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의 이유

by 루펠 Rup L

한동안 몇 년에 걸쳐 글을 끄적일 때 수첩에 손으로 적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파일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길어야 3년 정도, 그리고 그전에도 블로그 운영을 해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손글씨로 적던 내용과 별개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 대부분 정보성 글이어서 손글씨로 수첩에 기록하기에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내용들이었다. 가치라는 것은 용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 떨어진다는 것이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글은 공개를 하면 가치가 올라간다.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내놓는 플리마켓처럼 블로그를 정보의 가판대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워드 파일 확장자로 저장하는 것은 그전에도 가능했을 텐데 그럼에도 손글씨를 고수한 것은 의외로 키보드로 글을 쓰면 작성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글은 두 가지 행위의 병행으로 이루어지는데,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놓은 상태로 관찰하는 것이고 하나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장을 써 내려가며 보는 것이다. 엄밀히 구분하자면 생각을 구분하고, 이것을 관찰해서 문장으로 만드는 것, 그 문장을 글로 쓰는 것, 마지막으로 그 글을 보면서 생각을 계속 이어서 선택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계속 스스로를 확인하면서 진행되어 나간다. 생각이 가지를 치면 글도 따라가고 문장을 세분화해서 설명하기로 하면 글에서도 앞의 문장을 해설하는 문장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일종의 실시간 피드백 작용이어서 문장이 시작되면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마치 자전거 체인처럼 앞부분이 뒤로 가면서 다시 앞부분을 끌어내고 다시 뒷부분이 따라오는 반복이 생각이 끊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글을 쓰기 위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각의 흐름을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상태가 된다.

처음에 컴퓨터로 글을 쓰려고 했을 때는 잘 되지 않아서 이유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수첩을 사용했다. 원래 문구류를 좋아하는 편이라 두껍고 만년필로 쓰기에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수첩이 있으면 구매하곤 했기 때문에 수첩이 모자라는 일도 없었다. 그러다 예전 수첩을 볼 일이 있어서 펼쳤는데, 어느 부분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검색도 되지 않는 오프라인 종이 자료이니 읽기 힘든 손글씨를 앞에서부터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 내용은 절반도 읽지 않고 찾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내가 왜 컴퓨터로는 글을 쓰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내가 필요가 없어 써 놓기만 하고 다시 읽는 일은 별로 없던 블로그 글을 하나하나 다시 읽어 보면서 결국 해답을 찾았다.

블로그 글을 보면 필요한 내용만 말하고 갑자기 뚝 끊기고는 했다. 필요한 내용이 있어서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만 보고 나면 마무리를 어떻게 했거나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을 쓰는 글에서도 어느 순간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내가 스스로 글을 쓰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자각심을 가지고 관찰하니 의외로 쉬운 문제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글을 쓰는 속도를 생각하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 손으로 글을 쓸 때는 생각이 매우 자유롭게 마치 다중 우주가 펼쳐지다가 현재에서 우리의 시간과 만나면서 하나로 합쳐지고 단 하나의 현재로 확정되듯이, 글을 쓰는 동안 마구 가지 치는 생각이 해당 문장이 쓰이는 순간에서야 문장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 느리게 글을 쓰면 멍하게 생각에만 잠기게 되지만 글을 쓰는 속도가 생각이 자유롭게 퍼져가는 속도보다 빠르면 생각이 그 문장에 도달하고 그 문장보다 앞서나가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전자는 되지만 후자는 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속도가 느려서 멍하게 딴생각을 하는 경우는 있는데 글을 쓰는 속도가 빨라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는 없었다. 글을 쓰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순간, 글을 멈추는 순간, 동시에 글을 쓰기 위한 생각이라는 것도 함께 멈춰 버렸다. 더 이상 그 글은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행위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생각을 방해하지 말아야 했던 것이고 우연히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속도가 알맞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계식 키보드를 찾기 시작했다. 그냥 기계식 키보드가 아니라 옛날 타자기를 흉내 내었다는 동그란 키를 가진 키보드 말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동그란 키를 가진 키보드들은 키와 키 사이의 간격이 넓고, 동그랗다 보니 위아래 공간도 있어서 키가 없는 곳이 완전 휑한 구멍이다. 그곳에 손가락이 빠지면 다시 자리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 천천히 꼭꼭 누르는 것이 요령이다. 그러다 보면 글을 쓰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예쁘면서도 나의 글쓰기 맞춤형 키보드였던 것이다. 회사에서는 무조건 빨리 쳐야 하니 일반 키보드를 사용하고 집에서는 그런 키보드를 사용했다.

지금 전자잉크를 사용하는 전자책으로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전자잉크 화면의 경우 단점이 글자를 쓸 때 화면 업데이트가 느리다는 점인데, 내가 개인적인 글을 쓸 때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 글자가 나타나는 게 느리다고 체감할 만한 속도로 글을 작성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아니,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수첩이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한 번씩 시간을 정해서 과거 수첩을 파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지겨울 수가 없다. 그 안에서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라고 생각이 드는 보물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가 한 생각이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다. 그럼에도 어차피 보관할 거라면 파일이 훨씬 유용하다는 것을 알기에 수첩을 버리거나 파쇄하겠다는 건 아니고 파일본'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서두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것은 생각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 가능하다. 글을 쓰는 도구는 무엇보다 생각이 자유롭게 되느냐 하는 관점에서 선택해야 하고, 그 관점에 적합한지는 아쉽게도 일일이 해 보아야 한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속도 조절로 간단하게 해결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는 순간 모든 생각이 싹 사라지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핸드폰의 쿼티 키보드에서 더 글이 잘 써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모두 이해한다. 미리 머릿속에 완벽하게 모든 글을 정리해 두고 빠른 속도로 보면서 키보드로 쳐 내려간다는, 모차르트 급의 천재 이야기를 들어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나 밖의 남들은 남들이니까 모든 일이 가능하다. 나는 나의 생각, 나의 글에게 충실하면 되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