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꼭 필요한 일만 마무리하고 시간 휴가를 내고 나와 버렸다. 일하는 동안 건물 안에만 있었으면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한데 야외로 나가서 돌아다녀야 하는 일을 몇 가지 하고 나니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버렸고 나중에 사무실에서 땀을 다 식히고 나서도 기운이 돌아오지 않았다. 요즘 같은 날씨는 굳이 뭔가를 열심히, 무리해서 하지 않아도 쉽게 지쳐 버리고 만다.
여름이라 안 그래도 퇴근하고 나면 곧바로 어두워지지 않아서 왠지 저녁 시간이 넉넉한 느낌인데 오늘은 집에 도착해서도 아직 평상시라면 퇴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을 상황이다 보니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인가 아내가 그럼 글 쓸 만한 카페가 또 어디 있는지 보러 갈까요, 하고 물었을 때 나 역시 살짝 혹하기는 했지만 곧 그냥 길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자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와 버렸다. 카페에 가면 물론 시원하겠지만 카페까지 가는 데 몇 분이 걸리는지, 즉 길에서 햇볕을 맞으며 더운 공기 속에서 호흡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였다. 그리고 카페에서 시원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다시 집에 돌아오는 길도 또다시 더울 것이다. 카페에서도 이렇게 지친 날은 하려던 것은커녕 멍하게 풍경이나 보다 오기 일쑤이다. 주말 오전처럼 밖에서 지치더라도 집에 와서 점심을 먹으면서 힘을 내면 다시 하루를 마저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관계없지만 하루의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대신 집에서 보낸 저녁 시간이 특별히 뜻깊었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냥 일상적이었다고, 평범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책을 읽어야지, 하고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책은 읽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편지글을 모아 놓은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책상에 올려놓고는 이런저런 글만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아직 더위가 사라지기 전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찬물로 샤워를 했더니 평범한 저녁이 되었던 것 같다.
한 달째 이렇게 더운 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집에서 에어컨과 제습기를 틀지 않았던 때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에는 외출할 때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곤 했는데 지금은 창문을 열면 금세 습도가 85%까지 오른다. 제습기를 틀어서 습도가 60% 정도만 되어도 피부에 뭔가를 감아 놓은 듯한 느낌은 없다. 에어컨을 틀면 25도와 26도 사이에서 25도는 너무 피부에 싸늘하고 26도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제습기를 틀어 습도를 낮추고 나니 26도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25도는 습도가 낮으면 그냥 살짝 싸늘한 느낌인데 습도가 높으면 으슬으슬하다. 오한이 들었을 때 한기가 스며드는 느낌 비슷하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차가워진 것일 텐데 아마도 젖은 옷을 입은 느낌이라고 할까.
점심때 뉴스를 보니 이제 장마는 끝났고 무더위만 남았다고 했다. 그런데 습도는 그렇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그나마 중간중간 비가 내려서 습도가 100% 가까이 되는 그런 일만 없을 거라는 뜻인가? 그러면 아마 카페에 가는 건 8월 동안에도 참아야 할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여행을 다녀오거나 할 때, 집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집이 최고다'라고 말씀하시고는 하셨다. 너무 당연한 듯이 듣던 말이라 집에 들어올 때 하는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의 장기외출 버전쯤으로 머릿속에 박혀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게 사실이다. 집이 최고다. 더울 때 맥주 한 잔조차 다 마시고 다시 집에 돌아갈 일을 생각하면 안주가 맛있는 술집보다 그냥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맥주캔이 훨씬 낫다는 느낌이다. 낭만을 생각하면 야외 테이블이 있는 맥주집에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기다란 500mL 잔을 들고 한 모금씩 목을 축이는 것, 혹은 한강을 보면서 벤치에서 한 모금씩 캔맥주를 비워 가는 게 좋은 기억이었던 게 한 달 전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마시는 건 나쁘지 않지만 다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땀범벅이 되는 것이 너무 싫다. 이제 공원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는데 한강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다. 나처럼 맥주 한 캔이 밖에서는 최대치인 사람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벤치마다 소주병이 굴러다니던 것을 상상해 보면 좋은 정책 같다는 생각은 한다.
나는 단지 취향을 접고 가을을 기다리는 것이지만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손님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더위가 단지 귀찮은 게 아니라 원망의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카페에 가면 한산한 게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인가 싶기도 하다. 더위가 끝나면 저녁에 조금 싸늘하더라도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셔 보아야겠다. 남들 다 공부하고 있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써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카페가 두 개밖에 없을 리가 없으니 조금만 더 돌아다녀 보아야겠다. 그렇지만 눈이 내리면 또 이 핑계 저 핑계로 집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더위가 끝나고 추위가 오기 전에, 옛날에 비하면 손톱만 한 길이밖에 되지 않는 가을이라는 계절 안에 있을 때 다 해보아야 한다. 뭔가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집구석에 앉아서 욕심만 부려 본다. 계획도 아니고 그냥 추억에 잠기는 것 같은, 막연한 바람이다. 그래도 집 밖에 나가 육교 밑에서 들이쉬는 숨이 축축하지만 않다면 하늘이라도 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렇게도 상쾌한 공기를 그리워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