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산 가자."
갑자기 민규가 말했다. 유리와 주미와 나는 동시에 의아한 표정으로 민규를 올려다보았다. 다들 주미의 집에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산이라니?
"그냥, 엠티처럼. 우리도 이제 모텔이나 호텔 빌릴 수 있는 나이가 됐잖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산에 갔다가 민규는 죽었다.
우리 넷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다니던 동네 학원에서 만났다. 우연인지도 모른다. 주미와 나는 그 학원이 있던 동네에 살았지만 민규와 유리는 아니었으니까. 민규는 누나가 그 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유리는 주미를 따라왔다. 학원에서는 수학과 영어만 배웠다. 내가 그렇게 선택했다는 게 아니라, 학원에는 퇴직한 수학 선생님 한 분과 영문학과 출신 선생님 한 분만 우리 학년에 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등부에는 과학 선생님도 있었던 것 같지만 국어 담당 선생님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더 필요한 과목은 다른 학원에서 단과반으로 신청해서 들으면서도 수학과 영어는 꾸준히 같은 학원을 다니던 우리는 대학교도 같은 곳으로 왔다. 나에게는 마치 중학교 1학년에서 지금까지의 시간이 하나의 모래시계처럼 내부를 들여다보면 뭔가 따로 노는 것들이 들어 있지만 결국 하나의 물체인 그런 덩어리로 보인다.
민규의 한 마디에서 시작했던 부산 여행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그러니까 유리의 문화인류학 중간고사를 마지막으로 시험 기간이 완전히 끝나자마자 금요일 오후에 부산으로 향한 것이다. 금요일은 빠지더라도 지방에 일이 있는 학생들이 많아서 교수님들도 상습 결석만 아니면 웬만하면 이해해 주는 분위기이다. 이해하는 게 아니라 학점은 알아서 따라는 식인지도 모르지만. 우리고 동의를 하자마자 민규는 이리저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와, 기차표가 엄청 비싸네. 완전 비행기다."
얼마 전 개통한 경부선 KTX를 타자고 그렇게 우기더니 결국 무궁화호를 예매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다시 머리를 맞댔다.
"야, 그럼 거의 1박 3일이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밤에 내려가서 아침부터 돌아다니는 게 어때?"
"부산에 갔으면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맛집은 뭐가 있을까?"
"자갈치 시장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라며?"
그때 유리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끼리 가는 것도 처음이고 우리끼리 가서 2박 3일 하는 것도 처음인데 럭셔리하게 가자."
"그래도 KTX 타면 40만 원이 넘어"
민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거들었다.
"그래, 100만 원으로 갔다 오자. 숙소하고 이것저것 해서 60만 원으로 잡으면 일인당 25만 원이야."
딱히 알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장학금을 받는 것도 아니라서 용돈을 모으던 우리는 어차피 한 번인데 모아놓은 돈으로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민규야."
"뭔가 불길한데? 왜?"
"무궁화호 열차표 끊었잖아."
"근데?"
"한 번 더 갔다 와라."
"내가 KTX 끊으라고?"
"어차피 니 돈으로 끊는 거 아니잖아."
"알았어. 무궁화호 환불하러 가서 KTX로 바꿔올게."
호텔은 주미가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딱히 좋은 곳이라고 확신이 드는 곳이 없어서 그냥 이번에 새로 오픈한 신라스테이에 묵기로 했다. 해운대 모래사장이 바로 앞에 있어서 발목까지만이라도 바닷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먹는 것은 뭐, 아무거나 사 먹으면 되겠지.
첫째 날은 민규와 유리가 반드시 오전 수업은 다 듣고 가야 한다고 우겨서 열차시각 10분 전에 간신히 서울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규가 종이표를 받아왔는데 거기에는 몇 번 플랫폼으로 가야 하는지 쓰여 있지 않아서 전광판을 보면서 찾아보아야 했다.
"4번이다!"
유리가 외쳤고 또다시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에는 이미 사람이 많아서 꼼짝없이 서서 내려갔다. 플랫폼에 내려서서 11번 칸이라는 표시가 있는 곳까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열차가 도착했다. 민규가 끊어온 표는 날짜가 다 돼서 급히 끊어서 그랬겠지만 네 명이 각각 다른 곳, 통로 쪽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창가 쪽에 앉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면 우리도 계속해서 일어났서 비켜주었다가 다시 앉고를 반복했다. 버스건 택시건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탈것 안에 엉덩이만 붙이면 잠이 드는 주미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럭셔리한 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숙소가 비싸서 방을 두 개 예약해서 바로 민규와 나는 같은 방에 짐을 풀었다. 고등학교 때는 커다란 방에 아이들을 몰아놓는 그런 곳에서 잤고 엠티 역시 그런 분위기였기에 이 정도만 해도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듯한 럭셔리였다. 옷 정리만 마치고 로비로 내려와서 우리 넷이 나가서 조개구이를 먹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대충 햄버거를 사 먹었는데 유리와 주미는 곧바로 해운대 바다에 나가서 놀다 들어왔고 민규와 나는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다가 잠들었다. 아무래도 햄버거에 곁들인 맥주가 쌓였던 피로에 마침표를 찍었던 모양이다.
