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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스토리다

by 루펠 Rup L

몇 년 전, 언어 보존의 차원에서 출판되었다는, 사투리로 된 어린 왕자가 서점에 나와서 여러 군데에 사서 선물로 준 적이 있다. 사투리로 되어 있는 것이 신기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어를 보존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특히 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묻혀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줄 수도 있고, 다양성이 인류 생존의 제1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필코 붙잡아야 할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프로젝트는 '번역'의 문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대한 글을, 내가 글을 더 많이 쓰고 나면,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나면 쓸 수 없는 말일 것 같아서 지금 쓰려고 한다.


나는 언어 다양성을 소설을 통해 나타내는 것은 기필코 반대한다. 번역을 하면서, 혹은 일상적인 글을 쓰면서 그런 언어를 쓴다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디서든 똑같겠지만, 주객이 전도되면 아무리 인위적으로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야기는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당연히도 이야기를 품고 있는 글 역시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이 제1 목적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순우리말을 더 소개하기 위해서 쓴 글을 많이 보았다. 인권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쓴 글들이야 우화를 받아들이듯이, 딱딱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말 단어를 소개한다는 것, 혹은 언어 자체를 비틀려는 의도에서 쓴 글은 그 의도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걸 소설을 가지고 하려는 것인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썼길래 그걸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의도한 단어를 모두 이해해야 하는가?
꼭 우리나라의 우리말 단어에 한정된 말은 아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순우리말을 한자어나 외래어와 대칭해서 백날 표를 만들어 배포한들 누가 그 말을 사용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우화처럼 소설을 통해 그 예시들을 펼쳐 보인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수단의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예를 들자면, 피네간의 경야라고 번역한, 피네간의 밤샘축제를 들 수 있다. 애초에 영어를 심각하게 꼬아서 만든 소설인데, 소설이라면 스토리가 중요한 것을, 우리나라에 번역된 걸 보면 스토리를 번역한 건지 언어를 꼬은 걸 보여주려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다. 소설을 읽는 첫 번째 목적은 스토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스토리를 통해 느끼는 게 무엇인가가 소설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드는 감상일 것이다. 그런데 단어 하나하나를 감으로 이해해야 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을 번역할 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꼰 것을 푸는 과정을 우리 언어로 똑같이 할 것이 아니라, 설사 그런 욕심을 내고 싶다고 하더라도 우선은 그 스토리를 먼저 번역을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이상한 한자어를 써서까지 그 작품에서 영어로 꼬아놓은 것을 동일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면 그걸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이스는 파리에 머물면서 그 글을 썼다고 한다. 마치 한국어를 쓰지 않는 지역에서 한국어로, 한글로 글을 쓴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언어에 대해 조금 더 감수성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글을 번역함에 있어 그 감수성을 우리말에 강제로 이식하는 게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우리말도 아니고 이상한 한자 조합어로 만들면서까지 한 건 그 수고는 인정하지만 소설을 소설로 보지 않고 번역했다는 방증에 불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맞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성의 없는 번역에 항의하는 중이다. 독자 입장에서 성의 있는 번역은 저자의 의도를 어떤 방향이든 순수하게 지켜지려고 하는 번역이 아니라 독자가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는 번역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보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내용 자체를 파악하는 데 유리할 수도 있는 그런 번역이다. 그게 아니라 조이스의 의도만 충실히 따르느라 독자는 나 몰라라 하고 싶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논문으로 발표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써서 자기네끼리 학회 내부 자료로나 쓸 일이지 그걸 대중을 향해 성의 없이 출판해 놓고 그걸 가지고 안 팔려서 오자도 수정할 수 없다느니 하는 건 그야말로 학자들의 숫자놀음이며 교만밖에 되지 않는다.
영미권에서 조이스의 소설이 난해하다고 하는 건 그럴 수 있다. 비슷하게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가지고 그렇게 이리저리 조합한 글을 써도 난해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인들이 그렇게 난해해서 아예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면, 이해한 대로 번역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소설의 번역물을 읽는 독자라면 그 소설의 내용을 알고 싶지 어떤 단어를 꼬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조이스 소설의 한국어 번역물들은 가차 없이 잘난 척의 산물로 나온 쓰레기라고 말한다. 만약 양심상이든 뭐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면, 번역이라고 하면 안 된다. 내용을 온전히 전달할 의도가 없는 게 번역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다만 능력이 없는 것이다. 중의적 의미? 그걸 꼭 한자어를 써서만 전달해야 하나? 본문이 중의적이면 모든 번역문이 중의적이어야 하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고민이 없었다. 각 단어에 중의적인 부분이라는 표시만 수많은 한자들을 들여서 정성들여 했을 뿐,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한 고민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생만 하고 남는 게 없다는 게 아니다. 그건 그냥 고생해서 쓴 논문이다. 대중을 향해 썼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다.

한편, 새로운 번역이라고 하는 번역물도 읽어 보았다. 라 페스트는 페스트가 아니다, 라면서 그 번역가의 새로운 번역을 읽으라는 말이 워낙 많이 나왔는데 그동안 읽은 게 틀렸다는 식의 광고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읽지 않았었지만, 혹시나 괜찮으면, 그런 문구에 걸맞은 번역이라면 읽을 만하겠다고 생각하고 시험 삼아 헌책방에서 그 사람이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 보았다. 세 페이지를 채 읽지 못했다. 번역... 힘든 건 알지만 제대로 번역했다고 하기에 너무 부끄러웠다. 도저히 부드럽게 읽히지가 않아서 짜증이 났다. 그 책을 읽고 위대한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고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우리말이 우리말답게 읽혀야 다 읽고 나서 뭘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할 게 아닌가? 기본적인 문장들이 툭툭 끊어져서 도저히 읽히지가 않아서 결국 그 책은 책꽂이로 갔지만 아마도 스티커만 떼어서 다시 헌책방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번역은, 그냥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해 주었으니 감사하게 읽으라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스토리를, 문장을 독자가 이해할 수 없으면 그건 번역이 아니다. 요즘은 대학 교재도 번역이 형편없으면 그냥 원서로 읽는 시대다. 독자를 '이 책 아니면 사지도 못해.'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면 스토리를 이해하고 문장을 쉽게 해 주려는 노력 없이는 번역을 했다고 명함도 내밀면 안 되는 시대이다.
정말이지, 이상한 곳에 정성을 쏟고는 독자를 원망하는 걸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번역은 단순히 문장을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외국어이기 때문이든 무슨 이유든 잘 읽히지 않던 것을 읽힐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번역이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을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번역이다. 새로운 공부거리를 던져 주거나 번역가 본인이 신경 쓴 곳만 우쭈쭈쭈 해주기 바란다면... 글쎄, 그렇게 해서 제대로 벌어먹을 수 있는 분야가 주 독자층인 사람들 사이에서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 독자층의 선택을 받고 싶다니 뻔뻔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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