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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Aug 25. 2024

다육식물 화분

삼촌이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집이 비었다고 연락이 왔다. 삼촌은 서교동에 단독주택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 계속 들어와서 살겠지만 그동안 세를 주기도 불안하다고 아는 사람에게 집을 맡기고 싶다며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회사가 삼촌 집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집에서 출근하는 중간에 있어서 회식 때 술을 많이 마시거나 하면 삼촌 집에서 신세를 지고는 했었기에 그 집에 들어가면 출퇴근 거리가 짧아지는 장점과 단독주택 생활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단점이 하나씩 는 셈이었다.
삼촌은 쓰레기 내놓는 날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했다. 주변 빌라보다는 상황이 낫기는 했지만 조심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쓰레기봉투를 내놓아도 되는 날이 있는데, 그날 혹시 쓰레기봉투를 가져가지 않으면 쓰레기통을 길에 반드시 대문 안으로 들여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월요일에 가져가고 수요일에 가져가니까 월요일, 화요일에 그냥 놔두었더니 사람들이 그 위에 쓰레기를 잔뜩 버리고 간 거야. 지저분해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참았는데 수요일에 출근할 때 보니까 쓰레기차가 지나가면서 내가 내놓은 쓰레기봉투만 쏙 빼가고 나머지 쓰레기는 그대로 놔뒀더라고."
CCTV를 설치해 놓고 CCTV가 동작 중이라고 써 붙여 놓아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바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지키고 있지 않으면 그런 걸로 신고 보았자 경찰에서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힘든 건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기 시작한 곳이 사실 쓰레기를 투기하면 안 되는 장소라는 인식을 는 거야. 그러니 애초에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미리 조심해야지."
삼촌 집이 있는 동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지나다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차피 나는 출퇴근 시간에만 지나다녔으니, 그리고 특히 주말에는 와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기요금과 물, 가스 같은 건 삼촌이 자동이체를 시켜 놓아서 계속 내주겠다고 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파티 금지. 손님 부르면 안 돼. 내가 그래서 세를 안 주는 거야. 혼자 있어도 관리가 힘든 판에 요리하고 뭐 하고 하면 금방 어질러져. 그리고 잔디는 일주일에 한 번씩 깎고. 비 예보가 있을 때는 깎으면 안 돼, 하수도를 막을 수 있으니까. 전기 많이 쓰는 건 상관없는데 대문 불은 저녁에 볼 일이 끝나고 나면 웬만하면 켜지 마. 술 취해서 지나가던 사람들 유혹하기 딱 좋으니까. 초인종은 두 번째 울렸을 때 받는데 카메라 먼저 키고 얘기해도 되겠다 싶으면 마이크를 켜. 카메라만 키면 보는 줄 몰라.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옥상에 캠핑 분위기 낼 수 있게 텐트하고 다 있어. 마당에서 하면 텐트에 습기 올라오는데 옥상에서는 습기도 안 올라오고 좋지."
특별한 당부사항은 없었다. 부모님도 어차피 내가 취직했을 때 자취를 하니 마니 한 적이 있었고 아침밥 차려 먹는 게 걱정이지 다른 걱정은 없다고 하셨다.

삼촌은 한 달 후 미국으로 떠났다. 삼촌이 떠나는 날 새벽에 일어나 배웅 준비를 했다. 엘에이 국제공항에서 환승을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미 인천공항에서 배웅을 하고 나서 동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심이 먼저 쏠렸다. 촌이 출발하기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남은  들고 나와서 삼촌 집에 옮겨두고 잠자리에 들다가 새벽에 삼촌공항에 갈 때 비행기에 가지고 탈 짐을 같이 들고 공항철도로 인천공항까지 옮기는 데까지는 수월했다. 런데 막상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삼촌이 면세구역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출근을 하려 보니 회사 근처에 있는 역은 공항철도가 아니라서 중간에 환승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럴 거면 어차피 그냥 홍대입구에서 내려서 걸어서 집에 가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과장님도 며칠 동안 이사를 한다고 했더니 좀 피곤하면 그냥 쉬라고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아직 있었다. 아침 일찍 수속을 하고 들어가는 삼촌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조금 있다가 공항 라운지에 들어간 삼촌과 통화를 한 후 나도 아침 식사를 하러 돌아다녔다. 이제 수속을 한창 하기 시작해서인지 모든 식당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냥 집 근처에 가서 사 먹던가 집에서 해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보세요?"
"저 강대환인데요"
"어, 강대리. 쉬어야겠지?"
"아 네. 생각보다 짐 푸는 게 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그래, 이사가 쉬운 일이 아니야. 짐을 날 잡아서 한 번 풀어야지.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봐."
