이번에 벌레의 모습을 발견한 것도 나였다. 특별한 건 아니고 무슨 모양이든 보이기만 하면 모두 폴더에 캡처해서 넣어 두고 그 폴더는 미리 보기로 내용을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그렇게 벌레 사진이 수백 개가 쌓이니 그중에서 모양이 이상한 벌레가 눈에 확 띄는 것이었다. 사실, 그림을 보면서 벌레 모양만 보이면 캡처하는 건 거의 단순 반복이면서 기계적인 작업이다. 왼손에 파이프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조이스틱을 만지다가 뭔가 보이면 마우스로 네모칸을 치고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한다. 파일 이름은 크게 상관이 없기에 그냥 첫 번째 사진 이름을 클릭하고 확인을 누르면 덮어쓸 거냐고 물어보는데 그때 아니라고 한 다음 다시 저장을 하면 알아서 첫 번째 사진 이름 뒤에 번호를 매겨서 저장을 해 준다. 이런 방식으로 하니 실제로도 상당히 진도가 빨랐다. 그렇게 해 놓은 다음 폴더만 복사해서 방에 가서 모양들이 일상적으로 도감에 나오는 벌레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건 어차피 계속 나오니 컴퓨터에서 다 지워 버리고(어차피 원본은 연구실에 따로 있으니까) 나머지에 대해서만 인트라넷의 도감을 뒤져서 무슨 벌레인지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긴 몇 개가 알고 보니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각도만 다른 상태에서 찍힌 것이었다.
내가 찾은 것은 배 부분에 별 모양의 이상한, 시냅스처럼 보이면서도 더듬이 같기도 한 것이 붙어 있는 투명한 벌레였다. 사진으로만 보아서는 투명한 건지 사람의 피부색과 비슷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걸 확인할 방법은 우리가 가져온 좀비의 피부색과 다른 곳 위에 있는 벌레를 찾는 것이었다.
다음 날, 호출 버튼을 눌러서 네 명이 모두 모였다.
"벌레 찾은 거 아니면 머리 박아라."
미현이 노려보며 말했다.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은 것 같은데 억울할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죄송하지만, 찾은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회의실 컴퓨터로 내가 공유해 놓은 폴더를 띄웠다.
"보시면, 우리가 아는 벌레들 모양은 다 있는데, 이게 좀 이상해요."
내가 발견한 벌레를 띄우자 바로 사람들도 그게 투명한 건지 피부색과 비슷한 건지 물었다.
"저도 웬만하면 확실한 걸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걸 찾는 게 우선일 것 같아서 오늘 모이자고 했어요."
"벌레 색깔?"
"네."
"그걸 무슨 수로 찾지?"
승현이 다시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피부 말고 상처나 로봇 표면에 저 벌레가 있는지 찾아보자. 자기가 맡은 구역 전체 사진 말고 그런, 피부와 다른 표면만 확인하는 거야. 보아야 할 범위가 줄었네."
그날 저녁, 벌레는 약간 검은색이며, 겉은 흐물흐물해서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바로 돌아오지 못하면 죽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나는 이 순간이 모든 반격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중동부터 시작해서 새하얀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벌레를 빨리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밖에서 하얀 옷을 입지 않으면 린치를 당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뉴스를 선별해서 보여주는 보안 부서에서도 웬만하면 연구와 관계없는 뉴스도 그냥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긴장이 풀리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좀비에 의한 피해 자체보다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빨리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압박을 더 심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우는 아직도 자기 방에 처박혀 있다. 가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 보면 창문을 열어 놓고 영화를 보는 소리가 들렸다. 남들 다 바쁜 시기에 혼자 노는 데도 참 마음이 편한가 보네, 하고 생각했다.
벌레를 발견하고 나서 2개월 동안 실험의 연속이었다. 중동의 로봇기지에 샘플이 도착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연구실에서 원격으로 실험을 했다. 그렇지만 변인이 많아서 몇 번이고 반복해야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실험 하나에만 4일이 걸리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 실험은 물속에서 얼마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희한하게 물속에서는 바로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증상으로 보면 배 쪽의 시냅스 모양으로 된 세포가 터져 죽는 것 같았는데, 단세포 생물도 아닌데 그럴 수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몸속에서는 살아남으니까 혹시나 해서 식염수에 담갔더니 일주일이 지나도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다음에는 식염수의 온도를 올려 보았더니 60도 정도가 되자 움직임이 멈추었다. 일반 단백질이라면 사람처럼 40도가 넘으면 멈추어야 하는데 60도까지 살아 있었다. 말이 되지 않아서 이것도 일주일 동안 식염수통에 보관한 샘플을 스무 개나 희생하겠다는 생각으로 실험해 보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58도까지 올라간 두 마리뿐이었다. 몸속에 한 번 들어오면 단순히 체온을 올려서는 죽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말이 안 되잖아. 숙주가 죽을 때까지 절대 죽지 않는 기생충? 얘네는 정도가 없어?"
