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올림픽이 열리면서 사무실에서도, 뉴스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사격과 양궁 종목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양궁은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심지어 올림픽 기간이 아닐 때조차 반드시 나오는 주제이기는 하다. 우리나라는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 곧 메달을 딸 수 있다는 뜻이라는 이야기라던가, 올림픽 국가 대표로 뽑히는 것보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더 어렵다는 이야기라던가, 국가대표 훈련 때는 어떤 기발한 훈련으로 모든 상황에 대비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다. 숫자가 무한한 것도 아닌데 전체적인 수준이 높으니 그 결과 역시 일정한 상한선을 두고, 오히려 그 상한선을 하한선으로 딛고 선다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이건 다르게 생각하면 중국의 탁구와 비교할 수 있는데, 그곳은 말 그대로 거의 무한한 풀을 놓고 그 안에서 뽑는 거라서 우리나라 양궁팀이 국가 전체적으로 양궁 실력이 상향 평준화가 되어 있는 것과 정확히 반대 편에 서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몇천 만 명을 국가대표를 위해 훈련을 시키고 그 안에서 뽑는 것과, 몇천 명에 불과하지만 모두 세계 상위권이어서 그 안에서 최상위권을 추려내면 전 세계 최상위권이 되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둘 모두 준비된 바탕이 있어서 그 안에서 뽑으면 웬만하면 괜찮은 결과를 얻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작전이기는 하다. 열 명을 실력을 극대화하고 그 안에서 세 명을 뽑는 것이나 천 명 중 세 명을 뽑는다고 하고 무한 경쟁을 시키는 것이나. 다만 그 안에 들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느냐는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문제이기는 할 것이다.
글을 쓰는데, 아무래도 1920년대 이전의 글쓰기에 대한 글들을 보면 뭔가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자신만의 뭔가를 의도적으로 계발해 내겠다는 욕심 같은 것이 보인다. 단순히 개성의 차원이 아니라 그 특성 자체가 모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대단한 해석을 동반할 수 있으면서도 내가 글을 쓰는 방식과 엮여 있어서 그 방법이나 사상을 빼먹으면 글도 써지지 않고, 반대로 그것에만 의지하고도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게 되는 어떤 것 말이다. 마법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 꽤나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고 키워 나가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치 글쓰기도 근육을 키우듯이 훈련이나 공부를 통해 만들어갈 수 있지만 어떤 방향을 향해 가야 하는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해서,라는 듯했다.
이것은 시대적으로 보면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일상까지 침범해서 흐르던 사상적인 흐름이 글쓰기에도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기조라던가, 사상, 화풍 그런 것들이 쉬지 않고 이어서 나오던 시대에서 출판물 역시 그런 것이 충분히 화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글을, 뭔가 특별한 것을 만들고 싶어서 공부한다거나 하는 말보다는 그냥 결과론적으로 팔리는 책이 성공하는 것이라는 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쉽게 돈을 벌 수 있고, 부자가 되는 것은 뭔가를 열심히 갈망하면 된다는 식의 책이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우울증의 경계에서 심각하게 피부로 와닿은 것을 공유하는 책과 경쟁을 한다. 어떻게 썼는지, 왜 구상했는지와 상관없이 몇 부가 팔렸는지만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앞서 말한 대로, 출판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상적인 면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게, '반드시 맞는 건 없다', '상대성을 인정해야 한다.' 같은 것들이다. 계몽주의와 민주주의를 끝으로 사상의 뜻을 공유하고 그것이 온 세상을 커다란 카펫처럼 덮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걸 막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같은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고민할 경제적 사정이 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생각은 누구나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라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단지, 고민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게 맞을 것이다. 고민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반드시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고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고민을 할 수 있을까? 답이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도 일단 고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만에 하나 답이 나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금을 캐려는 사람은 사금이 나올 수도 있고 나오지 않을 수 도 있기 때문에 캐는 것이다. 하지만 사금이 나와도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금을 캐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있을 수 있을까? 없다. 고민에 대한 희망을 잃은 세대다. 인류는 변했다. 정해져 있는 것에 집착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은 미련을 가지지 않고 버린다.
처음에 양궁과 탁구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아이디어조차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것이다. 20세기에 니체를 비롯해서 여러 사상들이 폭발하듯 새어 나왔지만 모두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그 사상들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그런 사상을 향해, 인류를 정의하고, 인류의 현재를 정의하고, 우주를 정의하고, 물질세계를 정의하는 경향을, 큰 흐름을 이루는 수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고, 그 안에서 일부가 가장 그럴듯하다며 채택된 것에 가깝다. 아무도 상상을 하지 않는데 혼자 대뜸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면, 관심도 없는 대중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수가 없다. 일단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은 대중적인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에서도 여러 사조들이 보인다. 사실주의, 환상주의 등등. 그런 시도들 하나하나를 보면 작가가 눈에 띄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이 사조를 이룬다는 말을 들을 만큼 대중화되려면 대중들이 그 작품을 접하고 놀라기도 해야겠지만, 그전에 그런 놀라운 것을 놀라운 것이라고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갈망하는 대중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기다리는 대중과 그런 것을 찾아내려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서로 밀어대다 마침내 양쪽의 구미에 맞는 작품이 나오면 서로 미는 힘에 밀려 에베레스트 산맥처럼 가운데에서 모두의 눈에 띄는 곳까지 밀려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연습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을 수천 편을 똑같은 스타일로 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내가 글을 수천 편을 쓰면서 스타일을 바꿔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글을 수천 편을 쓰면서 스타일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꿔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내가 내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법을 모른다. 누군가의 스타일을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게 내가 원하는 방향이 될 수 있을까?
내 글을 쓰려고 하는데, 내 글은 내 글의 고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고유한 방식이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많은 글을 읽고 스타일을 찾아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 하지만, 추상화가 나온 이래 또렷한 기조라고 할 만한 것, 심지어 달리나 피카소에서 정확히 경계선을 긋고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것보다는 단지 개인의 개성만 가지고 나오는 상태가 된 그림에서처럼 나의 기조라는 건 과연 지금 세상에 그런 게 있는 걸까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그전에는 그런 게 있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일종의 환상일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헤르만 헤세나 괴테나 그들의 글을 쓰는 방식과 글이 읽히는 방식은 어떻게 보면 똑같을 수 있다. 모든 소설이 똑같을 수도 있고, 모든 에세이가 원칙적으로 같은 수준이라고 핤 수도 있다. 지금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시대이니까. 하지만 뭔가를 찾아 항해하는 것은 그것만의 낭만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항해할 목적지가 없어서 항해하지 못하는 게 지금의 상태이다. 이런 고민이 아직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일 뿐, 언젠가 답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돌을 깎아서 사냥을 해서 가을까지만 버티면 가을에는 밀알이 열릴 것이다,라는 식으로 중간중간 희망이 보이는 방향성이라도 존재하는 여정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은 칼 하나만 달랑 들고 허허벌판에 버려진 느낌이다. 당연히 열매도 없다. 사냥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멍청하게 서 있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