"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터벅터벅 걸어서 공항철도 타는 곳으로 내려갔다. 배가 고프긴 한데 그렇다고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집에 들어가는 길에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서 라면과 삼각김밥을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엄마가 삼촌 집에 들어가겠다는 얘기를 했을 때 제일 먼저
"왜? 맨날 삼각김밥만 처먹으려고?"
라고 한 게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별로 가져오지 않은 짐이지만 정리하는 데는 은근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기존의 가구들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물건별로 나름의 자리를 잡아서 넣는 것이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노트북 컴퓨터도 인터넷 연결하고 삼촌이 두고 간 프린터도 무선으로 노트북에 등록했다. 속옷과 양말, 정장까지 제 자리에 다 넣고 보니 벌써 정오가 조금 넘어 있었다. 그제야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이 생각났다.
물을 끓이고 삼각김밥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서 먼저 가운데 선을 잡고 쭉 뜯었다. 보통은 라면 국물에 찍어 먹거나 하는데 새삼 배가 고파서 삼각김밥을 먼저 먹어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삼각김밥을 거의 반을 베어서 입에 가득 넣고 씹는데 천장에서 쿵쿵 쿵쿵 소리가 났다.


우리 집은 옛날부터 아파트에 살았다. 부모님은 내가 열 살 때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들어갔는데 내가 대학 입학할 때까지 위층에서는 수시로 후다닥 뛰어다녔다. 인터폰으로 항의를 해보고 아버지도 위층에 직접 찾아가 보았지만 그때만 조용했을 뿐 금세 다시 뛰어다녔다. 부모님은 윗집에서 대화를 할 때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다고 했지만 말이 그럴 뿐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점점 잦아드는듯하다가 이삼 년인가 전부터 다시 심해졌었다.
우리 가족이 층간소음에서 해방된 것은 내가 대학교 4학년에 올라가면서였다. 그때 우리 윗집 첫째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집에서 멀리 떨어진 명문고라고 했다. 그래서 급히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조용해진 것이었다. 그다음으로 이사 온 가족은 노부부였다. 그 집은 명절에 온 식구들이 찾아오는 날 외에는 쿵쿵거리는 일이 없었다. 평소에도 온화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잡고 산책하시는 모습에 금세 모든 동에서 좋은 분들이라고 소문이 났다.
가끔 위층에서 할머니가 과일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집으로 내려오실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친구분들 만난다고 나가고 혼자 계실 때 적적해서 오신다고 했는데 어머니도 마침 교회 분들이 오지 않는 시간이 있어서 심심하던 그 시간이 맞아떨어지는 일이 많다 보니 보통은 바로 집에 들어오다. 나는 보통은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들어오곤 했지만 가끔 주말이나 방학에 방에서 공부하게 되면 공부하다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이면 거실에서 두 분이 차분한 목소리로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멍하게 생각하는 사이에 물이 다 끓었다고 삐이 하는 소리가 났다. 라면 비닐을 급히 뜯고 뚜껑을 열어 물을 부었다. 젓가락을 올려서 뚜껑이 열리지 않게 해 놓고 식탁에 올려놓은 후 텔레비전을 틀었다. 다시 얼른 주방으로 와서 삼각 김밥 비닐을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아까 생각에 잠기게 했던 쿵쿵 쿵쿵 소리가 다시 들렸다. 새벽에 공항에 배웅 나가느라 피곤해서인지 짜증도 났던 상태라서 옥상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텐트나 뭔가가 쓰러진 것일 거다. 빈 화분이 몇 개 있다고 했는데 바람에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안으로 난 계단이라서 그냥 나무 문일 줄 알았는데 1층 현관문과 달리 3층 옥상은 아파트에서 쓸 것 같은 철문이다. 잠금장치를 풀려고 하는데 문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지? 담장 안으로 들어왔으면 이것도 불법 침입 아닌가?'
혹시 몰래 담 넘어 들어온 강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내려와 부엌칼을 들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잠금장치를 풀자마자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삼촌이 이야기한 텐트는 잘 접어서 가방째로 구석에 놓여 있었다. 화분들도 무릎 높이까지 오는 옥상 담장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서 바람 때문에 쓰러질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누군가 옥상 문 위쪽에 있다가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손잡이의 잠금장치 말고도 위에 단순한 고리도 하나 있어서 그것도 걸어 놓고 내려왔다. 영화 기생충 생각이 나서 혹시 옥상에 숨어서 사는 가족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옥상에는 물이 나오지 않으니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찜찜한 마음으로 다시 현관문 잠금장치 상태를 확인하고 라면을 먹었다. 다시 쿵쿵 쿵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속 신경은 써였다.