승현이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도 몇 번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면서 실험에 참여하다 보니 마음이 다 지쳐 있었다. 위에서는 나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오면 나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나에게는 인터뷰에 절대 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면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하는 건 내 몫이었다. 나 역시 인터뷰를 한다고 해도 딱히 대답할 수 있는 게 없기는 했지만.
해답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막상 해답을 알고 보니 애초에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게 이상한 그런 지점이었다. 마치 처음에 좀비균이 아니라 좀비충이 있을 거라는 아이디어를 냈을 때처럼. 우리는 그 벌레의 성분을 알아보야겠다고 신청을 했고, 원심분리기나 그 밖의 장비들은 로봇 기지로 옮길 만큼 작지 않기 때문에 벌레를 옮겨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허가가 날 리가 전혀 없었다. 그때 미현이 말했다.
"좀비들이 모두 열이 나지?"
"네."
"그리고 3일 정도 있으면 좀비들이 멈추잖아. 그런데도 전염은 됐지?"
"네. 그게 왜요?"
"그냥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지금 확대경 말고 그냥 카메라 연결 돼있어?"
아마 미현은 로봇 기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확인해 보니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네. 연결은 돼 있고 켜기만 하면 바로 볼 수 있네요."
"다행이다. 아직 배터리가 동작하나 보네."
"카메라 켤까요?"
"응. 한 번 보자."
카메라를 켜자 미현이 바로 카메라를 한 바퀴 돌렸다. 그러다가 찾던 것을 찾았다는 듯 확대하기 시작했다. 벌레를 넣은 식염수 통이었다.
"지금 저기 기온 몇이야?"
"25도네요."
"식염수 온도 찍어봐"
"25도예요."
미현은 식염수 통을 더 확대해서 벌레를 찾아내었다. 움직임이 없었다.
"이렇게 해 놓고 아침에 해 뜨면 한 번 보자."
밤이 되자 네 명은 다시 연구실에 모였다. 승현이 카메라를 켰고 모두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현장 온도가 3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두 숨죽이고 벌레의 움직임만 쳐다보고 있었다. 온도계가 37도 가까이 올라오자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달은 슬픔 속에서 우울하게 지나갔다. 계속해서 식염수에 대고 실험을 해내면서 해결책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발견하는 것을 곧바로 학회에 보고했다. 해당 사진과 보고서들은 즉각적으로 전 세계 연구소에서 새로운 대책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지만, 모두 방역 자체에만 해도 피로도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였다. 더욱이 로봇과 그 밖의 장비들은 미국에서 자신들의 장비가 공공재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빌려준 건 아니었기에 우리에게 권한을 다른 곳에 공유하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했다. 그야말로 시간을 쪼개서라도 우리가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압박 그 자체였다. 그런 와중에 우리에게 전달되는 뉴스가 갑자기 확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은 모든 뉴스를 다 보지 않고 그중에서도 끌리는 것만 보고 넘기곤 했다. 웬만한 뉴스는 필터링하지 않고 다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뉴스가 다 합쳐도 열 건 남짓한 것만 넘어오고 있었다. 미현에게 물어보아도, 승현에게 물어보아도 모두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혹시 뭔가 아는 게 있을까 싶어 정식에게 물어보았지만 정식은
"난 원래 뉴스를 안 봐서...."
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장이 모두를 회의실로 불렀다. 승현도 미팅을 전달하면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네 명이 모두 회의실에 모이자 부장은 말없이 뉴스를 틀었다. 중동에서 좀비 소탕 작전에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자료화면에는 도시 외곽에서부터 군인들이 도시를 둘러싸고 좀비들을 보이는 대로 소각하는 장면이 보였다. 좀비들은 불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을 향해 달려든 건지 군인들을 향해 달려든 건지 모르겠지만 전혀 뜨거운 걸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리의 힘줄 부분까지 녹아내리고 나서야 주저앉았다. 그때, 미현이 외쳤다.
