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그 마법은 단지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발휘될 뿐, 글 자체에 있는 힘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마법은 존재하며 글을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마치 열쇠구멍에 열쇠가 들어맞았을 때처럼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전적으로 글을 쓴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사이의 문제이지 물리적인 종이 블록에 불과한 책에는 아무 힘도 없다. 책의 형태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글 하나가 국가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열쇠는 열쇠구멍에 직진해서 들어간다. 다 들어가면 더 이상 가면 안 된다. 그렇다고 옆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직선을 따라 들어갔지만 더 이상의 이동은 없다. 다음 동작은 그 자리에서의 회전이다. 열쇠의 중심을 기준으로 각속도 운동을 한다. 그렇지만 각속도운동을 짐작이라도 한 듯 직진 방향으로 갈 때는 아무 영향을 줄 수 없었던 위치에 있는 요철들이 회전할 때는 열쇠에 있는 요철들 사이에 정확히 들어맞는지 심판을 한다 그리고 무사히 각속도 운동을 끝내고 나면 열쇠는 기능이 다 끝나고 그 자리에 물린 채로 버려진다. 그다음에는 자물쇠가 풀리기 때문이다. 자물쇠가 풀리면서 하는 역할은 이미 열쇠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창고의 문을 잠그는 데 사용하던 자물쇠이든 쇠사슬이 연결하는 데 사용하던 자물쇠이든 열쇠에게는 자물쇠만이 중요하다. 글을 다 쓰고 나면 글도 작가의 손을 떠나지만 그것은 상대방, 그러니까 독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 글의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감동을 받고 어떻게 도움을 받아서 독자가 무엇을 하느냐는 것들은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 글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글이 독자에게 읽히느냐, 감동을 주느냐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의 내면에 글을 쓴 사람이 전달하고자 한 것이든 뭐든 새롭게 풀어놓아지는 뭔가가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글의 이런 역할은 일면 바이러스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글이고 글의 내용은 그 단백질 구조물이어서 글을 읽을 때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성공적으로 그 구조물을 생각 속으로 풀어 넣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새포들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일일지 모르나 생각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때 사상전을 하면서 사상은 질병이라고 하던 것을 기억하는가? 소설 1984에서 외치던 것도 크게 다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도 빨갱이를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관련자들의 친척의 친구의 친구만 가까이해도 처벌하던 것도 다를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사상을 탄압하던 사람들이 믿었건 믿지 않았지만 탄압하기 쉬워서였건 그런 처벌은 전염성을 가정했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늘었다. 좋은 일이다. 전에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만 해도 좋아서 키보드에 손부터 올리고 보았지만 단순히 흰 종이를 수작업으로 가공해서 무늬가 있는 종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이상 뭔가를 쓰려면 그 위에 쓰인 글을 읽는 사람도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일면 당연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정신없이 달려오다 이제야 그 단계에 올라선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대중화되면서 뭔가를 레벨 개념으로 설명하는 게 익숙해진 분위기이지만 엄밀히 말해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힘든 경우가 많은데, 글을 쓰면서 그 글을 읽을 사람을 생각하지 않다가 생각하게 된 것은 레벨업이 맞다. 글을 쓰면서 중요한 것이 바로 나, 내 기분 상태이자 나에게 생긴 일인 것인 상태에서 조금 더 나아간 건데 이건 글을 처음 쓰는 차원에서 말을 처음 하는 차원으로 내려서 설명하면 네 살 때 말문이 막 트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응응"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준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가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배고파", "자동차 가지고 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목말라." 등 원하는 것만 간신히 말로 하는 단계를 지나 "예쁘다." 등 느낌을 표현하는 단계를 맞게 된다. 이때 느낌뿐만 아니라 생각을 표현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부모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대답만 해 주어야 하는 기관총 말하기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아건 아이가 의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인형과 대화를 하거나 강아지와 대화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대답을 해 주면서 문장을 고쳐 주어야 하는데, 그런 단계가 있는 것에는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 글쓰기 자체에 몰입해서 즐겁다는 마음으로 글만 쓰고 나 혼자 읽어도 좋다고 쓰던 글이 바로 이 단계였다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계속해서 뭐가 되었든 쓰고 싶은 때가 있는데, 글을 쓰고 싶지만 쓰고 싶은 주제는 떠오르지 않으면 애국가라도 옮겨 적어야 속이 후련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나의 마음과 말을 하기 시작할 때의 아이를 비교해 보면 아이가 의사소통이라는 것을 하려고 하는 때는 듣는 사람 상대방을 이제 막 고려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말의 문장 구조가 점차 복합적으로 진화하기 시작하는데, 글 역시 그 지점에 닿고 나서야 읽는 사람을 염두에 둔 글다워지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말의 용도는 의사소통이고, 단순히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말은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만 부모라면 그 말을 다 들어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폭발하듯 생겨난 말들이 어느새 잦아들고 나면 그때는 정말 의사소통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감동을 주는 글'이라는 말만 뜯어보더라도, 글을 쓴 사람이 감동받아 쓴 글이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이 감동을 받을 글이라는 뜻이다. 글을 쓴 사람은 지어냈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야기가 누구에게 일어났던 일인지, 소설인지 같은 글을 쓴 과정에서 생긴 일 같은 그런 것은 싹 지우고 감동적인 글이라고 하면 독자의 입장에서 감동적인 이야기가 적혀 있는 글일 뿐인 것이다. 감동을 주려고 어떤 노력과 어떤 기교를 부린 글인지 중요하지 않다. 독자가 그 글을 통해 감동을 받는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어떤 새로운 기술에 대해 설명한 글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조사해서 설명하는 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실제로 신기술이 대해선 알맹이가 없으면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책이라고 광고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 역시 읽어 보지도 않고 좋은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통하는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쓴 글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솟아나는 문장을 계속해서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처럼 일방적으로 쏟아낸 글이었다면 앞으로는 상대방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러니까 단순히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되는, 일정한 기대치가 있는 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때가 왔다. 당장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쉬운 일이라면 진작 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언제나 자연스럽지만은 않지만 느린 만큼 나에게는 운신의 폭이 나름대로 확보되어 있다. 그리고 딱히 다른 방법도 없다. 언제까지나 혼자 웅얼거리는 말만 쓰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게 쓰는 글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확신이 없어진 상태에 머무르는 것도 스스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누군가 옆에서 아부를 하며 지금 상태로 글이 완벽하다고 하지도 않는데도 계속해서 발전 없이 그 자리에 마냥 머무는 것도 어쩌면 타고난 뻔뻔함이 있어야만 할 일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