어머니가 윗집 할머니와 대화를 하다가 할머니가 윗집에서 이사 가면서 두고 갔다면서 조그마한 다육식물 화분 하나를 내밀었다. 전에 살던 집이 이사 가면서 몇 개 두고 갔는데 그중 몇 개는 베란다놓았고 우리 집에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감사하다고 하고 주방 창문 앞에 놓았는데 생각보다 보기 좋았다. 그렇지만 로즈메리 같은 거였다면 요리하면서 잘라서 넣는 재미도 있고 그랬을 텐데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초록색이 주방에 있으니 주방 분위기가 조금 살아나정도였다.
그러다가 윗집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그런데 그 집이 애들이 너무 뛰어다녀서 힘들었어요.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그 덕에 좀 살만 했지, 수시로 뛰어다녀서 미칠 것 같았다니까요? 항의하러 가도 정말 미안해하고 그랬는데 다음 날이면 다시 뛰어다녀요."
라고 하자, 할머니가
"알고 보니까 이 집 말고 이 옆집도 그 집에서 뛰어다녀서 힘들었다고 하더라고. 애가 고3이라서 이사 왔는데 이사오자마자 위에서 뛰니까. 아, 이 집도 대학생인가? 그러면 고3 때 고생 좀 했겠네."
"어유, 쟤는 이상하게 그런 걸로는 무디더라고요."
하지만 그때 나는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이라는 걸 알게 돼서 두 달이나 아버지를 졸라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공부했다. 하긴, 사람들은 좋지 않았던 시절은 고의로 콕 집어서 뭔가 한 게 아니라면 웬만하면 퉁치고 좋게 좋게 기억하게 되긴 한다.
"근데 왜 갑자기 이사 갔대?"
"첫째가 중3이었잖아요. 좋은 고등학교 가서 그 학교 근처로 이사 간 다던데요?"
"그래? 직접 들은 거야?"
"네, 아저씨가 혼자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었거든요. 그동 죄송했다고 하면서, 벌꿀도 한 병 사 왔어요."
"이상하네. 내가 들은 거하고 달라."
"할머니가 들은 건 어떤 건데요?"
나는 잠시 물을 마시러 나온 김에 들은 것이었고 윗집은 이제 없으니 관심이 없었다. 단지 고등학교를 좋은 곳으로 갔다거나 하는 좋은 일은 아니라는 느낌은 받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무한도전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방송이 제작되었던 당시 나도 열심히 보았기 때문에 무척 좋아하는 부분이었지만 쿵쿵 소리와 그때의 대화가 웬일인지 계속 생각이 나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 별 일은 없었다.
삼촌은 꼭 필요한 것은 다 알려주었지만 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보라고 압축파일 하나를 이메일로 보내 놓았다. 사실 집에서 살면서 청소만 잘해도 내 역할을 다 한 거라고 생각을 하기에 별다른 게 더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옥상에 누가 있는 것 같은 느낌만 없었더라도 그 이메일을 열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퇴근해서 쓰레기를 내놓고 출근하는 길에 쓰레기통을 들여놓는 것으로 집에서의 일정이 시작하고 끝났다. 외삼촌 집에는 사람 하나는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쓰레기통이 몇 개 있었고 거기에 스티로폼, 플라스틱, 종이, 캔, 병 등의 분리수거 그물을 넣어 두었다. 그래서 거기에 재활용품이나 쓰레기봉투를 넣어서 대문 앞에 걸어 놓으면 아저씨들이 알아서 가져가서 수거하고 그물을 다시 넣어 두었다. 그냥 그물만 넣어도 되지 않겠냐는 말에 쓰레기를 차까지 가지고 가는 것도 항상 가볍다는 보장이 없으니 바퀴 달린 쓰레기통에 넣어 두면 거기까지만이라도 끌고 가도 되니까 더 나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아마 가벼워서 다시 갖다 놓는 게 더 귀찮다면 그물을 꺼내갈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통이 가격이 좀 되기 때문에 아침에는 반드시 다시 대문 안으로 들여놓아야 한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물론 그 쓰레기통이 사라지는 일보다 그 쓰레기통이 거리의 공공 쓰레기통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회사일은 그대로 하고 퇴근하면 다음 날 수거하는 항목이 무엇인지 확인을 하고 집안 청소를 하면서 쓰레기를 다시 다 가지고 나와 마당 쓰레기통에 정리를 했다. 그다음 내일 수거하는 항목의 쓰레기통을 대문에 내놓고 오면 그것만으로도 밤 아홉 시가 다 되었다. 쓰레기통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누군가 집 안에 들어가려면 들어가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수도 있었지만 현관문이 자동으로 잠겼기 때문에 나를 공격해서 내가 들어가는 시점에 함께 들어가지 않는다면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라도 들켰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이틀 지나면서 그다음 주말이 될 때까지 옥상에서 있었던 일은 점점 착각이나 별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은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외근이 생겨서 나도 한 조에 이름을 올리고 일찍 퇴근을 해 버렸다. 이건 우리 부서에서 관행적으로 일어나는 일종의 특혜였는데, 대신 내가 외근 담당일 때 외근지에서 업무가 늦게 끝나도 추가 수당을 받지 않는 데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게 되는 일종의 보상 장치여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점심시간에 밀키트를 사서 집에 왔다.
