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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다림질

by 루펠 Rup L

역대 이런 여름은 처음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폭염주의보와 호우주의보를 넘나드는 일기예보가 전국에 걸쳐 게릴라처럼 내려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인터넷에서는 나사에서 올해 여름이 역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는 그림이 돌아다녔다. 그 그림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앞으로 있을 여름 중"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출퇴근을 지하철로 한다. 퇴근할 때는 종종 아내가 회사 앞으로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온다. 지하철을 탈 때도 버스는 타지 않고 집에서 걸어가도 10분 이내로 걸리는 거리에, 회사 앞에도 회사 사무실에서 출발해서 10분 이내의 거리에 지하철역이 각각 있어서 편리하다. 그동안 출퇴근을 하면서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날이 아니면 그 거리를 걷는 데에는 아무 불만도, 불편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여름은 조금 달랐다. 심지어 여유로운 주말의 상징이었던, 시청역 앞에 내려서 덕수궁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을 보고 광화문 쪽으로 걸어서 교보문고 구경을 하는 단순한 코스조차 힘에 겨웠다. 수문장 교대식을 보는 것도, 그 교대식을 하는 사람들의 긴 팔 전통복을 보는 것도, 땡볕에 서 있는 것도 모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있는 그늘에 가면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교보문고에 도착할 때까지는 더위에 온몸이 포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교보문고에 도착했다고 해서 다시 기운이 나는 게 아니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까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때까지는 계속해서 지쳐갈 뿐이었다.
사실, 나는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고3이 되어서야 교실마다 냉온풍기가 있어서 여름에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켤 수 있으면 켰을 뿐, 교내 변압기가 터져서 한동안 선풍기만 사용해야 했을 때도 더워서 다들 아우성만 쳤을 뿐, 기운이 어디론가 새어 나가는 것 같은 느낌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대학 때도 지하철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나면 그것 때문에 감기 기운이 생기는 것 같은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다르다. 오래 쐬지만 않으면 에어컨 바람도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기에 따라 에어컨 바람이라도 쐬어야 하는 때가 있고 에어컨 바람 없이도 그늘이나 실내에만 있으면 되는 때가 있다.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있다. 전자제품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가전이라고는 에어컨과 공기청정기, 겨울에 사용할 히터 정도이다. 텔레비전도 없다. 게다가 에어컨이든 공기청정기든 허구한 날 틀어놓을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올해는 작년과 다르게 툭하면 에어컨을 틀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에어컨 바람을 쐰다고 해도 일이십 분만에 좋아지지 않을 만큼 지하 주차장에서 집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 사이에 몸이 순식간에 지쳐갔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 걸어오는 거리가 있는 만큼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몸이 지친 상태에서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내가 지친 것이 단순히 온도가 높아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에어컨을 틀어도 덥지만 않을 뿐 불규칙한 공기의 주름이 계속해서 온몸을 휘감고 체온 대신 기운을 빼앗아 가는 것 같은 기분은 태어나서 올해 여름에 난생처음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주에 걸친 고민 끝에 제습기를 하나 구입했다. 이건 글을 쓰는 능률 같은 문제가 아니라 생활과 정신건강에 대한 문제였기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에어컨으로도 제습이 당연히 될 거 같지만 막상 도착한 제습기를 틀고 나니 그 생각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밤새 제습기와 에어컨을 함께 틀어서 제습기로 습도를 내리고 데워진 공기를 에어컨으로 식혔는데, 단순히 에어컨을 사용하면서 따라오는 제습 효과와는 확연히 달랐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기의 주름을 폈다고나 할까. 공기 자체가 습기를 머금어서 온몸에 착 달라붙던 것을 뜨거운 다리미로 쭉 펴서 수증기를 빼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밤새 제습을 하고 나면 아침이 되면 물통이 다 찼다는 알람이 떴다. 물이 얼마나 차야 알람이 울리는지 몰랐기에 일부러 알람이 울릴 때까지 물통을 비우지 않고 기다렸다가 알람이 울리자마자 물통을 꺼내 보니 물통을 비우기 위해 화장실에 갈 때 조심해야 할 정도로 맨 위쪽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비가 와서 더 빨리 물통이 찼는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계속해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습도가 높기는 했었던 것 같다.
온도를 24도까지 설정하던 에어컨도 지금은 26도 정도로만 맞추어서 사용하고 있다. 습도만 낮추어도 그 정도 온도면 충분히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전자제품이 있으면 더 편리하다고만 생각했지 공기 질을 바꾸는 것이 필수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공기질이라고 해서 미세먼지 같은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몸의 기운을 흡수해서 정상적인 생활조차 힘겨워지게 하는 공기를 다시 보송보송하게 바꾸어 주는 것도 충분히 공기 질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마가 지나고 정상적인 여름이 과연 찾아올까? 에어컨만으로, 혹은 제습기만으로 충분한 밤이 올까. 열대야라면 둘 다 있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둘 중 어떤 게 나은 걸까. 혹자는 제습기를 틀면 따뜻해지더라도 한겨울에 보일러를 뜨끈뜨끈하게 튼 것 같은 느낌이라 틀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확실히 습도 자체에 있어서는 에어컨보다 나은 것 같기는 한데 나뭇잎이 떨어지는 계절이 오기 전까지는 올해는 계속해서 테스트의 나날이 될 테니 성급하게 궁금해하지는 말아야겠다. 어차피 올해 여름도 한 달 넘게 남았고 더욱이 내년 여름은 올해 여름과 다른 계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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