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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Aug 05. 2024

생활 '속'에서 글쓰기

글을 쓰는 행위는 물리적으로는 종이와 같은 평면 위에 선과 점 등으로 이루어진 문자를 그려 넣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글의 모양은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므로 글의 총합의 의미는 그 글이 쓰여진 문자의 구조와 그 문자가 표현하는 언어에 따라 달라질 뿐, 솔직히 글을 쓰는 기계적인 행위 자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자동차를 운전해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뿐이고, 자동차 엔진은 단지 우리가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관계가 있을 뿐 목적지와 하등 접점이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엔진이 동작을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갈 만한 출력을 냈는지, 혹은 조향장치를 가지고 방향을 바꾸어 가며 일정한 곳을 향했는지 같은 것들을 일일이 따져 보지 않으면 엔진이 동작했다는 사실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글을 쓰는 행위 역시 단지 글을 썼다고 하면 무엇을 했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도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글을 쓴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 글을 읽는 것이다. 평소의 생활을 훤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또는 어떤 글을 쓰겠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고 다녔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엔진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정도의 사실일 뿐이고 실제 그 엔진을 탑재한 차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방법은 직접 그 차를 함께 타거나 혹은 나중에라도 찾아내는 것 밖에 없듯이 어떤 글을 썼는지는 그 글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알아낼 수 없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글인가? 일정한 필터를 거쳐 알려야 할 이유가 있는 것만 추려낸 신문 기사인가? 개인적인 글인가? 소설인가? 누군가 읽고 무언가를 느끼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가? 글을 썼다고 하면 어떤 글인지에 대해 생각하자면 끝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글을 막 쓰려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환상이 조금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겠다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던 친구들도 보았지만 아마도 그 친구들처럼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글을 쓸 거야'라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한 사람과 나처럼 어렸을 때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고 나는 그 안에 들지 않으리라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 안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은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처음에 단지 책을 읽고 그 책에 밑줄을 쳐 놓은 것을 따로 적어 놓는 수준에서 시작해서 그렇게 몇 번을 읽다 보 한 권의 책에서도 내가 찬성하는 부분과 반대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따로 적어 놓기 시작하면서 생각을 적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소설 같은 글을 쓰겠다고 도전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메모로 시작한 나로서는 소설은 아직도 요원한 꿈이다. 그럴듯하지도 않은 소설이 몇 편이 나오고 나서야 읽을 만한 것이 그나마 나온다고 하니 얼마나 더 지나야 그 정도 되는 도전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들을 적은 짧은 메모만 쓸 때도 나중에 다시 읽어 보면 그 메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것을 나는 '근본 없는 나뭇가지'라고 부르는데, 나뭇가지를 잘라내어 따로 심으면, 잘라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나무를 볼 때마다 나뭇가지를 잘라낸 자리를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무를 보아도 느 부분에서 가지를 잘라낸 건지 알아보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생각을 잘 요약해서 적었다고 하더라도 적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전체의 생각(나무)이 그 메모만 보아도 바로 떠오르지만 사실 며칠만 지나도 그 메모를 읽었을 때 전체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지금도 글감노트에 메모를 못했을 때는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최악은 메모를 읽었을 때 그 메모의 문장 자체가 무슨 의도로 적은 건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이다.
예를 들어 커피를 사러 갔다가 부모가 어 자녀에게 경험을 쌓게 해 준다며 주문을 직접 시키고 카운터에서도 귀엽다며 하나하나 일일이 물어보며 친절하게 주문을 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그걸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기에는 그 바로 뒤에 아무 안내나 양해도 없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알지 못한 채 줄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뒤에 있는 서 있던 그 사람은 버스 시간이 이삼십 분 남았지만 버스 타는 곳까지 들고 가면서 마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주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가갔는데 내가 거의 다 갔을 때 입구만 바라보고 있던 그 가족이 급히 걸어와서 앞으로 끼어들었고 카운터에서 그 가족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여유롭게 아이에게 주문을 시키는 것이다. 결국 화가 나서 기다리다 와 버리고는, 그날 '훈훈한 분위기를 위해 강요된 친절'이라는 문장을 적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게 축약된 문구는 경험에서 문장으로의 변환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반대로 문장에서 그 상황을 떠올리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건 다음 날 보아도 무슨 의도로 쓴 글인지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결국 나중에도 쉽게 알아보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뒤에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려다가 아이에게 교육을 하는 훈훈한 장면을 위해 10분을 가만히 기다리다 포기한)'이라는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짜증이 났는데 솔직히 이 짜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내용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면 그 감정이 일어난 원인을 번거롭더라도 모두 적어야 한다. 메모라고 해서 짧기만 하다면 소용없다. 말 그대로 메모는 소용을 다하도록 써야 한다. 렇게 메모를 보고 쓴 글이 꼭 정보를 주는 글이지는 겠지만 그 메모는 나에게 그 경험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메모 수준으로는 부족한 것이 있으면 조금씩 덧붙이다 보니 수첩에 하던 메모도 점점 제대로 된 의 형식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글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짧았고, 생각이나 있었던 일들을 적어 나가기 시작하긴 했지만 단지 잊지 않으려는 것을 급히 새겨 놓는 것에 불과했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멋진 사진이라기보다는 혹시 몰라서 휴대폰으로 찍은 흔들리는 영상일 뿐인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 글은 웬만하면 생활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다수가 되었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남기는 메모도 마찬가지이다. 그 문장을 읽었기 때문에 나온 생각이니 책의 그 부분에 메모를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 일에 대해 글을 쓰듯이, 어떤 문장을 읽었기 때문에 그 문장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구도가 명확하다. 글을 쓰고 싶어서 글을 쓴다기보다는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입력이 있으면 뭔가 출력을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글의 형태를 띤 것이다. 살면서 글을 쓸 만한 경험이 생기지 않으면 글이 없는 셈이었다. 나는 이것을 생활 '속'에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생활 속에서 글쓰기와 생활 밖에서 글쓰기