냄비를 씻고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따뜻 해졌을 때쯤 양념장을 풀었다. 이제 끓기 시작하면 야채를 넣으면 된다. 그때, 옥상에서 다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스 불을 끄고 다시 계단으로 올라가 문에 귀를 대고 다시 소리를 들어 보았다. 역시 사람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아이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하지만 웃음소리라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문을 열어볼까 했지만 혹시 이상한 현상이라면 괜히 문을 열어주는 것 자체가 약점을 보이게 되는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삼촌이 말한 압축파일 생각이 났다. 옥상에 한 번에 원격으로 화염방사하는 장치라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일까, 하필 그 파일 생각이 왜 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메일에 접속하고 일주일 동안 온 상업 메일들 사이에서 삼촌 이름을 찾았다. 이메일을 클릭하고 압축파일을 다운받았다. 압축파일은 웹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GB나 되는 용량이라 기간이 지나면 받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미리 받아놓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압축파일은 다섯 개 폴더로 되어 있었다. 역시 어릴 때부터 대학 때까지 신동 소리를 놓치지 않던 모범생답게 폴더에는 번호까지 붙어 있었다.
00. 집청소 - 수납공간, 쓰레기 버리기, 빨래, 수건과 걸레, 청소기와 청소도구
01. 마당청소 - 잔디 깎기, 수도확인(겨울에 특히 주의), 쓰레기통, 대문시건, 가로등, 벌레약
02. 소음관리 - 2층 작은방 오디오 관련(여기에만 방음시설 있음)
03. 캠핑도구 - 반지하창고(건물외부), 옥상
04. 보안시설 - 꼭 필요성이 느껴질 때만 조작
이 중 보안시설에 대한 건 삼촌이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4번 폴더를 더블클릭하고 들어가니 다른 폴더가 있었다.
041. 시건장치 : 잠금장치 별 비밀번호 및 열쇠 위치 리스트
042. 통신장치 : 집전화
043. 보안장치 : CCTV
집전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폴더를 열어 보니 PPT 문서가 하나 있었다. PPT 문서에는 집 도면이 있고 1층, 2층, 옥상에 집전화가 설치되어 있고 벨소리는 나지 않게 되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1층은 주방과 화장실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주방이나 화장실에서 전화기를 본 적이 없어서 직접 가보기로 했다. 주방은 양념통이 있는 슬라이드를 끌까지 열고서도 들여다보아야 뭔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슬라이드와 함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손을 넣어야 간신히 닿을 것 같았다. 하긴, 슬라이드와 함께 움직이다가 수화기가 떨어지면 집 전체 전화기가 모두 불통이 될 테니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화장실은 해당 위치에 휴지걸이가 있었다. PPT파일에서 그 위치에 화살표가 있었기에 휴지걸이를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위로 당겼더니 의외로 쑥 빠졌다. 아마 휴지걸이와 휴지의 중력으로만 누르고 있는 공간인가 보았다. 휴지걸이 안쪽에는 전화기만 간신히 들어가는 크기의 공간에 전화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시 휴지걸이를 끼워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또다시 옥상에서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이었다면 꼼짝없이 무서워서 방에 틀박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쿵쿵 소리는 낮에만 들렸다.
급할 때 집전화로 119나 112에 신고는 할 수 있을 거고 이제 CCTV 항목을 보기로 했다. 집 근처 CCTV 위치를 말하는 건가, 하고 들어갔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PDF 파일들과 한글파일 몇 개, PPT파일 하나가 있었다. 단순히 '위치'라고 제목이 되어 있는 PPT 파일을 열자 방금 본 집전화 위치처럼 여기저기에 동그라미 표시가 있는 도면이 나왔다. 거실에서는 주방 한가운데 동그라미가 있길래 쳐다보니 그곳에는 화재감지기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후레시를 비쳐 보자 그 안에 조그맣게 위치한 렌즈가 반짝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파일에 있는 건 카메라 위치였던 것이다. 그런 위치에, 아니 집안에 카메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깜짝 놀라서 도면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1층에서는 커튼레일에서 주방 쪽을, 주방에서 현관문과 거실 쪽을, 다른 방향으로는 주방에서 화장실과 계단 쪽을, 3층 계단 끝 열쇠함에서 다시 1층쪽을 바라보게 되어 있었다. 2층은 내방문에 붙어 있던 촌스러운 큐빗들 중 하나가 카메라였고 그것이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카메라가 없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방문이 열려 있을 때는 2층 화장실 앞 등에서 비추는 카메라로 들여다 보였다. 옥상에도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옥상문틀에 하나, 반대쪽은 밤에 혹시 옥상에서 놀 때 켜는 바닥조명 옆에 있었다.
