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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에 익숙해짐

by 루펠 Rup L

글을 쓰는 것보다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은 글을 읽는다는 행위이다. 말을 배우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글로 이루어진 세계, 책과 같은 글의 모음을 접하지 않고는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어쩌면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속기사가 만든 녹취록 같은 글만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똑같이 말을 글로 옮겼다고 해서 문어체만 아니면 되는 게 아니다. 글을 많이 읽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면 문어체가 아닌 문장들만 적히는 게 아니라 사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이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담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 대화 상황을 상상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글만 읽어서는, 단순히 문장의 내용만 파악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들이 간혹 나오기 때문이다. 대담집은 대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대화의 분위기 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최대한 생생하게 상상해야 앞뒤 문장들이 연결이 된다. 분명히 글인데 그 글을 일반적인 글을 읽듯이 읽으면 오히려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담집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 상황이 생생할수록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단지 내 개인적인 취향이다. 그래서 대담집을 출판하는 데에 딱히 반대하지는 않고 그저 절대 읽지만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담을 정리한 책은 다르다. 대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상상해야만 이해가 가는 것들을 문맥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다시 정리를 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건 또 단순한 요약과 다르다. 요약은 글을 쓴 사람이 핵심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가장자리를 쳐낸 것이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얼마나 열띤 토론을 했든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현장에서 눈을 마주 본 사람들끼리 암호를 교환하듯 하는 대화는 걷어내면서도 자의적으로 내용들을 잘라버리지는 않는 단순한 정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글은 구하기 힘들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을 쓰기 위한 선행 조건이고 그 말은 어떤 글을 쓰느냐는 것이 어떤 글을 읽어 왔느냐 하는 것에 대단히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내가 읽을 글을 선택해 주는 사람은 나다. 그렇게 선택된 글을 읽는 주체는 나다. 그렇게 쌓인 문장들과 분위기들을 조합해서 내가 쓰려는 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주체는 나다. 그때그때 알맞은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나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 주체들이 나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글을 읽을 때는 글을 읽기에 알맞은 의지를 발휘하고 글을 쓸 때는 글을 쓰기에 알맞은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에 글을 읽을 때의 나와 글을 쓸 때의 나는 상당히 다른, 심지어 야누스 같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만 글을 읽는 것은 아니다. 글을 충분히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필수는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담집만 실컷 읽고 글을 쓰면 이해하기 난해한 글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매도하는 건 아니다. 대담집을 읽으며 속으로 정리를 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은 그 정리된 상태를 읽은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 실제로 있었던 대화를 글로 옮길 때도 대단히 논리적으로 정리될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나에게 없는 내용에 대해 논할 생각은 없다.
언제나 책을 읽는 것은 중요한 일과이다. 10분이라도 시간이 남으면 책을 읽으려고 한다. 전자책을 읽을 때도 있고 종이책을 읽을 때도 있다. 책은 예전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읽었고 때로 그것이 자랑스러웠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글을 읽을 때도 때와 장소를 가린다.
예전에는 누워서도 핸드폰으로 글을 쓰고는 했다. 어차피 팔리지 않는 글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쓰는 건 어떻게 쓰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르다.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마치 그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글 한 편에 대한 최초의 구상은 침대에 누워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실제 글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제대로 된 글이 될 것 같지 않으면 가방에서 글감 노트를 꺼내 한두 줄 적기도 하지만 바로 글을 써도 된다고 생각하면 책상에 앉아서 키보드를 꺼낸다. 그게 글에 대한 예의라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단지 거기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제는 웬만하면 책상에 앉아서 읽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익숙함의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는 침대에 누워서도 잘만 읽었는데, 심지어 대학 시절 증산도 도전과 쿠란 한글판 등을 읽을 때는 온몸을 꼬며 침대에서 굴러가면서 노트북으로 읽었다. 노트북을 뉘어서 읽기도 하고 세워서 읽기도 했다. 화면을 옆으로 회전시킨 다음에 침대에 세워 놓고 읽기도 했고 침대 머리맡에 베개를 세워 두고 거기에 기대어 책을 읽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집중을 하면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탓에 이십 분 정도만 읽어도 등이 뻐근해 온다.
자세 때문에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때도 책상이나 식탁에 앉아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책에 표시를 하거나 글을 쓸 때는 당연한 일이지만 단순히 글만 읽는데도 책상에 앉아야 한다니. 마치 초중고 시절 바르게 앉으라던 잔소리를 몸소 실천하는 느낌이어서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책을 읽지 않고 침대에 있을 때는 핸드폰만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책과 절대 읽지 않을 책이 구분이 된다. 책을 읽기로 하고 읽지 않아야 할 책을 제외한 후 좋아하는 책 중 한 권을 고른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책도 손에 들고 있다. 그러면 반드시 앉아야 한다. 바른 자세, 글을 쓸 때와 똑같은 자세로 책을 펴야 한다. 그리고 읽는다.
침대에서 비스듬한 자세로 책을 읽으면 오래 읽지 못하지만 의외로 식탁이나 책상, 카페 테이블에서는 한 권을 다 읽도록 근육이 멀쩡하다. 단지 침대에서 책을 읽을 때만 무리가 간다. 책상에 앉는 건 번거로운 게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조건을 찾은 것이니 그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책을 읽어 나가야겠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이삼십 분이면 몸이 더 이상 이렇게 못 읽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자세를 굳이 유지할 필요는 없으니까. 괜찮은 자세를 찾았으니 계속 읽기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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