"잠깐 멈춰보세요!"
부장이 마우스를 클릭해서 화면을 멈췄다. 미현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부장님, 다 보면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잖아요. 처음에 지훈 주임이 벌레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했던 건데, 우리는 처음에 감염되었을 때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의외인데요?"
부장도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기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군, 역시 여기 팀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팀이야. 눈썰미들이 아주 좋구먼."
"그런데 지금 이 뉴스들은 지금까지 왜 막혀 있던 겁니까?"
승현이 물었다. 항의의 뜻은 없이, 단지 궁금해서, 이게 왜 감출 거리냐는 말투였다.
"혹시 어떤 결과가 있을지 몰라서 작전이 끝날 때까지 일단 비밀로 한 거지."
"어떤 결과요?"
"시체가 좀비가 되고 나니 불에도 타지 않는다던지, 아무튼 모두 처음 보는 경우이니까. 최악의 경우 자극을 해서 날개 달린 놈들이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공상과학영화 같은 소리이지만 이 사태 자체가 그렇잖아."
"그래서, 지금 공유하는 건요?"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들 중에 감염자가 나왔네."
하지만 그건 슬픈 일이 아니었다. 감염자는 계속 같은 곳에 있으면 나타날 수 있다. 벌레가 천장 벽으로 숨었다가 지나가는 군인을 보고 달려들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처럼 좀비에게 물리지만 않으면 되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었다는 것은 두 주가 지나서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에서나 알게 되었다.
며칠에 걸친 실험 끝에 온도를 서너 번만 36도 정도에서 40도 정도로 왔다 갔다 해도 벌레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두 번으로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정도이지만 횟수가 반복되면 벌레가 죽는 것이었다. 게다가 벌레는 알을 낳지 않고 몸이 나뉘는 방식으로 번식했기 때문에 죽더라도 나중에 다시 알이 깨어나면서 똑같은 상태가 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말이 맞다면, 좀비 벌레가 몸속에 들어왔다고 해도 습관적으로 냉탕과 온탕을 드나들기만 하면 몸속에 들어온 벌레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좀비 역시 그렇게 해서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학회에 제안을 했다. 좀비를 잡아서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장치에 넣고 벌레를 죽여 보자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좀비가 움직임을 멈추더라도 벌레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벌레만 죽고 나서 좀비가 보이는 특별한 상태가 있다면 그런 지역에 군인들이 들어갈 때도 참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좀비 소각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을 함께 소각해야 했던 것을 본 정부 기관들이 적극 찬성했다.
좀비 자체에 대한 관찰 결과는 매우 많았다. 평균 체온 38도에서 40도, 열은 계속 몸 어딘가에 벌레가 염증을 일으켜서 내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뇌 어딘가에 들어간 벌레가 몸을 조종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움직임이 없는 좀비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아 신체 기능이 떨어지면서 발생하는 것이 많았지만 일부는 염증 때문에 열이 너무 높아져서 숙주의 뇌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신체 조절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모두 옆에서 관찰한 결과일 뿐, 좀비의 신체에 뭔가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드론이 좀비로 가득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는, 건강해 보이고 살도 아직 많아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오래 살아 있을 것 같은 좀비 여섯 마리를 골라 들어 올렸다. 좀비는 의외로 양쪽 팔을 잡고 올라가는데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그리고 태닝 기계 같이 생긴 곳에 넣고 잠가 버렸다. 기계 안에 가두자 그제야 안에서 좀비는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안으로 영하 15도의 찬 공기가 불어넣어 졌다. 좀비는 계속해서 발길질을 하다가 이윽고 동작이 멈추었다. 공기가 멈춰지고 체온이 실질적으로 떨어질 때까지 약 5분간 더 영하 15도의 공기를 불어넣었다. 여섯 마리 모두 거의 동시에 멈춘 것으로 보아 모두 체온이 비슷하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공기를 더 이상 넣지 않고 방치하자 체온이 다시 급격히 올랐다. 염증 반응 때문에 몸은 열을 계속 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섯 마리가 동시에 발길질을 하기 시작하자 또다시 공기를 불어넣었다. 이런 과정을 열 번을 반복하자 한 마리는 온도가 올라가도 더 이상 발길질을 하지 않았다. 눈도 다시 뜨지 않았다. 체온은 높았지만, 관찰해 보면 그냥 아픈 사람일 뿐이었다. 열다섯 번을 했을 때, 여섯 마리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좀비가 모두 활동을 멈추었다. 벌레가 죽은 것이다.