카메라는 어디 있는지 알았는데 그 화면들을 볼 수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삼촌에게 이메일을 썼다. 대충, 옥상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정황과 카메라로 화면을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메일을 보내는 김에 마당 사진도 찍어서 이렇게 관리하고 있다고 자랑도 했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쿵쿵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까지는 편하게 텔레비전과 유튜브를 보면서 지냈다. 한 가지 특별한 일이라면 2층 화장실에서 집전화 수화기를 들고 뚜, 하는 신호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것 정도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옥상 문을 열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주말에도 시간이 많으니 급하게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밤 여덟 시가 되어 곱창볶음을 주문해서 대문 앞에서 받아서 들어왔다. 삼촌이 아파트처럼 RF키를 설치해 두어서 열쇠로도 열리지만 해당 키만 가지고 있으면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되어 있었다. 대신 대문 가까이에만 가도 잠금이 풀리기 때문에 대문 밖으로 나갈 게 아니라면 마당에 나갈 때는 대문 열쇠는 두고 나가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었다. 어차피 누가 와도 원격으로 문을 열어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현관문도 잠기게 놔두고 대문 앞으로 가서 음식을 받아서 들어왔다.
랩을 벗기고 밥솥에서 밥만 퍼서 곱창과 먹으려고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똑같은 곱창에 소주라는 메뉴도 회식과 회식이 아닌 것은 천지차이이다. 아마 외근 인원들도 지금쯤 외근이 끝나지 않았다면 한 잔 하고 있을 것이었다. 늦게 끝났어도 한 잔 하고 있을 것이다. 일찍 끝났으면 커피만 한 잔씩하고 집에 갔겠지. 그게 금요일 외근의 특권이니까.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골라서 틀고 혹시 몰라 노트북으로 이메일 계정에 들어가 보니 삼촌의 답장이 와 있었다.
"쿵쿵거리거나 그런 적이 그전에는 없었는데 이상하네. 그런데 내가 일단 녹화된 걸 돌려봤는데 네가 이메일 보낸 시간에는 일단 옥상엔 아무도 없었어."
그러면서 해당 화면들이 저장된 웹서버 주소를 알려 주었다.
"내가 너 아이디하고 비밀번호 만들어 두었어. 이걸로 접속해. 영상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찾아보고 다운받을 수 있지만 삭제는 못하는 계정이야. 나도 평소에는 권한 없는 계정으로만 들어가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CCTV 있는 거 미리 말 안 해서 화난 건 아니지? 어차피 나도 혹시 몰라서 그 상태로 살았으니까 서운해하지는 마."
삼촌이 적어 놓은 대로 링크를 클릭한 후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들어가니 집 도면이 있는 페이지가 나왔다. PPT에서 본 것과 같은 도면이었다. 동그라미로 표시된 카메라 위치를 클릭하니 화면이 팝업으로 올라왔고 그 옆에는 날짜,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숫자 칸과 앞뒤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화살표가 있었다. 그 밑에는 'Image Download', 'Video Download(Select Time Stamp)'이라는 버튼이 있었다. 지금은 옥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3층에 올라가서 문 앞에 있는 외부등 스위치를 켜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노트북을 보니 불이 들어온 옥상이 훤히 보였다. 내가 지난주에 문을 열었을 때와 똑같은 상태였다. 다시 올라가서 불을 끄고 내려와서 불 꺼진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 오후로 시간을 돌려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은 시각 거실을 보니 내가 쿵쿵거리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것은 거실은 1,2층까지 천장이 뻥 뚫려 있어서 2층에서도 옥상은 똑같은 옥상인데 내가 쿵쿵 소리를 들은 소리가 나는 시간 때문인지 거실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노트북 화면이 켜졌다. 휴대폰 벨소리라도 울렸다면 깜짝 놀라서 잠이 다 달아났겠지만 단순히 노트북이 켜지는 것으로 그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로그인해 보니 삼촌이 메신저를 보냈다.
"자니?"
"아니요, 웬일이세요?"
"지금 CCTV 화면 들어가 봐. 네가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알겠어요."
"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한테 얘기해. 바로. 알았지?"
"네."
