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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으기

by 루펠 Rup L

아침부터 하늘이 흐려 보여서 비가 오려는 건지 보려고 창문을 열었다가 습기가 훅, 하고 다가오는 바람에 깝짝 놀랐다. 집안 한가운데 놓인 제습기가 희망습도를 50%로 맞춰 놓았지만 계속해서 55%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비가 금방 올 것 같지는 않다.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올 것이라고는 하는데, 비가 온다고 하고 오지 않는 것도 올해는 워낙 흔한 일이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우산을 들고나가는 편이 낫다.
어제 집에 오는 길에 사다 놓았던 단백질 음료가 있어서 그것을 마시고 모카포트에 커피를 내렸다. 우유가 든 음료라 속이 살짝 부글거리지만 출근 전에 화장실에 다녀오면 되겠지. 예전에는 일찍 일어나서도 할 일이 없어서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책을 읽을 시간이 아무래도 부족해서 일어나자마자 전자책으로 추리소설을 붙들고 있었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 중에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그냥 책을 읽기 싫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돈공부도 마찬가지다. 돈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인데 시간이 없어서 돈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루종일 핸드폰으로 유튜브나 뉴스만 짬 내서 본다는 건 그냥 게으르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유튜브를 보는 것을 시간을 일부러 내서 본다고 하지 않고 짬이 날 때마다 본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실 책을 읽는 것도 그런 식이다. 그냥 시간이 나니 펼쳐 드는 것뿐이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건 거창하게 A3크기는 되는, 가죽으로 호화롭게 장정한 두꺼운 나무 표지에 아무나 읽지 못하도록 쇠사슬과 강철 잠금장치가 있는 양피지 책 같은 걸 읽으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중 내가 죽을 때까지도 다시 읽을 것 같은 책들을 모아 제본을 다시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논문제본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내 컬렉션인 양 표지만 다시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책을 보내면 아름답게 고서적처럼 가죽 장정을 해 주는 서비스가 있기는 했다. 아마 회사 위치가 프랑스였던가. 하지만 이사를 다니면서 내 손때나 글씨가 들어 있는 책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부터 다시 모으려고 하지만 이미 절판되어 중고책으로만 구입해야 하는 책들도 적지 않다. 반드시 제본해서 한 세트를 만들어 한 줄로 꽂아 넣는 그런 모습을 상상한 것은 아니다. 단지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내 책장에서 아무 때나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생생한 책들을 실제 내 책꽂이에 꽂아놓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 책들이 모두 꽂혀 있었다면 그중 어떤 책이 오래갈지 판단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책들이 속세에서 흩어지고 나서야 그중에서 다시 건져야 할 것들이 보인 셈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새로 나오는 책은 사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책들은, 내 책꽂이를 이루기도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도 일종의 복제본을 남긴다. 양각 무늬가 있는 물건을 진흙에 찍었을 때 반대로 모양이 새겨져서 나중에 그 위에 용융된 금속을 부어 똑같은 양각 문의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현상이 머릿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기억하는 초능력은 언제나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어떤 책을 접했을 때 받은 머릿속의 충격이라거나, 뭔가 긁은 듯한, 그렇게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느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느낌이 그 책을 생각하면 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것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 때문인 경우도 제법 많다. 궁금한 게 있어서 그 부분을 찾아 다시 보는 것은 다시 읽는다고 하지 않는다. 뭔가를 찾아본다고 하지.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는 것은 영화를 다시 트는 것과 같아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중고책으로 혹은 아직 새책으로 예전의 책들을 책꽂이에 다시 모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책들이 모두 제본의 범위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다. 막상 다시 읽어서 그때의 느낌이 들지 않으면 다시 버려질 것이다. 새 책은 아직 한 번밖에 읽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모르겠다. 어쩌면 열댓 권 남짓한 양만 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명확한 목록은 육칠십 살이 넘어서야 정해지지 않을까 싶다.
몽테뉴의 전기를 읽고 한때는 그의 책상에 고독하게 놓여 있었다는 성경이 부럽기도 했다. 성경 한 권만 읽으면 다른 모든 책이 필요 없었던 시대였다. 책이라고는 경서밖에 없었던 우리나라도 있다. 읽을 것이 별로 없다면 별로 없는 그 냥을 쉬지 않고 파헤칠 수 있는 법이다. 어쩔 수 있나. 넓게 읽을 수 없으면 깊게 읽는 수밖에.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성경도 좋고 다 좋지만 모두 책이어서 좋은 것이다. 연애백과 같은 책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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