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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치

by 루펠 Rup L

여름휴가에서도 어김없이 글을 썼다. 호텔에서는 글을 써 보고 와야 한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거나, 빼먹으면 휴가가 휴가답지 않아지는 미신 같은 것은 아니다. 그냥 산책을 나가면 강아지들이 영역 표시를 하고 다니듯이 습관적인 일일 뿐이다. 글을 쓸 도구들은 어차피 출퇴근할 때도 들고 다니는 것들이니 짐을 싸면서 슥슥 집어넣는 것은 일도 아니다. 바닷가가 보이는 방에서 발코니 창으로 스며드는 모래사장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웃는 소리, 자기들끼리 서로 부르는 소리들, 그리고 간혹 창문을 열면 들리는 파도소리와 고개만 창문 쪽으로 돌리면 보이는 파란 하늘은 '내가 휴가지에 와 있구나'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게 만든다.
반드시 글을 그런 곳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평소와 다른 곳이니 색다른 느낌으로 글을 쓰는 것뿐이다. 매일 글을 쓰는 곳은 창문으로 보이는 건 항상 같은 옆건물인 조그마한 방 안이다. 지루한 풍경이라기엔 사실 어느 날 창밖을 내다보니 다른 건물이 보이면 좀 무섭긴 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방 자체는 호텔방에서 침대와 침대에 속한 공간이라고 해야 할 곳을 빼면 호텔보다는 크다. 익숙한 공간이라는 점이 다를 뿐인 것을 보면 직접적으로 글을 쓰는 데 호텔에 있다는 것이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호텔에서 글을 쓴다고 하면, 그것도 관광지가 아니라 일정한 장소를 정해 두어서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에만 찾아가는 곳이 있어서 거기서 매번 같은 방을 빌려서 글을 쓴다면 아마 어두컴컴한 방에 책상은 구석에 두고 스탠드를 켜고 글을 쓰지 않을까. 관광지에서 여유롭게 글을 쓰는 것은 취미로 글을 쓸 때의 일이고 글이 써지지 않아 장소를 옮겨 볼 정도라면 글을 쓰는 것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급하고 필수인 상황일 것이기 때문에 딱히 고개를 돌려도 볼 것이 아무것도 없고 시선이 자동으로 빛이 있는 유일한 장소인 화면과 키보드로만 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그렇게 해 놓고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핑계로 가방에서 소설책을 꺼내 그 귀한 스탠드 불빛이 내리는 시간을 허비한다 해도 상관없다. 스무 살도 채 되기 전부터, 어쩌면 열 살도 되기 전부터 공부할 때만 되면 책상 정리나 잘 나오지 않는 볼펜 시험하고 버리기, 샤프심이 충분히 있는지 확인하기, 일주일치 공부 계획 세우기 등 공부'만' 빼고 모든 일을 하던 버릇이 도진 것뿐이니까. 그건 딱히 내 잘못은 아니겠지만 사실은 그런 것을 방지하겠다고 그렇게 스스로 처박힌 것일 테니 마음을 잘 먹어야 할 것이다. 글을 쓰려고 하면 읽지 않은 책들의 표지가 눈앞에 선하고 꼭 들어가 보아야 하는 웹페이지가 생각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그러니 글을 반드시 써야 할 때는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 입주해서 글을 쓰는 상상도 해 보았다. 그렇지만 그 경우는 글을 쓰는 것은 철저하게 취미활동이 된다. 왜냐하면 글을 써서 그런 아파트에 들어갈 돈을 모은다는 건, 요원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를 꿈꾸는 욕심과 목적성이라면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나을 법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러면 아파트는 강남에 있어야 할 것이다. 한강을 내려다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창밖을 내다본다는 것인데, 남향이 되어서 햇빛이 정면에 있어서는 창밖을 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건 강남 아파트는커녕 어쨌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 자체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만 한 것이므로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거실 베란다 창문 한가운데에 강의실용 책상을 옆으로 보게 가져다 놓고 앉아서 글을 쓴다. 잠깐 고개를 돌리면 파란 하늘이 보이고 글을 쓰며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만 창밖을 향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아마 베란다 바닥이 보이겠지. 다시 책상을 베란다로 옮기자니 너무 더울 것 같고... 그러면 베란다 창으로는 단열이 잘 되고 거실의 베란다 창을 열어 놓고 베란다 창문 옆에 책상을 두었다고 해야겠다. 책상을 본 상태에서 고개를 돌리면 한강과 파란 하늘이 보인다. 아파트들과 그 뒤로 다른 건물들이 보인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한강 건너편을 본다. 강변북로로 지나가는 수많은 차들을 본다. 다시 화면을 보며 글을 쓴다. 고개를 들지 않고 눈만 책상 아래로 해서 창밖을 향하면 아파트 아래로도 올림픽대로에 수많은 차들이 서 있다. 