나는 다시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해당 페이지를 즐겨찾기로 추가해 놓았고 다시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브라우저에 저장해 두었기에 바로 CCTV 화면에 접속할 수 있었다.
"들어왔어요."
"2층 한번 봐봐. 화장실"
"네."
2층 화장실 앞 조명에 설치된 CCTV를 뜻하는 동그라미를 클릭하자 화면이 팝업으로 들어왔다. 그냥 단순히 계단과 내 방문과 방문 앞에 아이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다시 내 방문 큐빅에 설치된 카메라를 클릭하니 아무것도 없이 화장실까지 훤한 화면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방문 앞에 누가 서있는 거 아니야?"
갑자기 잠이 다 달아났다. 놀라서 다시 화장실 쪽 CCTV를 클릭하자 방문 앞에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멍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방문이 아닌 화장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금살금 가서 문을 확 열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문을 닫고 방문을 잠가 버렸다. 다시 노트북으로 돌아오자 삼촌이 말을 하고 있었다.
"뭐 있었어? 문 여는 순간에 사라진 것 같은데?"
"아니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리고 방문 쪽 카메라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어요."
"뭐지? 너 괜찮겠어?"
"뭐가요?"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나 같으면 거기서 못 잘 것 같은데? 나는 누가 담 넘어올까 봐 카메라 설치한 거지 벽 뚫고 들어오는 거 보려고 설치한 게 아니야."
"누가 벽을 뚫고 들어와요?"
"너 이상한 인형 같은 거 설치한 거 아니지?"
"이상한 인형이라니요?"
"아니, 그게 그림자 때문에 이상하게 보인 거라던가 할 수도 있잖아."
"아무것도 설치한 거 없어요. 제 짐도 전부 수납장에 넣어 두었는데요 뭐."
"일단 내가 누나한테 얘기할 테니까 밤만 잘 새우고 아침에 가던가 밤에 나가던가 해."
"삼촌 같으면 지금 짐 싸서 나갈 수 있겠어요? 방 밖으로 나가는 게 더 무서운 거 같아요."
"그것도 그렇네. 아무튼 지금 얘기할 테니까 엄마 전화 오면 꼭 받아."
"네"
"자게 되면 잘 자고."
"아 삼촌"
"왜?"
"근데 갑자기 CCTV는 왜 확인하신 거예요?"
"너 의심한 거 아니야 인마."
"그냥 삼촌이 원래 무슨 촉 같은 게 다고 들어서요."
"몰라. 그냥 갑자기 네가 CCTV 본대서 신경 쓰였나 보지. 아무튼 잘 자라."
"네."
메신저 창을 닫자마자 여기저기 카메라 화면들을 돌아가면서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혹시 내 방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문을 열었을 때 혹시...?'
이제 똑같이 나타나더라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내 방은 문을 열어놓지 않는 한은 찍히지 않으니까. 그런데 아까 얼굴이 찍혔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군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화면을 돌려 보기로 했다. 10분쯤 고민하다가 결심을 하고 다시 화장실 앞의 원을 클릭해서 뒤로 가는 화살표를 세 번쯤 눌렀을까. 갑자기 귀를 째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 솔레미오"
엄마가 전화를 건 것이었다. 벨소리를 바꿔버려야겠다. 다들 회사에서는 벨소리가 긍정적이라고 칭찬을 해 주었는데 벨소리 때문에 심장 떨어져 죽을 뻔했다.
"여보세요"
"괜찮니?"
"네."
"지금 엄마가 거기로 갈까?"
"아니요, 됐어요."
그때 수화기 먼 곳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20분도 안 걸리겠네."

엄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20분쯤 있다가 도착한다. 도착하면 전화할게 그때 문 열어줘."
"지금 오고 있어요?"
"응 지금 지하철이야. 급하게 나오느라 연락 못했는데 마침 전철이 바로 왔네."
"엄마하고 아빠하고 같이 온다고요? 지금?"
"자세한 건 거기 가서 얘기할게."
"여기서 주무시고 가세요?"
"그래야지."
"저 무서울까 봐요?"
"아니야. 나머지는 가서 얘기할게. 끊고 가만히 있어. 잠들지 말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전화를 끊고 멍하게 있다가 아까 하려던 게 뭐였지, 하다가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무서웠지만 참고 화살표를 눌렀다. 아이의 형상이 보이면 확대를 눌러야 한다.
