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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깎이

by 루펠 Rup L

아트박스에서 평소처럼 샤프와 볼펜이 있는 필기구 코너를 돌아보다가 오랜만에 다른 문구 코너도 가 보았다. 생각보다 여러 종류의 귀마개와 포스트잇, 연필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다양한 모양의 연필깎이들이었다. 어렸을 때는 필통에 들어가는 조악한 모양의 칼날 하나짜리 연필깎이 아니면 샤파의 커다란 삼각형 또는 기차 모양뿐이었는데 오늘 보니 레고로 동물 모형을 조립하고 그 동물 모형의 항문 쪽으로 연필을 넣어 돌리는 연필깎이부터 피라미드 모양, 단순한 네모 모양, 심지어 어렸을 때 내가 사용하던 칼날 하나짜리 연필깎이까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때는 친구가 사용하던 전동연필깎이를 보면서 저거 하나 있으면 나도 연필을 사용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헤밍웨이의 파리 기록을 보면 연필과 연필깎이, 수첩만 있으면 카페에서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지우개 이야기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필기가 아니라 습작이니 굳이 지워가면서 깔끔하게 쓸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냅킨에 대고 연필깎이에 연필을 넣고 돌리면서 어떻게 글을 시작할까 고민하는 모습을 그려 보다 보니 연필깎이를 하나 사 올 것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1920년대였고 아마 샤프가 당시에 있었다면 샤프를 썼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마 잉크에 펜을 찍어가며 글을 쓰는 것이 휴대성에 맞지 않아서였을 테니 당시에 샤프가 아니라 볼펜만 있었더라도 연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연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드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이다. 어쩌면 70년대처럼 휴대용 타자기가 있었다면 그 타자기를 들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필이든 펜이든 만년필이든 필기구를 보면 뭔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적이 없다. 흔하지 않은 필기구를 보면 '저것만 있으면 글이 잘 써질 것 같다'는 생각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글은 도구가 생긴다고 해서 잘 써지는 것이 아니다. 글은 써지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니까. 그래서 내가 할 수 있은 일은 그런 생각조차 모두 적어 내려가는 것뿐이다.
사실 집에도 연필이 몇 자루 있기는 하다. 연필깎이는 없지만 연필이야 깎고 싶으면 깎고 쓸 일이 없으면 깎을 필요가 없는 것이어서 집에 있는 그 몇 자루의 연필은 모두 깎지 않은 새것인 상태 그대로이다. 막상 연필을 깎아 보았자 그 연필로 써야 할 글은 이미 키보드를 사용해서 잘 쓰는 중이다. 연필깎이를 구입한다면 그야말로 감성에 기댄 충동구매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그렇지만 연필이 집에 있게 된 계기도 결국은 감성 때문이었다. 물론 그 시기도 절묘하게 수첩에서 컴퓨터로 글을 쓰는 수단이 바뀌었을 때여서 아직 연필로 글씨를 쓰려면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충동구매여도 지금과 그때는 다르다.
초창기에 사용하던 수첩은 앞부분이 모두 번져 있다. 글을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마 수시로 펼쳐서 읽는다면 읽지 못할 정도가 되는 것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글씨가 번져 가고 있다. 거칠고 두꺼운 종이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당시 그 부분을 쓸 때 샤프심을 생각 없이 HB 대신 B를 사용해서 그런 것이고 그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번지지 않은 곳은 HB로 쓴 곳이어서 확연히 차이가 보이는 데다 지금 집에 있는 연필들은 모두 HB 심이기 때문에 걱정할 건 솔직히 없다. 번질까 봐 연필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쓸모가 없는 필기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연필을 잡을 때 나무로 만들어져서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 느낌은 잊기가 힘든지 가끔 손에 쥐어 보고는 한다. 글씨를 써 볼 생각은 하지 않지만 글을 쓰는 자세는 취해 보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모두 허락하지 않아 샤프를 사용하지 못해서 연필로만 글씨를 썼다. 4학년 때부터는 샤프를 썼지만 교실에 도둑이 있어서 클립에 온도계가 있는 샤프에서는 그 클립만 훔쳐가는 등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가 결국 학교에서는 연필만 사용했다. 중학교 때는 제도 샤프를 썼지만 가끔 집에서는 연필을 쓸 때도 있었다. 사실 집에서는 수학 문제를 풀 때, 손에 잡히는 대로 샤프든 연필이든 썼던 것 같다. 그냥 공부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하는 시기였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샤프와 볼펜만 사용했다. 볼펜은 빨강, 파랑 등으로 표시할 때만 사용했던 것 같다. 대학교 시절부터는 정말 연필을 접할 일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돌아보니 연필이 향수를 일으킨다고 하기에는 너무 접했던 시기가 짧았는데 향수가 있는 것처럼 느끼다니 학교라는 곳에 처음 가서 글씨를 쓸 때 사용해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연필 자체가 가진 매력 때문이지 향수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필깎이는 연필보다 사정이 더 안 좋아서 아예 연필이 없으면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그럼에도 연필만큼이나 연필깎이 자체의 매력도 작지는 않다. 단 하나의 용도임에도 어쩌면 그렇게 존재감을 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반대로 연필깎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연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연필깎이가 있지만 연필의 종류와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연필이 그만큼 표준화가 되어 있다는 뜻이고, 반대로 연필을 아무 생각 없이 깎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연필깎이들이 있다는 것은 연필의 규격화가 그대로 연필깎이의 규격화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연필의 규격이라고 해 보았자 심의 굵기, 연필의 굵기, 단단함 등인데 연필깎이도 그 연필깎이에서 깎이는 연필의 굵기, 단단함 정도 말고는 신경 쓸 게 없으니까 말이다. 그 외에는 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없기에 그만큼 다양한 연필깎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향수도 향수지만 아직도 연필깎이를 기획하고 새로운 모양으로 만들어내고 납품하는 업체들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 연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연필 회사들이 문 닫는다는 뉴스는 많이 보았으니.
연필깎이는 연필깎이고 연필은 연필이다. 공존은 하지만 연필은 연필깎이를 고려해서 모양을 정한 게 아니고 연필깎이는 연필과 상관없이 계속 나온다. 둘은 서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 등을 기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을 바라보며 옛날 기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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