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다운 빌딩에 있으면 기분이 좋다.
아니, 이 문장은 잘못된 것이다. 제대로 된 문장을 쓰자면, 내게는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특정한 양상의 건물이 있고 그런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 건물이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아서 그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그 양상을 잘 따른 건물은 어떤 건가?
건물은 먼저 유리로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건물로 햇빛이 뜨겁게 들어온다. 마치 온실과 같은 느낌이지만 유리의 코팅이 매우 짙어서 여름에도 실제 피부로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햇빛이 들어온다는, 허공의 공기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은 창가 가까이 서 있으면 절벽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약간 인공적인 자유의 감각을 선사한다.
바닥은 단단한 돌로 마감이 되어 있어야 한다. 호텔에서는 가벼운 카펫의 느낌이 걷는 데 고급스러운 배경을 만들어주지만 사실상 큰 건물은 예로부터 바닥이 단단해야 한다. 나무로 만든 건물도 주춧돌이 있어야 하고 콘크리트 건물도 결국 콘크리트가 돌이 되어 중세의 성당처럼 무겁고 묵직하며 한없이 지구를 중심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상징이 된다. 그곳에서 멋진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컵에 따뜻한 커피를 담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정문에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까지의 거리는 곧 건물의 크기를 상징한다. 건물은 너무 크거나 길면 재미가 없다. 뭔가 용도가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물은 특별한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다. 그 건물 자체가 얼핏 보아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 자체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그런 건물이다. 내 마음에 드는 크기의 건물을 본 적이 있긴 하다. 광화문 KT건물 정도면 마음에 드는 크기인데 실제로도 공간 활용을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건물을 설계하기보다는 땅에 맞추어, 혹은 미리 정한 모양에 맞추어 건물을 지어 놓고 그 안에 사무공간을 되는 대로 짜 놓는 방식이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무실 배치여서 실제로 내부 공간의 배치가 임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내 마음에 드는 건물이다.
하지만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KT 건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략 그 정도 면적의 땅에 지어진 유리 건물이라는 것뿐이다.
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는 그 건물 13층 13호에 있는 여자를 죽여야 하는 임무가 있다. 13층에는 개인 사무실들이 늘어서 있는데 13호라고는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사무실을 만들 때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쪽부터 번호를 붙인 것뿐이고 실제로는 권은수 상무의 사무실이다. 그녀가 딱히 잘못한 것은 없다. 그저 그 남자의 의뢰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되어 있을 뿐이다. 그건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단지 의뢰인이 자기의 아랫사람들이 똑같이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의 회사 사람이지만 미리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남자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아메리카노 컵을 왼손에 들고 홀짝거리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선선해진 날씨가 무척 매력적이어서 로비에는 공조시설을 돌리지 않고 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자나 구석의 경비실이라고 만들어 놓은 손톱만 한 유리건물 안에 앉아 있는 남자나 그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에 들어와 있는 60여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충별 안내도를 본다. 13층, 내쉬-캐롤라이나 캐피털. 주소는 미리 확인했지만 13층의 회사가 의뢰받은 곳과 맞는지까지 현장에서 체크해야 확실하니까. 그는 총을 가지고 올라간다거나 하는 구시대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직접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에 가는 것은 나중에 CCTV를 확인할 사람에게 미리 바치는 선물, 그러니까 자백이나 다름없다. 로비에 있을 때는 건물 구경을 하러 왔다거나 다른 건물인 줄 알고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면 상황이 달라진다. 일단 가까이에서 얼굴이 엘리베이커 내부 카메라에 노출되는 데다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층마다 밖에서 엘리베이터를 비추는 카메라 때문에 일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추궁당할 수도 있었다.
남자는 아무 감흥이 나지 않는 이상한 석조 장식품 옆에 서서 바깥쪽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신다. 일부러 밖에서 다섯 모금만큼만 남기고 가지고 들어왔다. 홀짝거리면서 다섯 모금을 다 마시고 엘리베이터 앞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아직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손놀림이 필요하다.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슬리브를 쓰레기통 앞에 흘린다. 그리고 다시 슬리브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그리고 잊은 게 있다는 걸 방금 기억해 냈다는 듯이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와서 옆건물의 스타벅스로 들어간다. 그리고 30분 뒤, 한 잔 더 시킨 아메리카노도 비우고 그는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아마 다음날 오후 세시면 휴대폰에 입금 알림 문자가 올 것이다. 아무 군더더기 없는, 양복을 펄럭이는 일도 없고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니는 일도 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와도 접촉할 필요 없는 지극히 격식을 차리면서도 개인적이고 익명적인 간결한 활동만 남기고 그는 돌아갔다.