그런데 화살표를 신나게 누르다가 화면 위쪽 시간을 보니 벌써 19시다. 다시 현재 시간까지 눌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아무도 찍혀 있지 않았다.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도 식어버렸다. 스스로 모습도 숨겨야 하는 존재라니. 무서워도 어차피 나가야 하니 그냥 평소 주말처럼 한두 시쯤 돼서 다시 방으로 올라오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배도 출출한 것 같고 해서 다시 온 집안의 불을 다 켜고 1층으로 내려와서 냉장고에 다시 랩을 싸서 넣어 둔 곱창을 꺼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시 한번 볶은 후 밥을 꺼내서 다 같이 볶고 프라이팬 채로 가지고 소파로 와서 텔레비전을 켜고 보면서 먹었다. 넷플렉스 영화를 보다가 화면이 깜빡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순간 텔레비전 유리에 내 앞에 누가 있는 것처럼 비친 느낌이 들었다. 맛있게 곱창볶음밥을 먹다가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져서 숟가락을 내려놓고 눈은 아직 화면에 고정한 채로 혼자 중얼거렸다.
"밥 먹을 땐 예의상 건드리지 말자, 응?"
누가 봐도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살짝 무서운 느낌도 들면서 곱창너무 맛있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실제로 그러고 나니 밥을 다 먹을 때까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밥을 다 먹었을 때쯤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여보세요."
"너 노트북 안 가지고 있니?"
"네. 근데 왜요? 왜요?"
지금 도착했으니까 일단 나와."
"네."
"전화 끊지 말고!"
전화를 끊으려다가 깜짝 놀라서
"네"
하고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엄마, 도착한 거 맞아요?"
"잠깐만"
그리고는 엄마가 아빠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 대환이 대문 밖으로 나온 거 맞대?"
"응, 그런 것 같대."
그리고는 다시 엄마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너 대문 열쇠 가지고 나왔지?"
"네."
"그럼 대문 닫고 밖에 나와 있어. 금방 도착하니까."
"네."
그때 옆에서 아빠가 하는 말이 들렸다.
"응, 밖으로 나가서 문 닫은 것 같대. 현관문이 닫혀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엄마는 휴대폰 통화 상태였을 뿐 아빠 하고만 대화하고 있었다.
잠시 후 멀리 엄마와 아빠가 보였다. 그제야 엄마가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
"어, 끊을게."
아빠는 아직 통화 중이었다. 아빠가 들어가자는 손짓을 하기에 내가 대문을 열고 셋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빠는 집 구조를 다 안다는 듯이 곧장 현관문으로 걸어가서는 나에게 문을 열라고 했다. 내가 을 열자마자 아빠가 소리쳤다.
"얼른 들어서 문 잠가!"
나와 엄마는 놀라서 얼른 뛰어 들어왔고 잠시 후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겼다. 아빠는 다시 전화기에 대고
"지금 안에는 없는 거지? 알겠어. 수고했어. 고마워, 정말. 내가 진짜 인복 있다니까. 그래. 일 방해해서 미안하네. 그래."
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누구예요?"
내가 묻자 아빠가 다시 안도했다는 말투로 말했다.
"니 삼촌이지 누구겠냐."
"근데 왜 뛰어들어온 거예요?"
"CCTV에 마당 쓰레기통 근처에 서있다고 해서 말이다."
"누가요?"
아빠가 잠시 가만히 있는 사이에 엄마가 대답했다.
"유은이."
유은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모르겠다.
"유은이가 누구예요?"
"그때 집에서 가지고 온 다육식물 어디 있니?"
엄마가 대답 대신 물었다.
"그거 옥상에 화분들 있는데 같이 있어요."
엄마와 아빠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3층 계단으로 나가서 옥상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복주머니 같은 것을 꺼내더니 뒤집은 후 다육식물이 있는 화분을 손을 대지 않고 감싸서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서 현관문으로 나간 후 대문 바로 앞에 놓고 다시 들어왔다.

엄마는 윗집 할머니가 한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우리 윗집에는 딸이 둘 있는데 첫째는 공부를 제법 하고 둘째는 왈가닥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강아지도 한 마리 키웠었는데 우리가 들었던 쿵쿵 소리는 바로 둘째가 뛰는 소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가 한 이야기로는 그 집에는 딸이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부동산 계약을 할 때도 세 가족만 살았던 집이라서 조용할 거라고 했다고 한다. 애완동물도 없다고 했지만 분명히 이사 올 때는 강아지를 본 기억이 있다. 집안에서 마구 뛰는 것 때문에 동 전체에 소문이 퍼진 덕에 사람들과 관계가 매우 소원해지기는 했지만 아이가 둘 있던 것이 하나가 되고 잘 있던 강아지가 사라졌는데 알지 못했다는 건 그 가족이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엄마가 그나마 윗집 아줌마가 친분이 있었다고 알려진 상가 피아노 학원 원장에게 꼬치꼬치 물어본 결과 자초지종을 다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원장 역시 말을 하기는 하지만 엮기고 싶지는 않다는 눈치였지만 다 털어놓는 것이 자신에게 오히려 낫겠다 싶었던 것 같다.
