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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에도 커피를 마신다

by 루펠 Rup L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일이, 커피의 종류는 캡슐에서 에스프레소 머신, 모카포트 등으로 바뀌더라도 어느새 커피 향을 음미하며 잠시나마 모든 정신을 가라앉히는 일이 아침마다 출근 전 하나의 의식처럼 되었다는 글을 쓰려고 했다. 어떤 글을 쓰려고 하면 그 글에 대해 첫 문장이 마치 영화 같은 곳에서 주인공의 마음을 설명해 주는 내레이션처럼 울려 퍼진다. 그 문장을 재빨리 받아쓰고 나서는 온갖 희망을 가지고 내 내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때로는 그 문장들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울리듯 기어 나오지만 어떤 때는 오늘처럼 첫 문장만 달랑 불러주고 끝날 때가 있다. 오늘도 그랬다. '커피를 마시는 게 뭐? 나만 이래? 오늘만 이래? 하나의 의식처럼 굳어진 일정인 거 맞는데 뭐 어쩌라고?' 속으로 아무리 얼르고 달래 보아도 더 이상의 문장이 튀어나올 리 만무하다. 어차피 그건 끊어진 문장이다. 그 앞에 거창한 어떤 말들이 화면을 흔들어 놓았건 그렇게 되는 순간 글은 거기서 끝난다. 이제 내 힘으로 헤쳐 나갈 차례이다. 언제 마셨던 커피는 어땠고 언제 마셨던 커피는 원두가 어땠는데 결국 향이 어땠다, 등 할 수 있는 말, 그중에서 첫 문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을 계속 늘어뜨린다. 실을 그렇게 늘어뜨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실이 다시 팽팽해질 때가 온다.
'물었다!'
여기부터는 다시 문장과의 줄다리기이다. 아까보다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집중이 지나쳐서 다시 생각을 놓치는 일이 없게 한다. 키보드를 치는 속도도 다시 조금 헐렁하게 한다. 무엇보다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순간, 지금만 놓치지 않으면 끝까지 쓸 수 있다. 짧은 글인지 긴 글인지는 상관없다. 정상적으로 마무리를 했다는 느낌이 드는 글이기만 하면 된다.
아침에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나, 언제나 글감노트에 적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 뿐만이 아니다. 아침에 글을 쓰려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가 기다릴 시간도 없어서 결국 글은 지우고 회사에 가서 글감노트에 첫 문장만 다시 적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시계를 보고 여유가 있다 싶으면 어쩔 수 없이 욕심을 부리게 된다.
한편, 오늘의 커피는 아주 맛있었다. 아침마다 스타벅스 아니면 이디야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일주일 간의 출장을 마치고 와서 제대로 출근 전 마시는 커피이다. 출장 전과 똑같은 테라로사 원두를 가지고 똑같은 그라인더로 굵기 조절도 따로 다시 하지 않고, 똑같은 모카포트에 똑같은 불로 내렸어도 주말에 마시는 커피와 출근 전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엄연히 맛과 향이 다르다. 아마 여유가 있는 와중에 마신 것인지, 힘들게 여유를 찾아가며 마시는 것인지, 혹은 그 커피를 마심으로써 여유를 찾게 되는 것인지 등에 따라 내 몸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수도 있다. 일곱 시 사십 이분. 이제 삼 분 후면 집을 나선다. 커피가 한 모금 한 모금이 소중해지는 시간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쓰는 글도 아름답다. 글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글이 헐겁게 다시 이어지면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주위를 휘감는 듯한 느낌이다. 휴가 중이나 출장 중에도 글은 쓰지만 이 정도의 여유는 아니다. 바쁨 중에 억지로 짜낸 여유라면 커피의 여유만 한 게 없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커피 덕분에 누리는 하나의 사치이다. 커피를 마실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누워 있거나 했을 것이다. 아마도, 커피가 아니었다면 첫 문장이 생각이 나는 일 따위도 없었겠지.
일과 중에도 커피를 많이 마시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여유를 찾기 위해 마시는 것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마시는 경우도 있고, 피곤해서 마시는 경우도 있다. 여유를 찾기 위해 마시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 바쁠 때는 커피를 마신다고 여유를 찾게 되지는 않는다. 여유로운 커피는 아침에만 마실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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