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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꾸미기

헤밍웨이와 파리

by 루펠 Rup L

출장에서 두 번씩 읽은, 파리 생활에 대한 헤밍웨이의 글을 묶은 책은 내가 푹 빠져서 결국 볼펜을 대게 되었다. 단, 출장을 가면서 0.28mm짜리 볼펜을 챙기지 않은 탓에 무엇 무엇을 써야겠다는 생각만 잔뜩 하고 실제로는 손도 대지 못하고 왔지만 오늘 드디어 처음 볼펜을 대었다. 이제 막 시작한 것이라 작업이 다 끝나고 나면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충 광장처럼 복작거릴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책을 두세 번 읽으면서 사랑이나 안타까움 같은 1차적인 감정들 외에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즐거운 마음이 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썼기 때문일지 마치 앨리스가 굴 속을 회상하듯이 기쁨으로 가득한 환상세계를 들여다보고 묘사하는 것 같은 그런 글이라서 번역을 거쳐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치 화려한 축제가 끝나고 아직 그 열기가 가시지 않은 스페인의 흙바닥을 보는 오후 네시의 느낌이라서 모든 감정과 의미가 번역을 꿰뚫는 그런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의 흔적들과 기쁨과 슬픔의 조각들을 굳이 줍지 않고 바닥에 반짝거리는 그 상태로 눈길만 주고 걸어서 지나가는 여정을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일 거라는 사실을 곱씹으면서 읽었다.
볼펜으로 가장 먼저 표시한 것은 사진 자료들이었다. 자료 사진이 무척 많이 있어서 지도를 따로 뽑았는데도 굳이 더 뽑아서 붙일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결국 지도와 길은 보는 것보다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구글 지도로 보기로 하고 출력한 파리 지도는 붙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자료사진에 번호를 붙이고 본문에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위에 작은 글씨로 사진의 번호를 썼다. 사진의 번호는 사진이 있는 페이지 번호 뒤에 몇 번째 사진인지 번호를 붙였다. 예를 들어 28페이지의 아래쪽 사진이라면 28-2라고 쓰는 식이다. 각 챕터 뒤에 있는 주석에도 관련된 사진이 있다면 해당 사진의 번호를 써 주고 사진 아래 설명에도 그 사진의 장소가 언급되어 있는 관련 페이지를 적었다. 관련 페이지 번호는 원래 있는 사진도 있었지만 없는 사진이 더 많았다.
사진은 책 전체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이 시작되는 곳에 20~3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들어 있었다. 책의 배 부분에 사진만 모아놓은 부분은 표시를 했다. 사진만 보고 싶을 때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굳이 책 전체를 넘겨가면서 찾을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사진이 있는 부분에는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았지만 한 장씩 넘겨 가면서 세어 보니 해당 페이지도 페이지 수에 똑같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페이지 번호를 각 페이지 가운데 아래쪽에 일일이 손으로 적었다. 그래야 사진 번호를 쉽게 매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 위에 페이지와 관계없이 일련번호를 붙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럴 경우 일련번호로 해당 사진을 찾으려면 그 번호가 나올 때까지 앞에서부터 한 장씩 넘겨야 하기 때문에 페이지 수를 넣는 편이 나중에 찾기는 훨씬 쉬워진다. 한 시간 동안 작업을 했지만 챕터 2까지밖에 하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헤밍웨이가 다른 작가의 집에서 보았다는 피카소 그림과 주석에서 그 무렵 헤밍웨이가 구입했다는 그림을 작게(A4 용지의 1/4) 출력해서 오려 붙였다. 위쪽에 여백을 두고 잘라낸 다음 여백을 접어서 풀로 책에 붙인 것이다. 그러면 본문을 읽을 때는 접은 부분을 펴은 방향으로 그림을 위로 넘기고 책을 덮을 때는 여백 부분이 접히는 상태로 덮으면 된다. 헤밍웨이가 구입했다는 조르주 브라크의 그림은 Gemini에게 물어보아서 찾았는데 그 그림이 맞는지는 계속 찾아보아야 한다. 틀리다면 더 붙여야 한다. 그리고 먼저 붙인 그림 뒤에는 잘못 알았다는 설명을 써야 하고 말이다. 모든 흔적은 내가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없애고 싶은 흔적이 없으면 없애면 안 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 시간이다. 저녁 시간에 시작했기도 했고 풀로 붙인 부분도 잘 붙어 있게 하려면 다른 책으로 눌러 놓아야 하기에 여기까지만 하고 덮어서 눌러 두었다. 내일 아침부터는 틈이 나면 사진에 페이지 수를 적는 것, 본문에 관련된 사진의 번호를 적는 것을 이어서 해야 한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은 글감노트에 잘 적어 두었다가 집에서 한 번에 프린트해서 오려 붙여야 한다.
할 일이 생긴다는 건 뭔가 부지런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책이나 글과 관련된 일이라면 신이 나기까지 하다. 퇴근 후의 일과가 재미있을 것 같은 기대가 되는 일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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