첫째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이자 내가 학교 1학년 때 열 살이었던 둘째가 강아지와 함께 차도에서 뛰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고가 인도와 차도가 가드레일로 분리되어 있어 누구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하기 힘든 위치였던 데다가 하필 그쪽 가로등이 깜빡하면서 불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시점이어서 자동차도 뭔가를 보고 속도를 줄이기 힘든 상태였고 그 바람에 사고도 너무 참혹하게 나고 말았다. 그 결과 강아지와 아이의 시체를 떼어 놓을 수 있을 만큼 떼어 놓다고 애를 쓰고 화장을 하기는 했지만 아이는 어느 정도 강아지의 일부와 함께 화장을 한 셈이 되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상심했지만 조금씩 상처는 서로 치료해 나갔다. 하지만 가족 외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정도로 속으로 곪아 가고 있었다. 그 고름은 아이 엄마에게 가장 심각했지만 딸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첫째가 3이 되고 그전까지 얌전하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사춘기로 신경질적이 되자 안 그래도 순했던 아이 엄마는 조금씩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가끔씩 첫째를 유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첫째의 이름은 유진이였는데 자신을 동생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가끔 일어나자 첫째도 나름 상처를 받으며 조금씩 가족의 고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아이 엄마가 혼자 산책을 다녀오더니 아빠가 어디 다녀오냐는 말에 강아지를 데리고 나갔다 왔다고 대답하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유진이가 학원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왔는데 아이 엄마가 거실 한가운데 신문지를 펼쳐 놓고 다육식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집에서 식물을 키운 적이 없는지라 유진이가
"엄마 그게 뭐야?"
하고 물었는데 아이 엄마는
"그거라니, 유은이잖아."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유진이가 또 이상한 소리 하네, 하면서 방에 들어가 버렸는데 한참 뒤에 퇴근한 아이 아빠가 알고 보니 유골함에 있던 유골을 다육식물 화분 중간의 흙을 꺼내고 나누어 담은 것이었다.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하고 상담을 다니고 있던 그때가 우리 집에서 갑자기 다시 뛰는 소리가 나기 시작해서 엄마 아빠가 다시 한 번씩 올라가서 항의할 때였다. 아이 아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아이 엄마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처럼 보였을 시점이었다.
결국 유진이가 명문 고등학교에 간 것은 맞지만 유진이는 그런 집에서 탈출하기 위해 있는 힘껏 기숙학교에 가려고 노력했던 것이고, 유진이가 중학교를 마치면서 유진이 아버지도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가 버렸다.
유진이 아버지는 황이 없던 탓에 이사를 가면서 유골함만 가지고 가 버렸고, 지난주가 되어서야 유진이 엄마가 그 유골을 화분에 옮겨 담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유진이 아버지 역시 그 이야기를 다시 우리 윗집에 화분이 그대로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피아노 학원 원장에게 털어놓았고, 비슷한 시기에 엄마도 원장에게 물어보면서 단서가 하나씩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쿵쿵거리던 소리는 노부부가 이사 와서 거실 창가에 있던 화분을 베란다에 내놓으면서 사라졌다. 영문도 모르는 두 사람은 그 사이에 친분을 쌓았고 그 이후에 할머니는 우리 집으로 그 화분 중 하나를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삼촌 집으로 들어갈 때 행운을 빌어준답시고 그 화분을 집어넣어 준 것이었다.
"안 그래도 옥상에서 아파트에서처럼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이상해서 문에 귀 대고 있으면 애 웃음소리 같은 게 들렸어요."
"강아지랑 놀던 소리인가 보다."
"저 유골은 어떻게 한대요?"
"아이 아빠가 다 모아서 바다에 가져가서 뿌려준대."
한동안 우리 셋은 말이 없었다. 왜 하필 그 화분들 중 내가 가지고 온 것만 쿵쿵 소리를 낸 건지 모르겠다. 나와도 한 번도 놀아본 적 없는 애였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 화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여러 집 거실에 있었다면 그 집들 모두 아래층에서 항의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그 아이는 신나게 뛰어놀았겠지.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엄마, 그럼 삼촌 이야기를 듣자마자 유은이 얘긴 거 알았어요?"
"그렇긴 한데 우리도 그거 알게 된 거 이삼일밖에 안 됐어."
"이상하네요. 그럼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지낼 수도 있었겠네."
"근데 계속 나타난 거 보면 지도 아빠한테 돌아가고 싶었겠지."
대문 밖에 내놓은 유은이가 새삼 추워 보였다. 그런데 문 앞에서 문을 등지고 서 있었을 때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일부러 카메라에 보이려고 하고 있던 것이었을까? 정말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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