생활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은 사실 매우 여유롭다. 글을 쓸 것이 없으면 쓰지 않으면 되고 글을 쓸 것이 있으면 글을 쓰면 된다. 당장 쓰지 않을 것 같으면 글감노트에 적어 놓으면 된다. 나중에 글감 노트 글감을 찾아 글을 쓰게 되면 그것 역시 생활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제까지 내 글쓰기는 이곳에 머물러 왔다. 물론, 생활 속에서 글을 쓰는 것에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 생활 밖에서 글쓰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노력은 영문 기사를 보면서 모든 문장에 주어/동사/목적어, 명사/형용사/동사/부사 등을 적어 넣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생활 밖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생각을 주는 이야기가 새로 인생 안에 들어왔을 때에만 그것으로 말미암에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없이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냥 규칙적으로 매일같이 몇 천자를 쓴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어쩌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누군가와 일상적인 대화를 할 일이 없더라도 엄청난 일이 가까이에서 벌어지면 나도 모르게 침을 튀며 이야기할 수 있는데 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활 밖에서 글쓰기가 굳이 어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몇 년 전 발생한 그 사건 때 했던 생각과  현재를 비교한다는 식으로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당장 아무 계기도 없이 글로 써 내려갈 수 있으면 그게 조금 덜 직관적이라는 뜻이다. 어떤 글이든 아무 입력도 없이 나오는 글은 없다. 하지만 특별한 이 있을 때 그 특별한 에 대한 글만 일회성으로 나오는 것은 어쩌면 책을 읽지 않으면 책에 메모할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일종의 순환논법이 될 수도 있을 만큼 단순한 원리이다. 반면, 일기를 쓰는 것처럼 특별한 일이 없어도 계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게임과 같다. 내 머릿속을 헤집어 글로 쓸 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 뒤적거리는 것이다. 마침내 무언가가 발견되지만 곧장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속 얼르고 달래듯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의 장력으로 당기다 보면 뭔가가 계속 나오는 정도이다.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이 생활 밖에서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동안 '생활 속에서 글쓰기'만 해왔다. 계속 강조했지만 책에 메모를 하는 것부터가 그렇고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것도 그렇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으면 혹시 몰라서 만들어 둔 글감노트를 다. 첫 번째 문장을 적고 계속 생각을 캐내 간다. 그런데 글감 노트를 적을 때의 상황 떠올리면서 그것을 가지고 글을 쓰면 그것도 결국 생활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쓰겠다는 생각만 잊지 않고 질기게 하고 있으면 결국 계속 쓸 수 있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즐거운 상황에서는 눈에 띄는 것이 무엇이든 조금만 관찰하면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점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게 즐거울 뿐,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무엇을 읽고 싶어 하는 것인지, 문체는 어떤지 등은 아직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 즐거우면, 그래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을 다 얻었다면 더 이상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독자'층'이 있으면 좋겠고 책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나마 들기 시작하면, 그래서 글을 쓰는 즐거움만으로 끝나지 않게 되면 그때는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글을 더 이상 쓰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글을 쓰는 것도 관성이 있어서 그 즐거움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계속해서 글을 쓸 일만 생각하게 된다. 일하면서도 틈틈이 글감노트에 적을 문장들을 휴대폰에 남기기도 하고 점심시간을 틈타 글을 쓰기도 한다. 그 와중에 남의 글을 읽는 것도 예전의 단순히 어떤 책이 유명해서 읽었다, 베스트셀러라서 읽었다를 넘어서 어떤 사람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의 글들을 꿰뚫는 문장 자체에서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글을, 정해져 있는 내 생각이라는 것을 묘사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던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야 하는 글로 변신시켜야 할 때가 오는 것이다.
그러면 생활 밖에서도 글을 써야 한다. 생활의 경험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닥친 일에 연연해 가며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글이든 지난 일의 경험이 없다면 쓰지 못한다. 그것들이 내면에서 충분히 삭고 우리의 생각과 버무려져서 글에 녹아 나오는 것이 생활 밖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지, 경험을 하나도 넣지 않고 상상만으로 글을 쓴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내가 말하는 생활 밖에서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소설을 쓴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데, 심지어 소설도 상상만으로 생생하게 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활 밖에서 글을 쓰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일정한 주제를 두고 그 주제로만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일정 기간 동안 틈만 나면 내가 바라보는 나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쓰려고 해 왔다. 그렇지만 그렇게 써도 매번 다른 글이 써지는 것을 보고 희망은 가지게 되었다. 아직 희망일 뿐이지만 쓰려는 대로 써진다는 것도 솔직히 반신반의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뿌듯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소설도 도전을 해 보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쉽게 보고 달려드는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도전'이다. 도전이자 연습이다. 어려울 게 뻔하지만 중간에 멈추고 글을 방치하거나 버리지 않으려는 도전이자 연습이다. 아직은 그러기 쉽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글쓰기에 대한 글만 쓰면서 생활 밖에서 글을 쓰는 것 가능하다는 것은 깨달았다.