그는 쓰레기통 옆의 슬리브를 주우면서 1cm짜리 검은색 미니 자동차를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동차에는 초소형(자동차가 초소형이니 당연하지만) 카메라와 미니 압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나머지 부품들은 모두 무광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투명하게 제작하려고 했지만 투명한 플라스틱이 반짝이며 반사되는 빛이 카메라에 생각보다 너무 잘 보여서 생각을 바꾸었다. 이 자동차가 그의 주요 전략이었다. 압정에는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는 약품이 발라져 있었다. 바르자마자 찔리면 빠르면 한 시간 내에는 사망할 수 있었지만 미리 약품을 발라 놓아야 했기에 사용할 때는 이미 많이 말라 있어서 보통은 사망할 때까지 대략 대여섯 시간은 소요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약 자체를 압정 끝을 꺼끌꺼끌하게 흠집을 내고 골고루 발라놓아서 찔렸을 때 피부에 치사량 미만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동차를 쓰레기통 옆에 잘 놓고 옆건물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그는 커피를 시켜놓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동차 화면을 보면서 조종하는 것이었다. 통신을 최대한 잘 되게 하려고 차량 가장자리를 모두 안테나로 감싸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13층까지 올라가서 동작을 잘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일부러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기다려서 함께 태우고 몇 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먼저 13층에 가는 사람이 있다고 덥석 같이 내려서는 내리자마자 조종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적어도 16층까지는 카메라에 제대로 찍히는 것을 보고서야 13층에 내려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20층까지 올라갔다가 거의 모든 층에서 사람이 타고 내려서 티 나지 않게 13층에서 자동차를 내리게 할 수 있었다. 화상 왜곡을 줄이는 툴을 사용해서 저 위에 있는 숫자를 쉽게 읽을 수 있어서 그것을 보고 엘리베이터도 타고 13호 사무실도 찾았지만 사무실로 들어가는 순간 화상 보정 프로그램을 껐다. 이제부터는 주의 깊게 무보정 원본 영상을 보면서 작업을 해야 한다. 사무실에는 문이 안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대신 책상이 밖에서 들여다보이지 않게 옆으로 틀어져 있었다. 손님이 들어와서 앉는 자리는 밖에서 보일 수 있었지만 손님이 오면 문을 닫을 테니 상관없을 것이다. 우선 복도와 사무실 안에 CCTV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사무실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복도에도 없는 것은 의외였다. 어차피 엘리베이터 앞을 찍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는 약간 우월감이 느껴졌지만 다시 모든 감정을 접고 화면에 집중했다. 책상 저쪽 다리 옆에는 권상무의 하이힐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출근한 것이다. 그는 자동차를 하이힐 바로 앞에 잘 위치시키고 휴대폰 화면 위의 점 세 개를 눌렀다. '지그재그', '점프', '공중제비' 등의 묘기 리스트가 나왔다. 기존에 판매하는 앱을 그대로 사용하니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별다른 작업도 필요 없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점프'를 선택하니 화면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더니 시점이 하이힐 안으로 바뀌었다. 압정을 내려놓고 다시 점프해서 하이힐 밖으로 벗어났다. 퇴근할 때 신발을 신으면 압정을 밟게 될 것이었다. 제대로 찌르기에는 체중이 실리는 하이힐 앞꿈치만 한 것이 없는 데다 의자에 놓으면 의자 색과 압정 색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목표물이 여자일 때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미니 자동차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어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건 위험했다. 다시 로비에 가서 고개를 숙이고 주울 핑계도 없을뿐더러 다시 건물 로비 카메라에 얼굴이 찍히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 복도를 한 바퀴 돌면서 다른 쓰레기통이 있는지 찾아보고 자동차가 그 안으로 점프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사무실 안에 있는 쓰레기통은 간혹 서류를 잘못 버렸는지 보느라 다시 헤집는 사람이 있어서 위험하고 복도 쓰레기통이나 탕비실 쓰레기통이 가장 좋았다. 그날은 운이 따라주는지 청소부가 탕비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어 쓰레기 수레로 점프해서 들어갔다. 그가 '전원 끄기'를 터치하자 자동차는 스스로 전파를 모두 차단하고 전원을 껐다. 이제 내일이면 자동차는 쓰레기 매립장으로 향할 것이다. 잠시 후 그는 휴대폰 아래쪽에 꽂아놓은 통신기를 분리해서 마치 휴대폰 충전을 해서 기분이 좋다는 듯한 표정으로 안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