강변북로는 차들이 달리고 올림픽 대로는 차들이 못 가고 밀려서 서 있는 장면은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을 뿐이다. 이유가 없다. 신기하지만 이런 상상이 아니라 다른 상상을 할 때도 왠지 한강을 기준으로 북쪽은 차들이 잘 달리고 남쪽으로는 꽉 막혀 있을 것만 같다. 아마 내가 강남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보통 올림픽대로를 이용하고 서울 밖으로 나갈 때는 강변북로를 이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사실 이렇게 실제로 가 보지도 않았지만 상상을 하는 것이 제법 쓸모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호텔에서 글을 쓸 때도 계속해서 흘끔흘끔 밖을 내다보는 이유이다. 나는 도심도 아닌 아파트에서 저층에서만 살아 보았는데, 거실 창문으로 내다보면 한쪽은 놀이터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산책로가 있었다. 책상이 있는 놀이터 쪽 방으로 들어가면 창문이 높아서 책상에 앉아서 내다보면 나무의 일부와 건너편 단지만 보였는데, 거리가 60미터는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면서 창문으로 살랑살랑 바람이 들어오면 그렇게 여유가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때는 글을 만년필로만 쓸 때여서 길게 쓰지는 못했다. 그 기억도, 호텔들의 기억도, 고층 아파트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 결과물도, 집구석에서 글을 쓸 때의 기억도 모두 글을 쓰면서 자유롭게 소환할 수 있다. 소환하는 법은 간단하다. 화면에 집중하고, 옆으로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데 돌리지 않는 거라고 상상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글을 쓰려면 그런 상상에는 집중할 수가 없어서 머리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더 좋다거나 글이 더 잘 써진 느낌이 드는 건 아니다. 그런 상상을 해서 잘 써진다면 호텔에서는 정말 잘 써질 테니 아마 주말마다 그런 분위기의 카페를 온 나라를 뒤져서라도 찾아내고야 말았을 것이다. 호텔에서 카페로 갑자기 방향을 틀어버린 이유는, 주말마다 호텔에 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서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산이 보이든 강이 보이든 시내가 보이든 누구에게나 눈호강한다는 느낌이 드는 카페는 있을 수밖에 없다.
사실, 가장 현실성 있는 해답은 늘 집에서 글을 쓰면서 한 번씩 글을 쓰러 가는 카페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해답이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글이 점점 좋아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환경을 꾸미는 것은 그저 '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으니, 뇌야, 너도 이제 보답해 봐라.' 하는 수준의 강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런 곳에 가지 않는다고 뇌가 갑자기 글쓰기가 지겹다고 할 리도 없으니 사실 강요도 어불성설이다. 집에서 갖은 상상을 다해가며 책상에 집중을 하다가 책을 읽으며 영양분을 흡수를 하고, 다시 광합성하면서 산소를 내놓듯이 글을 쓰면 솔직히 그게 다다. 그리고 그렇게 처박혀서 몇 시간이고 글만 쓸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낭만적이리라 생각한다. 그러다가 한 번씩 또다시 처박힐 만한 카페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카페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도 성격과 맞지 않는다. 그런 카페를 찾으면 다행이지만 막상 가보니 기대에 못 미치는 방문이 늘어나면 그것도 돈 버리는 일이다. 글을 쓸 만한 분위기가 아닌 건 참을 수 있지만 사진만 잘 나오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맛의 음식이 있는 곳이기까지 하면... 그래서 아내는 열심히 찾고 나는 따라가기만 한다. 다행히 이제까지는 모두 마음에 들었다. 뷰맛집이라는 곳만 피하면 되는 걸까 싶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충분히 사진을 보고 내가 좋아할 만한 분위기인지까지도 체크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마운 심정이다. 덕분에 처음 방문해서 글을 쓰지 않고도 풍경을 마음에 담고 와서 글을 쓰면서 떠올려 보고 있다. 아마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다음번에 내가 먼저 '그때 그 카페, 거기 글 쓰러 가자'라고 말하는 곳이 생길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취미이면 이렇게도 자유롭고 좋다. 좋기만 한 건 아니지만, 작가가 아닌 주제에 글을 쓰려고 뭔가를 한다고 하면 자체로도 사치가 되니 사치를 이렇게 간단하게 누려본 적이 없다. 이런 재미를 이해해 주는 아내도 고맙고, 나 자신에게도 고맙다. 이제 읽을 만한 글만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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