글쓰기의 즐거움, 생활 밖에서 글 쓰기

글을 쓰는 것은 생각하는 일이다. 공상에 잠기기 좋아하는 사람은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행동과 생각하는 행위 사이의 균형만 잘 맞으면 공상에 잠겨 있는데 살짝 더 깨어 있는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듯이 재미있어서 하는 일은 말린다고 그만하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좋아서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절대 같을 수 없다. 생활 밖에서 글쓰기는 도전 과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생활 속에서 글쓰기만 한다고 글을 못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글쓰기도 그 글쓰기를 하기 위해 스스로의 생활을 들여야 보는 기회를 통해 남들이 사소하게 보는 것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볼거리를 찾아내는 것이 취미가 되는 뜻밖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것도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재미있을 만큼 기발하다면, 더욱이 그런 것을 계속해서 찾아내는 사람이라면 아재개그나 간간이 던지면서 "맞잖아, 내 말이 틀려?"만 반복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스스로 창의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옆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그 사람이 부하 직원에게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계절은 왜 네 개일까? 여덟 개로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상대방이
"그렇네요. 그런 생각은 못 해봤습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라고 묻자
"아니 모르지. 그런데 이런 고민을 안 해 보니까 나처럼 창의력 있다는 말을 못 듣는 거야."
옆에 앉아 있다가 체할 뻔했다. 그 뻔뻔함이라니. 나는 생활 속에서 글쓰기가 습관이 된 사람들의 글을 좋아한다. 기발한 반전이 아닌 글도 많다. 저절로 미소를 같이 짓게 되는 글도, 코끝이 찡해지는 글도 수시로 나온다. 모두 글쓰기가 좋아서 쓸 뿐, 억지로 기발한 것을 건져 내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얽히면 잘 나가던 것도 멈추게 되어 있다. 나도 생활 속에서 글쓰기라도 잘하고 싶다. 단지 내게 잘 맞지 않을 뿐.
스스로에게 가능성을 부여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건 왕이 허수아비 하나를 찾아서 주교라고 임명해 놓고 자신의 대관식을 열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부하를 앞에 두고서만 스스로 창의적이라고 우길 수 있는 사람과 같은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 정도로만 말을 한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내와 딸 밖에 없다. 그래서 도전을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 와서 급히 뭔가를 출판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도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문제다. 어떻게 도전을 하고 어떻게 노력을 해야 글을 더 잘 쓸 수 있고 더 즐겁게 쓸 수 있을까? 지금까지 생각한 것처럼 경우의 수를 깨달을 때마다 하나씩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을까?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 어차피 써 나갈 글이다. 방향을 모른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을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도 내게는 충분히 긴 여정이었다. 40년 인생에서 20년. 그중에서 15년은 전혀 진지하지 않게,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할 거라는 상상도 하지 않고 지내 왔다. 그러니 그냥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만 없으면 유유자적한 글을 도 좋고 죽기 전에 독자가 생길지 알 수 없다, 정도로 생각하고 글을 써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대중성을 포기한다'와 같은 건 아니다. 대중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거지, 다들 읽기 싫어할 글을 다른 쪽으로의 방향 전환 없이 직진하겠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대중성이 있는지 없는지만 모르는 게 아니라 지금 가는 방향이 나와 맞는지도 역시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방향이 수시로 바뀔 것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낚시 좋아하는 사람이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하면 낚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뿐 그날 나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에 대한 글을 쓸 때도 계속 근자에 있었던 일들이 스며드는 걸 보면 아직까지 생활 밖에서 글쓰기를 하면서 생활 속에서 글쓰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섞여 있는 건 흔한 형태이기 때문에 내가 글 쓰는 방식도 이렇게 된다고 해도 딱히 불만은 없다. 내가 생활 속에서 글쓰기를 피하려는 건 단지 코로나로 아팠을 때처럼 특별한 일 없이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다고 해서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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