대망의 둘째 날에는 지하철을 타고 자갈치시장 근처로 가서 영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그다지 바라지 않았지만 나머지 세 명이 영도에는 유명한 다리가 있다면서 꼭 가야 한다고 우겼다. 아쉽게도 막상 도착하니 바람이 많이 불어서 행사는 취소되었다고 공지가 붙어 있어서 그냥 영도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리를 걷는 동안 점점 몸이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멍하고 머릿속에 안개가 끼는 듯 답답하면서도 몽환적이었다. 멀미가 나는 건가 싶어서 다리 난간 바깥쪽을 바라보았는데 바닷물의 물결에서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보려고 점점 인상을 쓰자 물결 하나하나마다 눈이 하나씩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들, 수많은 눈들은 제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정박된 배들 바로 뒤의 한 무리의 눈들은 모두 우리 일행을 보고 있었다. 우리를 보는 눈들이 많아지다가 다리 중간쯤 갔을 때는 난간 위로 까치발을 해야 보일 만한 위치의 눈들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야, 뭐 하냐? 더워서 그래?"
주미가 물었다.
"바닷물이 우리 보는 눈 보여?"
하고 물었지만 주미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 건너면 나무 많다. 그늘이 늘어나면 좀 나을 거야."
좀 나을 거라니? 햇빛 말인가? 아니면 눈들이 우리를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
"우리를 쳐다보는 거..."
신경이 거슬려서 조금 크게 말했다.
"건너편도 관광객인가 봐. 옷차림도 그렇고, 우리 쳐다보는 것도 그래. 중석이가 신경 쓰이나 봐."
"그렇긴 하네. 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가."
다들 바다 쪽은 보지도 않고 말하고 있다. 다시 배에 힘을 주고 조금 크게 말했다.
"바다 봐봐."
내 말을 듣고 셋이 모두 바다를 바라보았다. 눈들이 이제는 전부 우리를 쳐다본다. 일부는 나를 보지만 이제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어 보인다. 내가 보지 않는다고 나를 보지 않을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셋은 바다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시선을 모두 무시당하니 파도가 조금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배들이 꿈쩍하지 않는 것을 보니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 눈들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산은 우리를 반기지 않았다. 영도에 들어서자 가로수의 나뭇잎에도 눈이 달려 있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나무마다 절반 이상의 나뭇잎들이 적대적인 표정으로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눈만 있는 게 아니라 손발도 있었다면 우리를 때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도 어디선가, 눈들은 드디어 눈 말고 다른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눈빛으로 공격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착장 가까이에 접근하자마자 한 명, 한 명 공격을 받고 바다로 떨어졌다. 나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떨어진 게 행운인지 모른다. 차가운 바닷물이 공기 대신 폐를 차갑게 식히는 게 느껴졌다.
내 십 대는 이십 대에 접어들고 나서 5개월 만에 마무리되었다. 그 시기는 정확하게 나누어진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사람들이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서로 얽히고 갈등을 빚었지만 결국 모두가 내 십 대라는 하나를 이루는 요소들일뿐이다. 단단한 모래시계 안의 모래들처럼. 그리고 단단한 모래시계의 유리를 정확하게 절단하는 일은 부산 바다가 도와주었다. 부산 바다가 그런 걸 도와줄 줄 몰랐다. 부산에 가자고 한건 민규였으니까. 하지만 바다와 마주친 덕분에 나는 정확하게 한날한시에 십 대를 절단하고 박제할 수 있었다. 모래시계를 모래시계라고 부르듯이 나는 나의 십 대를 주미라고도, 유리라고도, 민규라고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십 대에서 끝났다면 더 완벽했을 수 있겠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아 줄 사람이 없었을 테니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 눈들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확하게 아는 건 그 눈들이 보내는 강력한 의지는 나는 거스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채찍질하듯 방출하는 그 의지에 민규는 바다에 빠졌고 눈들은 미소를 지을 때처럼 순간 반쯤 감겼다. 그리고 그 황홀함에 주미도 유리도 기쁨의 환호성을 부르며 바다로 뛰어내렸다. 민규와 주미와 유리가 내 모래시계의 모래가 되도록 했던 것처럼 나 자신에게 할 수 없었기에 두 팔 대신 두 다리로 힘껏 날아올라 눈에게 나를 바쳤다. 바다의 수많은 눈들은 내 발이 물에 닿는 순간이 되어서야 함박웃음을 터뜨리듯 일제히 감았다. 물속에서 나는 둔탁하고 무거운 눈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경찰에게 눈들의 존재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물결에 떠 있는 눈이라고 표현했다면 미쳤다고 했을 테니 쳐다보는 사람들이라고만 정정했을 뿐이다. 알 수 없는 무리가 우리를 차례차례 밀었고 심지어 나는 바닥에서 떠올라 날아갈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경찰도 그 근처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찾아보았지만 알지 못한고 했다. 나도 궁금하다. 그 눈들이 누군가를 시켜서 그런 일을 한다면 그 누군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나는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거울 뒤쪽에 비친 두루마리 휴지가 한 칸 내려와 있다. 그 한 칸의 가운데에 눈이 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