실험이 끝나고 좀비를 다시 있던 곳에 돌려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어차피 벌레가 기지에 왔으니 여기서 소각을 하자는 의견이 이어졌다. 소각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화염방사기를 갖다 놓고 옥상 끝에 좀비들을 놓고 원격으로 화염방사기를 동작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혹시 좀비들이 일어나 장비들을 부수면 안 되기에 다른 옥상에 나란히 뉘어 두었다.
슬픈 일은 그때가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군이 화염방사기를 설치하기 위해 화염방사기 받침대를 실은 드론을 좀비들을 뉘어 둔 옥상으로 보냈다. 그런데 드론을 조종하던 군인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좀비들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려가고 싶어 하는 건지, 아래에 있는 좀비들을 두려워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여섯 마리의 좀비들이 드론의 소리를 듣고 올려다 보고는 살려달라는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좀비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던 병사는 상관에게 보고를 했고, 학회를 통해 우리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몇 개월 간의 싸움이 끝났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일어났던 일들은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알지 못하고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가슴 아파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을 선언하게 된 날, 우리 연구실이 해낸 일이 공을 인정받아 WHO의 사태 종결 선언은 우리 연구소 강당에서 열렸는데, 벌레가 제거된 그때의 좀비 여섯 명이 참석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그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우리는 그때,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심각하게 열이 나서 멍한 상태였지만, 그건 열 때문이었지,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눈으로 모두 보고 우리 귀로 모두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입도 마음대로 열 수 없었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알아서 일어나서 걸어 다녔습니다. 잠도 잘 수 없었고 생각은 하지만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눈도 감을 수 없었기 때문에 눈은 항상 아팠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상태를 말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 상태로 벌레는 우리 이웃의 몸에 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통은 우리만 당하고 벌레들은 신경 정보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레들은 우리 몸을 함부로 다루었고 고통에 우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플 때, 뜨거울 때, 그리고 억울할 때 눈물은 마음껏 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을 움직일 수 없기에 눈물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앞을 보아야 하는데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으면 벌레들은 우리의 손을 움직여 무엇이든 집어 들어 눈을 닦으려고 했습니다. 몇 명이 울다가 돌로 눈을 문질러 눈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 이후로는 무서워서 울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때는 좀비들을 불태워서 그 좀비 안에서 고통받는, 불타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언젠가 군인들이 닥쳐 들어서 좀비들을 모두 태우려고 했을 때 한 명이 우리 마을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죽고 싶었겠지만 벌레는 불에 타오르는 몸을 굳이 조종해서 우리 마을까지 걷게 했습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그 열기에 고통스러운지 깨닫고 모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화염 방사기를 가지고 좀비들을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벌레와 함께 살아 있는 사람들, 몸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그 감각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채로 태워 죽인 것이었다. 가스실 같은 그런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온몸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물론,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어서 아무도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괴로워하지 않을 일은 아니었다.
벌레는 비정상적인 면이 많아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결론이 났다. 가만히 놔두었어도 지역 폐쇄만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2년이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문제인지, 또 세계대전 때처럼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으로 덮어주기로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이면은 아무도 모른다. 그 벌레가 다시 나타나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확실한 게 없는 상황이다. 지금은 수돗물로 샤워를 자주 하는 것만으로도 벌레가 옮겨 다니기 상당히 힘들어진다는 것은 확인했다. 그리고 벌레의 피부가 매우 약해서 일반적인 해충약으로도 쉽게 죽기 때문에 일단 박멸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변이종이 나와서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 붙어 있을지는 모른다. 어쨌든 생명체는 살아남으려고 발악은 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인류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각종 시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나라들이 먼저 감염되었다면 아마 해결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중동에서 오는 상품은 무조건 3일 이상 방치된 후에나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럴수록 배송이 빠른 것이 미덕이 되었다. 그 3일 외에는 거의 소요되는 기간이 없어야 하니까. 중동이 아니라 물류 허브에서 발생한 일이었다면 지구는 이미 벌레의 천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